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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건네는 오프라 윈프리.
‘내가 고백을 통해 배운 것은 두려워할 것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뭔가에 두려움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짓누른다. 그러나 두려움 그 자체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오직 진실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내가 지금껏 겪은 모든 고통의 조각들이 쓸데없는 근심에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쓸데없는 근심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절망에 빠질 때에도 그것을 시청자와 공유하려고 애썼다.
‘나는 과거에 학대로 깊은 상처를 입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치유되었다고 확신할 때에도 나는 완전히 치유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항상 수치심을 안고 살아갔고 나를 성폭행한 남자들의 행위를 핑계로 내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탓했다’.
멋진 몸을 선보이고도 몇 달 몇 년이 지난 후 다시 살이 찌기 시작하자 절망감에 빠져들어 ‘나는 다시 결단력을 잃고 말았다’는 것을 그대로 알리기도 했다.
미디어 전문가들은 오프라의 고백을 통한 ‘테라피’(Theraphy·치료) 문화코드가 힘을 갖게 된 데는 미국사회 특유의 독특한 문화적 배경이 있다고 말한다.
좋은 정신과 의사
‘정신과를 찾는 미국인은 1960년대 14%였지만 1990년대에는 30%대에 달했다. 1988년 갤럽조사 결과 성인 3명 중 1명이 자기계발 관련 책자를 사보았고 1990년에는 1500만명의 미국인이 50만개 ‘치료’모임에 참여했고 300여 개의 테라피 서점이 운영 중이다. 특히 남성보다는 여성이 신경증 노이로제 조울증에 더 취약하고 정신질환 약물도 더 많이 복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80년대 정신질환 약물을 처방받은 환자의 3분의 2가 여성이었다. 자기계발 관련 책자, 특히 가족 대인관계 스트레스 걱정에 관한 책을 사 보는 사람도 70~80%가 여자였다.’ (‘오프라 윈프리의 시대’ 중에서)
오프라 쇼가 주제로 삼은 것은 정치적 이슈와는 거리가 있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이다. 1986년부터 1992년 사이 쇼의 주제 목록을 보면 1000여 차례 방송분 중에서 사회 정치적 주제를 다룬 경우는 12차례에 불과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당신은 자식을 어느 정도나 보호하고 있는가’‘전통적인 결혼생활, 과연 좋은가’‘여자들이 (남자들로부터) 버림받는 이유는?’‘남편들을 위한 학교’‘여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열 가지 어리석은 짓’‘꼭 부끄러워해야 하는가’‘옛 배우자를 극복할 수 없다’‘우정을 심판해보자’ 등등이다. 감정의 폭발, 섬뜩한 이야기, 섹슈얼리티, 핵가족의 파괴, 억제된 욕망의 분출 등이 그녀 쇼의 단골메뉴다.
에바 일루즈 분석에 따르면 그녀의 쇼가 일관되게 다루는 주제는 크게 ⓛ재미없고 사소한 주제(예: 화장은 꼭 해야 하는가? 왜 좋은 찻잔을 써야 하는가) ②일반적인 가족의 구조에서 일탈된 주제(예: 딸을 강간한 아버지)다. 자연재해나 사회적 부패를 고발하는 데는 무관심한 대신 인간관계에서 자아가 어떻게 상처를 받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가족이나 연인관계에서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주로 등장시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성매매를 하는 어머니, 박사학위까지 받았다가 노숙자로 전락한 가장(家長)을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중산층의 체면을 무너뜨리고 가정을 낯선 공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런 것들을 통해 그녀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에바 일루즈는 ‘비틀기’를 통한 진실 보여주기라고 말한다. 현실에 있지만 있을 수 없는 상황을 그려내어 현실 다르게 보기를 시도하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초현실주의 기법’이라는 것이다. 일상에서 사소한 면을 과장하고 낯설게 변모시킴으로써 삶의 이면이라는 변덕스러운 면을 보여주어 오히려 일상의 평범함에 안도하는 효과를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일곱 살 딸을 성폭행해온 의붓아버지와 딸을 함께 출연시킨 프로에서는 아내와의 소통 부재로 마음고생을 하던 남자가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딸과의 스킨십을 경험하면서 그런 방식(근친상간)을 통해서 커뮤니케이션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털어놓으면 시청자는 순간 혼란스러움에 빠진다.
이런 오프라 쇼에 대한 평가는 때로 가혹할 정도로 혹독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정심과 연민을 극대화시키는 싸구려 쇼’라는 비판의 한켠에서 어떻든 그녀의 쇼가 굳건했던 것은 그녀가 일관되게 가정생활과 가족 노동 중시, 행동과 성공을 지향하면서 능력과 실력을 중시하는 중산층의 가치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점점 도덕적인 행위자
오프라 쇼는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미디어나 문화비평가들로부터는 ‘헛소리, 잡담만이 가득한 백해무익한 쇼’라는 욕을 먹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대우는 달라졌다. ‘타임’은 윈프리를 21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고 ‘뉴스위크’는 21세기를 ‘오프라의 시대’로 명명했다. ‘LA 타임스’는 이렇게 말할 정도다.
‘그녀는 이 지구상에 말씀을 전하기 위해 보내진 스승이기도 하다. 21세기의 현자는 여성이다. 석가모니도 당시에 텔레비전이 있었다면 방송에 출연했을 것이다. 심오한 도덕적 혜안을 갖추고 자신의 지지자들과 특별한 교감을 나누는 오프라 윈프리는 방송계의 거물에서 비범하고 영적인 존재로 변화했다.’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그녀가 발빠르게 내세운 ‘착한 방송’ 콘셉트였다.
오프라는 마흔 살 생일을 몇 주 앞둔 1994년 1월 토크쇼 오프닝에서 “세상만사가 얼마나 형편없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 세상을 좀 더 평화롭게 만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세상에 가치 있는 것’이 많으니 개개인의 문제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우선 관심을 둔 게 어린이 문제였다. 쇼의 단골소재인 문제가정의 부산물이자 가장 큰 피해자라고도 할 수 있는 아동에 집중함으로써 미래지향적인 문제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그녀는 1990년을 ‘아동의 해’로 정하고 한 달에 한 편씩을 아동문제에 할애했다. 이듬해에는 아동 성폭행범이 자신을 고발한 여아(4세)를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시민단체가 오프라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오프라는 유죄가 입증된 아동학대자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자는 법률안 운동을 벌인다. 법 제정을 위해 1991년 11월 상원사법위원회에서 증언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TV에 알렸다. 결국 이 법은 클린턴 정부시절 통과된다.
윈프리는 또 ‘영성 강화운동’을 프로그램에 도입했다. 철학자나 뉴 에이지 운동가, 긍정의 힘을 설파하는 사상가들을 초대해 ‘마음의 병’을 고치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에서 주는 일관된 메시지는 ‘내 인생에 벌어지는 것의 모든 원인은 내 안에 있다’ ‘나를 규정짓는 건 영혼이다. 그리고 이 영혼은 더 위대한 영혼에서 온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을 닮아간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 프로그램 제목들은 ‘우연히 베푼 친절’ ‘부모님에게 사랑한다는 편지를’ ‘주위에 천사가 살고 있어요’ ‘꿈을 이루는 법’ 등이었다.
책을 선정해 소개한 북 클럽의 성공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북 클럽은 미국의 독서율을 높이는 데 엄청난 기여를 했다. 오프라 북 클럽에 소개된 추천도서마다 모조리 베스트셀러가 된 덕분에 미국 출판 산업이 소생했고 문학계 지형이 바뀌고 활자매체가 구원을 얻었다는 평가도 있다.
오프라 윈프리가 ‘시시껄렁한 잡담의 여왕’에서 ‘영적 존재’로 대변신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성공의 길’을 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개인적 고통을 대중 앞에 단지 공개하는 것에서 벗어나 시청자를 교화하고 역량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끌어올리려 한 것이다.
자신의 역할도 단지 고백하고 폭로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응급처치를 소개하는 치유자로 바꿔나갔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품위’와 ‘배려’였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이미지도 점점 도덕적인 행위자, 심리치유사로 바뀌었다.
어느 날, 독일 강제포로수용소에서 잔혹행위를 겪은 경험이 있는 여성이 게스트로 초대됐다. 이날은 그녀가 지금은 남편이 된 당시 변호사에게 40년 전에 보낸 편지를 낭독하는 모습이 소개되었는데 단지 과거의 고통을 소개하는 차원이 아니라 지금 그녀가 상처를 딛고 남편과 함께 얼마나 따뜻하고 건강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지에도 똑같이 초점이 맞춰졌다.
연인 사이의 사적인 편지 글을 통해 전쟁 이야기를 가족 이야기로, 홀로코스트라는 집단의 비극을 개인의 비극으로 바꿔놓으면서 내용이 무엇이든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나락에 빠진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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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민의 얘기를 듣고있는 오프라 윈프리.
에이즈에 감염된 환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도 단지 죽음과 결부된 고통, 두려움, 불안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자기극복의 이야기를 끌어내 시청자에게 힘을 주었다. 폭력적인 남편에게 시달림을 받는 게스트가 출연했을 때에는 ‘폭력적인 남편은 버려도 괜찮다’면서 피해자를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그런 남편을 버리는 방법까지 알려주었다.
오프라 윈프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긴 했지만 오히려 그는 특정 종파를 걷어냄으로써 인종 연령 성별 계급을 초월해 모든 시청자를 포용하는 ‘자아의 종교’ 이미지를 구축했다.
‘그녀의 성공비결은 그녀가 현대의 문화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혼돈에 빠진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제시하고 처리하는 문화적 형태를 보여주는 데 있다. 자아를 합리적으로 돌아보게 함으로써 혼돈을 이겨내고 자아를 잘 관리해 변화시키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심리적 고통이 국민 대다수를 짓누르는 일종의 질환이 되고 행복은 성공적인 자기관리에 있다는 문화가 팽배한 시점에서 그녀의 쇼는 고통을 이해하는 대중문화의 새로운 모습이다.’(에바 일루즈)
노력하라, 다시 노력하라
오프라 삶에서 특기할 점은 그녀가 정치나 이념과는 철저히 거리를 뒀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흑인이고 게다가 여성이기 때문에 아웃사이더(소수자) 의식에 머물 수도 있었고 차별을 없애기 위해 정치적 힘을 키워보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문화와 윤리에만 집중했다. 그것이 시공을 뛰어넘어 세계인의 마음에 닿는 보편적 호소력을 갖게 된 비결이기도 했다.
그녀가 유명해지자 사방에서 흑인을 대변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인권운동에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변인이 되어 흑인을 대표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검은 피부를 가졌다. 하지만 나는 여성이기도 하다. 내게는 이 모든 것이 똑같은 가치를 갖는다.”
제니스 펙은 윈프리의 성공비결을 ‘흑인들과의 거리두기’라고 단적으로 표현한다. 실제로 윈프리는 “어릴 때부터 ‘험악하고 증오가 가득 찬 흑인들’과는 관계를 맺지 않았다”고 말한다. 1987년 ‘피플 위클리(people weeklty)’와의 인터뷰에서 “흑인 학생들만 다닌 테네시 주립대학교에서의 시간이 끔찍했다”고 말했다. 흑인 친구들의 폭력적이고 호전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다 보니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한 것이었다. 흑인 사투리도 쓰지 않는 그녀를 친구들은 노골적으로 미워했다. 흑인 학생 대부분이 ‘흑인의 힘과 흑인의 아픔’에 관심을 가지는 사이 그녀는 ‘인격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것이 그녀와 다른 흑인들과의 차이점이었다. 그녀의 고백이다.
“10대와 대학 시절을 보내는 동안 인종에 대한 대화가 오갈 때마다 나는 다른 쪽에 있었다. 이것은 인위적이라기보다 내가 보통 흑인들이 느끼는 억압된 감정을 느낀 적이 없기 때문이다. … 인종은 적어도 나한테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흑인이거나 여자라는 이유로 하고 싶은 일을 못한 경험이 없다.”
흑인보다 백인을 더 좋아한다는 비난에 윈프리는 흑인이 성공하는 것이야말로 고초를 겪은 조상들에게 은혜를 갚는 일이라고 했다. 흑인의 삶을 한탄하며 서로를 헐뜯기나 하고 있으면 조상들 보기가 부끄럽지 않겠느냐면서 ‘내 마음속에 그린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노예근성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윈프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미국에 사는 흑인의 상당수가 자긍심이 없어 상처를 받고 자신이 스스로 구제할 수 없는 희생양이라고 여긴다”고 말했다.
“나는 숫자도 얼마 되지 않으면서 말만 많은 흑인 집단이 두렵다. 노예제도는 우리에게 서로 증오하라고 가르쳤다. 흑인은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반문해봐야 한다. 오프라가 해냈다는 건 나에게 어떤 점을 시사하는 걸까?”
“흑인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차별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오프라는 “인종은 정신상태에 불과하다. 자신의 피부색에 집착하는 사람은 실패를 극복할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오프라가 삶의 나침반처럼 삼았다는 흑인전설을 번안한 19세기 시에는 피부색도 성별도 뛰어넘을 수 있게 한 강한 정신력의 비결이 담겨 있다.
‘한번, 두번 실패하더라도/ 노력하라, 다시 노력하라/마침내 승리를 거두더라도/노력하라, 또 노력하라/모두가 할 수 있을/끈기만 있다면 너라고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이 법칙을 잊지 마라/노력하라, 또 노력하라.’
결국 이 시대 시청자가 오프라에게 반한 것은 그녀의 말재주나 방송진행테크닉이 아니라 ‘스토리’와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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