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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철녀들 ⑪]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

화이트보스 2010. 3. 20. 16:52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
비범한 존재로 거듭나는 사람
허문명│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저는 어려움이 닥칠 때면 이렇게 자문합니다. ‘이 어려움은 내게 뭘 가르쳐주려고 내 앞에 온 걸까?’” - 오프라 윈프리
 
 

3월11일 MBC ‘무릎팍 도사’ 가수 백지영 편을 보았다. 그녀는 지난해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데뷔했을 때와 얼굴이 많이 다른 이유는 성형수술 덕분”이라고 고백해 ‘솔직한 성품’을 드러낸 적이 있는데 이날 인터뷰는 그야말로 ‘솔직 버전’의 백미였다.

그녀는 8년 전 비디오 사건으로 시련을 겪었던 일을 비켜가지 않고 정공법으로 받아쳤다. 당시 일 때문에 오랫동안 ‘쇼크 상태’에 빠졌었다는 것, 모든 이의 눈을 피해 한 호텔 9층에 머물고 있을 때는 창밖을 바라보며 ‘여기라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는 고백도 했다. 당시 힘이 되었던 남자 친구 이름까지 공개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방송 이후 게시판에는 “어려운 일을 겪고도 씩씩하고 밝은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진짜 박수를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같은 응원 글이 이어졌다. 이제 사람들은 ‘누가 무슨 일을 겪었는가’가 아니라 ‘그 일을 겪을 때 어떻게 이겨나갔는가’ 하는 ‘위기 그 후’의 이야기에 목말라하고 있다.

‘백지영 현상’을 보며 기자는 뜻밖에 오프라 윈프리를 떠올렸다. 미국 토크쇼의 여왕에서 지금은 미국인의 정신적 평안을 이끄는 ‘영적 구루(guru·스승)’로 추앙받는 오프라를 성공으로 이끈 키워드 역시 ‘고백’ 아니었는가.

그녀는 불우하게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흑인 미혼모였다. 오프라는 자신의 탄생이 “(생모와 생부가) 나무 아래에서 했던 단 한 번 실수의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당시 부모는 결혼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단 한 번 실수’ 이후 고향을 떠난 생부는 나중에 출생증명서와 함께 아기 옷을 받아들고서야 자신의 딸이 태어났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한 후였다.

‘엄마’라는 인생 대신

오프라는 외조부모, 생모와 함께 미시시피 농장에서 자랐다. 늘 배고픔에 시달렸을 정도로 가난했다. 오프라가 네 살이 되었을 때 생모는 일자리를 찾아 타향(밀워키)으로 떠나야 했다. 오프라는 외할머니를 엄마라 생각하며 자랐다. 몇 년 뒤 오프라는 생모가 살고 있는 밀워키로 떠났다. 그곳에는 이미 배 다른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다. 생모는 파출부 일을 하며 생계를 책임졌기 때문에 집안은 가난했고 분위기는 늘 우울했다.

오프라는 정(情)을 느끼지 못하는 생모를 떠나 아버지가 있는 단란한 가정을 그리워했다. 꿈이 이뤄진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생활이 어려워 오프라를 도저히 키울 수 없다는 생모의 연락을 받은 생부가 오프라를 맡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도 생부와 계모 사이에는 아이가 없어 오프라는 모처럼 가족의 정을 느끼며 살았다. 하지만 몇 년 뒤 오프라는 생모가 ‘살기가 괜찮아졌으니 밀워키로 다시 오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생부가 사는 내슈빌을 떠나야 할 처지에 놓인다.

오프라가 ‘비행 청소년’으로 엇나가기 시작한 것은 이즈음이었다. 아버지와의 단란한 생활에서 다시 생모와 불편한 생활을 시작해야 했던 열네 살 오프라는 생모 집에서 돈을 훔쳐 가출하고 청소년들과 성관계를 갖는 등 타락한 생활을 하다가 청소년감호소에 수용된다. 우리로 치면 소년원에 간 셈이다. 다행히 감호소가 만원이었던 덕에 오프라는 집에서 특별훈육대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는 비행청소년으로 분류되었고 본인의 뜻에 따라 생부가 있는 내슈빌로 돌아간다.

이미 오프라는 임신 상태였다. 사이즈가 큰 옷만 입고 다녀 배가 불러와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해 임신 7개월이 넘어서야 아버지에게 들킨다. 유산하기에도 너무 늦은 때였다. 결국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2주 만에 죽었다. 아이의 죽음은 오프라를 나락으로 떨어뜨렸지만 대를 이어 가난한 흑인 미혼모로 살아야 할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오프라는 이 시절을 회고하면서 “무언가를 잃은 게 아니라 더 큰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할 수 있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엄마’라는 인생 대신 “새 인생을 시작하자”고 다짐했다는 것이다.

오프라는 나서기를 좋아하는 천성을 갖고 태어났다. 못생기고 뚱뚱한 검둥이 소녀였지만 말문이 터진 세 살 때부터 교회 연단에 올라가 말하기를 좋아했다고 하니 말재주는 타고난 것 같아 보인다. 고등학생이 되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영화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다.

 

윈프리는 새 책을 내면서 클린턴보다 많은 계약금을 받았다.

좌천된 이유

그런 생각으로 아르바이트를 찾다가 걸린 게 라디오방송국 진행자였다. 화려한 삶을 꿈꾸던 오프라에겐 날개를 달아준 절호의 찬스였다. 그녀는 죽어라 일에 매달렸고 마침내 고교를 졸업할 무렵엔 내슈빌 WTVF-TV 방송국 첫 번째 여성 뉴스 앵커로 발탁되는 행운을 거머쥔다. 흑인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3년을 보낸 후 규모가 큰 볼티모어 WJZ-TV 방송국 6시 뉴스 앵커로 발탁되지만 난관에 봉착한다. 방송국 담당자가 오프라의 뉴스 전달이 너무 감정에 치우친다며 아침 토크쇼진행자로 좌천시킨 것이었다. 화재 사건을 보도하던 중 사건 보도보다 피해자를 걱정하고 동정하는 데 더 치중해 객관성과 중립성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오프라는 울며불며 항의했지만 이 일이야말로 그녀를 토크쇼의 여왕으로 만들어준 전화위복이 되었다.

토크쇼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몇몇 지역에서는 당시 토크쇼의 제왕 ‘필 도나휴 쇼’를 앞서갔다. 비결은 뜻밖에도 그녀가 뉴스를 진행할 때는 단점으로 지적됐던 ‘시청자와의 동일시’ 능력이었다. 시청자의 고통과 아픔을 자기 것으로 느껴 함께 눈물을 흘리며 안아주는 오프라에게 스튜디오에 나온 게스트들은 마치 이 세상에서 자기를 가장 잘 알아주는 사람이라도 만난 듯 속을 털어놓았다.

그녀의 쇼가 처음으로 전국에 방영된 1986년 근친상간을 다룬 프로그램에서 중년여인이 ‘성폭행 당했다’고 말하자 오프라는 눈물을 쏟았다. 그러고는 카메라에다 대고 갑자기 광고방송을 내보낼 것을 요구했고, 광고가 나가는 동안 스튜디오에서 그 여인을 두 팔로 꼭 껴안았다. 다시 방송이 시작되었을 때 그녀는 성폭행의 고통이 어떤지 잘 안다면서 자신 역시 성폭행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타인의 고통에 다가서는 그녀의 행동은 매번 진심이었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오프라는 1984년 WLS-TV방송국 ‘시카고의 아침(A.M 시카고)’ 단독 진행자로 발탁되어 시카고로 옮긴다. 이 30분짜리 토크쇼는 방송 3개월 만에 시카고에서 시청률 1위를 기록하던 필 도나휴 쇼를 앞질러버렸다. 그녀 나이 서른이었다. 비행청소년에 못생긴 흑인처녀가 3000만달러의 연봉과 수백만의 열광적인 팬을 거느린 스타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1년 뒤 오프라에게 패배한 도나휴는 뉴욕으로 진출해버렸다. 이제 시카고는 오프라 손 안에 들어왔다. 1986년 윈프리 쇼는 전국적으로 송출되면서 이후 줄곧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그녀는 아예 자신의 쇼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회사(하포 프로덕션·Oprah를 뒤집은 말)를 설립해 쇼의 소유권까지 가져옴으로써 본격적인 사업가로 나선다.

‘오프라 쇼’의 무서운 질주에 대해 시사주간지 ‘타임’은 이렇게 분석한다.

나부터 고백하기

‘오프라 윈프리가 그렇게 단시간에 정상의 TV토크쇼 진행자가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인터뷰를 하는 실력으로 보자면 필 도나휴와 상대가 되지 않았다. … 하지만 윈프리는 자기에게 부족한 저널리즘적 요소를 솔직함과 건강한 유머,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입으로 상쇄해버렸다. 오프라는 슬픈 사연을 들려주러 나온 게스트를 보고 눈물을 흘리기 일쑤다. 그러면 게스트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을 것 같던 가슴속 이야기를 공중파 TV시청자 앞에서 술술 쏟아놓는다. 이 토크쇼는 집단 상담 테라피다.’

아무리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지는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또 아무리 작가가 써주는 시나리오가 있다 하더라도 드라마가 아닌 이상 방송 토크쇼는 게스트와 호스트 간의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장 큰 경쟁력이다. 누구라도 스튜디오에 나오면 긴장하게 마련이다. 이 긴장감을 풀어주어 마음을 열어 결국 입을 열게 만드는 것이 진행자의 능력이다.

그런 점에서 오프라는 타인의 입을 여는 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를 갖고 있었으니 다름 아닌 ‘나부터 먼저 고백하기’였다. 아홉 살 때부터 열두 살 때까지 아버지 친구를 비롯해 삼촌은 물론 학교 동급생들로부터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고 급기야 미성년이던 10대 초반에 아이까지 낳았다는, 삶에서 가장 숨기고 싶은 수치스러운 경험을 방송에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자신이 어떻게 이겨나갔는지 지속적으로 시청자에게 알렸다.

낮 시간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그녀의 모습은 신비로움으로 포장된 은막의 스타들과는 달리 친근함을 주었다. ‘아 저 사람도 나와 같은 고통을 겪었구나’하는 연민의 마음이 텔레비전 앞으로 시청자를 모이게 한 것이다.

오프라의 고백은 핵폭탄급 비밀 이야기부터 주말을 어디서 어떻게 보냈고 어떤 유명인사를 만나 가슴이 설레었으며 콘택트렌즈 대신 안경을 쓰고 하이힐 때문에 불편해 죽겠다는 식의 시시콜콜하면서도 사소한 이야기까지 다양했다.

1991년, 체중 101kg의 오프라 윈프리.

고백하며 배운 것

‘살과의 전쟁’을 생중계한 것도 유명하다. ‘먹는 대로 살이 찌는’ 체질로 비만 때문에 늘 고민했던 오프라는 시청자에게 수년 동안 자신이 체중과 벌인 싸움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1988년 11월 30kg에 달하는 쇠고기를 실은 작은 수레를 끌고 무대에 나타나기도 했는데 그동안 자기가 줄인 몸무게와 똑같은 무게의 고깃덩어리였다.

그녀가 체중과 벌인 사투는 단지 날씬한 몸을 보여주겠다는 과시가 아니라 의지, 인내, 순수한 야망, 희생, 극기, 고통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로 비쳤다. 성공이 아닌 실패에 대한 이야기, 성공의 순간이 아닌 성공에 이르는 힘겨운 과정을 생중계하면서 ‘대중과 하나 되기’가 그녀의 전략이라면 전략이었다. 삶 자체를 브랜드로 만들어버렸다고나 할까.

그녀는 자신이 운영하는 ‘오(O) 매거진’에 기고하는 정기칼럼 ‘내가 확실히 아는 것(What I Know for Sure)’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나름대로 영적 종교적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면 “맙소사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이렇게 자문합니다. “이 어려움은 내게 뭘 가르쳐주려고 내 앞에 온 걸까?”’

늘 사랑받지 못하는 계집아이라고 느끼며 10대 시절을 보낸 오프라는 언젠가는 꼭 성공한 사람이 되어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해냈다. 그 원동력은 바로 이처럼 ‘삶에서 만난 장애와 고통을 해석하는 능력’이었던 것이다.

이런 능력은 고백하며 얻었다.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건네는 오프라 윈프리.

‘내가 고백을 통해 배운 것은 두려워할 것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뭔가에 두려움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짓누른다. 그러나 두려움 그 자체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오직 진실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내가 지금껏 겪은 모든 고통의 조각들이 쓸데없는 근심에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쓸데없는 근심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절망에 빠질 때에도 그것을 시청자와 공유하려고 애썼다.

‘나는 과거에 학대로 깊은 상처를 입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치유되었다고 확신할 때에도 나는 완전히 치유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항상 수치심을 안고 살아갔고 나를 성폭행한 남자들의 행위를 핑계로 내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탓했다’.

멋진 몸을 선보이고도 몇 달 몇 년이 지난 후 다시 살이 찌기 시작하자 절망감에 빠져들어 ‘나는 다시 결단력을 잃고 말았다’는 것을 그대로 알리기도 했다.

미디어 전문가들은 오프라의 고백을 통한 ‘테라피’(Theraphy·치료) 문화코드가 힘을 갖게 된 데는 미국사회 특유의 독특한 문화적 배경이 있다고 말한다.

좋은 정신과 의사

‘정신과를 찾는 미국인은 1960년대 14%였지만 1990년대에는 30%대에 달했다. 1988년 갤럽조사 결과 성인 3명 중 1명이 자기계발 관련 책자를 사보았고 1990년에는 1500만명의 미국인이 50만개 ‘치료’모임에 참여했고 300여 개의 테라피 서점이 운영 중이다. 특히 남성보다는 여성이 신경증 노이로제 조울증에 더 취약하고 정신질환 약물도 더 많이 복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80년대 정신질환 약물을 처방받은 환자의 3분의 2가 여성이었다. 자기계발 관련 책자, 특히 가족 대인관계 스트레스 걱정에 관한 책을 사 보는 사람도 70~80%가 여자였다.’ (‘오프라 윈프리의 시대’ 중에서)

오프라 쇼가 주제로 삼은 것은 정치적 이슈와는 거리가 있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이다. 1986년부터 1992년 사이 쇼의 주제 목록을 보면 1000여 차례 방송분 중에서 사회 정치적 주제를 다룬 경우는 12차례에 불과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당신은 자식을 어느 정도나 보호하고 있는가’‘전통적인 결혼생활, 과연 좋은가’‘여자들이 (남자들로부터) 버림받는 이유는?’‘남편들을 위한 학교’‘여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열 가지 어리석은 짓’‘꼭 부끄러워해야 하는가’‘옛 배우자를 극복할 수 없다’‘우정을 심판해보자’ 등등이다. 감정의 폭발, 섬뜩한 이야기, 섹슈얼리티, 핵가족의 파괴, 억제된 욕망의 분출 등이 그녀 쇼의 단골메뉴다.

에바 일루즈 분석에 따르면 그녀의 쇼가 일관되게 다루는 주제는 크게 ⓛ재미없고 사소한 주제(예: 화장은 꼭 해야 하는가? 왜 좋은 찻잔을 써야 하는가) ②일반적인 가족의 구조에서 일탈된 주제(예: 딸을 강간한 아버지)다. 자연재해나 사회적 부패를 고발하는 데는 무관심한 대신 인간관계에서 자아가 어떻게 상처를 받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가족이나 연인관계에서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주로 등장시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성매매를 하는 어머니, 박사학위까지 받았다가 노숙자로 전락한 가장(家長)을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중산층의 체면을 무너뜨리고 가정을 낯선 공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런 것들을 통해 그녀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에바 일루즈는 ‘비틀기’를 통한 진실 보여주기라고 말한다. 현실에 있지만 있을 수 없는 상황을 그려내어 현실 다르게 보기를 시도하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초현실주의 기법’이라는 것이다. 일상에서 사소한 면을 과장하고 낯설게 변모시킴으로써 삶의 이면이라는 변덕스러운 면을 보여주어 오히려 일상의 평범함에 안도하는 효과를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일곱 살 딸을 성폭행해온 의붓아버지와 딸을 함께 출연시킨 프로에서는 아내와의 소통 부재로 마음고생을 하던 남자가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딸과의 스킨십을 경험하면서 그런 방식(근친상간)을 통해서 커뮤니케이션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털어놓으면 시청자는 순간 혼란스러움에 빠진다.

이런 오프라 쇼에 대한 평가는 때로 가혹할 정도로 혹독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정심과 연민을 극대화시키는 싸구려 쇼’라는 비판의 한켠에서 어떻든 그녀의 쇼가 굳건했던 것은 그녀가 일관되게 가정생활과 가족 노동 중시, 행동과 성공을 지향하면서 능력과 실력을 중시하는 중산층의 가치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점점 도덕적인 행위자

오프라 쇼는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미디어나 문화비평가들로부터는 ‘헛소리, 잡담만이 가득한 백해무익한 쇼’라는 욕을 먹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대우는 달라졌다. ‘타임’은 윈프리를 21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고 ‘뉴스위크’는 21세기를 ‘오프라의 시대’로 명명했다. ‘LA 타임스’는 이렇게 말할 정도다.

‘그녀는 이 지구상에 말씀을 전하기 위해 보내진 스승이기도 하다. 21세기의 현자는 여성이다. 석가모니도 당시에 텔레비전이 있었다면 방송에 출연했을 것이다. 심오한 도덕적 혜안을 갖추고 자신의 지지자들과 특별한 교감을 나누는 오프라 윈프리는 방송계의 거물에서 비범하고 영적인 존재로 변화했다.’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그녀가 발빠르게 내세운 ‘착한 방송’ 콘셉트였다.

오프라는 마흔 살 생일을 몇 주 앞둔 1994년 1월 토크쇼 오프닝에서 “세상만사가 얼마나 형편없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 세상을 좀 더 평화롭게 만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세상에 가치 있는 것’이 많으니 개개인의 문제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우선 관심을 둔 게 어린이 문제였다. 쇼의 단골소재인 문제가정의 부산물이자 가장 큰 피해자라고도 할 수 있는 아동에 집중함으로써 미래지향적인 문제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그녀는 1990년을 ‘아동의 해’로 정하고 한 달에 한 편씩을 아동문제에 할애했다. 이듬해에는 아동 성폭행범이 자신을 고발한 여아(4세)를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시민단체가 오프라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오프라는 유죄가 입증된 아동학대자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자는 법률안 운동을 벌인다. 법 제정을 위해 1991년 11월 상원사법위원회에서 증언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TV에 알렸다. 결국 이 법은 클린턴 정부시절 통과된다.

윈프리는 또 ‘영성 강화운동’을 프로그램에 도입했다. 철학자나 뉴 에이지 운동가, 긍정의 힘을 설파하는 사상가들을 초대해 ‘마음의 병’을 고치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에서 주는 일관된 메시지는 ‘내 인생에 벌어지는 것의 모든 원인은 내 안에 있다’ ‘나를 규정짓는 건 영혼이다. 그리고 이 영혼은 더 위대한 영혼에서 온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을 닮아간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 프로그램 제목들은 ‘우연히 베푼 친절’ ‘부모님에게 사랑한다는 편지를’ ‘주위에 천사가 살고 있어요’ ‘꿈을 이루는 법’ 등이었다.

책을 선정해 소개한 북 클럽의 성공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북 클럽은 미국의 독서율을 높이는 데 엄청난 기여를 했다. 오프라 북 클럽에 소개된 추천도서마다 모조리 베스트셀러가 된 덕분에 미국 출판 산업이 소생했고 문학계 지형이 바뀌고 활자매체가 구원을 얻었다는 평가도 있다.

오프라 윈프리가 ‘시시껄렁한 잡담의 여왕’에서 ‘영적 존재’로 대변신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성공의 길’을 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개인적 고통을 대중 앞에 단지 공개하는 것에서 벗어나 시청자를 교화하고 역량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끌어올리려 한 것이다.

자신의 역할도 단지 고백하고 폭로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응급처치를 소개하는 치유자로 바꿔나갔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품위’와 ‘배려’였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이미지도 점점 도덕적인 행위자, 심리치유사로 바뀌었다.

어느 날, 독일 강제포로수용소에서 잔혹행위를 겪은 경험이 있는 여성이 게스트로 초대됐다. 이날은 그녀가 지금은 남편이 된 당시 변호사에게 40년 전에 보낸 편지를 낭독하는 모습이 소개되었는데 단지 과거의 고통을 소개하는 차원이 아니라 지금 그녀가 상처를 딛고 남편과 함께 얼마나 따뜻하고 건강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지에도 똑같이 초점이 맞춰졌다.

연인 사이의 사적인 편지 글을 통해 전쟁 이야기를 가족 이야기로, 홀로코스트라는 집단의 비극을 개인의 비극으로 바꿔놓으면서 내용이 무엇이든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나락에 빠진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재민의 얘기를 듣고있는 오프라 윈프리.

에이즈에 감염된 환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도 단지 죽음과 결부된 고통, 두려움, 불안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자기극복의 이야기를 끌어내 시청자에게 힘을 주었다. 폭력적인 남편에게 시달림을 받는 게스트가 출연했을 때에는 ‘폭력적인 남편은 버려도 괜찮다’면서 피해자를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그런 남편을 버리는 방법까지 알려주었다.

오프라 윈프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긴 했지만 오히려 그는 특정 종파를 걷어냄으로써 인종 연령 성별 계급을 초월해 모든 시청자를 포용하는 ‘자아의 종교’ 이미지를 구축했다.

‘그녀의 성공비결은 그녀가 현대의 문화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혼돈에 빠진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제시하고 처리하는 문화적 형태를 보여주는 데 있다. 자아를 합리적으로 돌아보게 함으로써 혼돈을 이겨내고 자아를 잘 관리해 변화시키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심리적 고통이 국민 대다수를 짓누르는 일종의 질환이 되고 행복은 성공적인 자기관리에 있다는 문화가 팽배한 시점에서 그녀의 쇼는 고통을 이해하는 대중문화의 새로운 모습이다.’(에바 일루즈)

노력하라, 다시 노력하라

오프라 삶에서 특기할 점은 그녀가 정치나 이념과는 철저히 거리를 뒀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흑인이고 게다가 여성이기 때문에 아웃사이더(소수자) 의식에 머물 수도 있었고 차별을 없애기 위해 정치적 힘을 키워보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문화와 윤리에만 집중했다. 그것이 시공을 뛰어넘어 세계인의 마음에 닿는 보편적 호소력을 갖게 된 비결이기도 했다.

그녀가 유명해지자 사방에서 흑인을 대변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인권운동에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변인이 되어 흑인을 대표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검은 피부를 가졌다. 하지만 나는 여성이기도 하다. 내게는 이 모든 것이 똑같은 가치를 갖는다.”

제니스 펙은 윈프리의 성공비결을 ‘흑인들과의 거리두기’라고 단적으로 표현한다. 실제로 윈프리는 “어릴 때부터 ‘험악하고 증오가 가득 찬 흑인들’과는 관계를 맺지 않았다”고 말한다. 1987년 ‘피플 위클리(people weeklty)’와의 인터뷰에서 “흑인 학생들만 다닌 테네시 주립대학교에서의 시간이 끔찍했다”고 말했다. 흑인 친구들의 폭력적이고 호전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다 보니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한 것이었다. 흑인 사투리도 쓰지 않는 그녀를 친구들은 노골적으로 미워했다. 흑인 학생 대부분이 ‘흑인의 힘과 흑인의 아픔’에 관심을 가지는 사이 그녀는 ‘인격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것이 그녀와 다른 흑인들과의 차이점이었다. 그녀의 고백이다.

“10대와 대학 시절을 보내는 동안 인종에 대한 대화가 오갈 때마다 나는 다른 쪽에 있었다. 이것은 인위적이라기보다 내가 보통 흑인들이 느끼는 억압된 감정을 느낀 적이 없기 때문이다. … 인종은 적어도 나한테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흑인이거나 여자라는 이유로 하고 싶은 일을 못한 경험이 없다.”

흑인보다 백인을 더 좋아한다는 비난에 윈프리는 흑인이 성공하는 것이야말로 고초를 겪은 조상들에게 은혜를 갚는 일이라고 했다. 흑인의 삶을 한탄하며 서로를 헐뜯기나 하고 있으면 조상들 보기가 부끄럽지 않겠느냐면서 ‘내 마음속에 그린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노예근성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윈프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미국에 사는 흑인의 상당수가 자긍심이 없어 상처를 받고 자신이 스스로 구제할 수 없는 희생양이라고 여긴다”고 말했다.

“나는 숫자도 얼마 되지 않으면서 말만 많은 흑인 집단이 두렵다. 노예제도는 우리에게 서로 증오하라고 가르쳤다. 흑인은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반문해봐야 한다. 오프라가 해냈다는 건 나에게 어떤 점을 시사하는 걸까?”

“흑인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차별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오프라는 “인종은 정신상태에 불과하다. 자신의 피부색에 집착하는 사람은 실패를 극복할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오프라가 삶의 나침반처럼 삼았다는 흑인전설을 번안한 19세기 시에는 피부색도 성별도 뛰어넘을 수 있게 한 강한 정신력의 비결이 담겨 있다.

‘한번, 두번 실패하더라도/ 노력하라, 다시 노력하라/마침내 승리를 거두더라도/노력하라, 또 노력하라/모두가 할 수 있을/끈기만 있다면 너라고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이 법칙을 잊지 마라/노력하라, 또 노력하라.’

결국 이 시대 시청자가 오프라에게 반한 것은 그녀의 말재주나 방송진행테크닉이 아니라 ‘스토리’와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