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왕 선덕여왕 남자 후보 제치고 일찌감치 낙점, 여성의 당당한 승리! |
허문명│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
드라마 인기에 힘입어 ‘선덕여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며 동양사적으로도 의미가 큰 선덕여왕이 새삼 관심을 끄는 것은 오늘날 여성의 높아진 위상과도 관련이 있다. 수세기 전, 남성 중심의 신분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최초의 여왕이 탄생한 배경과 그녀에 대한 평가를 되짚어봤다. |
드라마 ‘선덕여왕’이 인기다. 드라마에는 선덕이 언니 천명공주와 쌍둥이였고 태어나자마자 궁녀가 데리고 도망쳐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나오는데, 이는 기록에 없는 허구라고 한다. 드라마의 허구와 사실은 늘 논란거리다. 극적인 구성을 위한 궁여지책일 수 있지만 역사를 잘 모르는 일반 시청자는 드라마를 사실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고대사는 문헌도 별로 남아 있지 않아 더 그렇다. 선덕여왕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신라 연구자들이 펴낸 책들을 중심으로 선덕여왕의 실체를 재구성해보았다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년)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다.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인 측천무후도 선덕여왕보다 반세기 후에야 비로소 등장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선덕여왕 즉위는 동양사적으로도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신라는 지금보다 남녀평등이 더 잘 이뤄진 사회였을까? 이에 대해 한국 고문학계 원로이며 평생 신라사를 연구해온 이종욱 교수(서강대 총장)는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 탄생하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시스템적 이유’가 있었다고 말한다. 바로 신라만이 갖고 있던 성골· 진골이라는 독특한 신분제도다. 현대사회인 지금도 흔히 조직 내 ‘주류’를 일컬을 때 곧잘 비유적으로 쓰이는 ‘성골’이란 말은 신라만이 가졌던 일종의 계급이다. 520년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하면서 성골을 만들었다. 이전부터 존재했던 귀족계급 진골보다 상위 신분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성골은 왕과 그의 형제, 그들의 자녀로 이뤄진 혈족집단’을 가리킨다. 인류학에서 흔히 말하는 종족집단이며 핵가족보다 한 단계 확대된 집단이라고 보면 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왕의 혈육이라고 해서 무조건 성골이 되는 것은 아니다. 후궁이 아닌 왕비(황후, 왕후 등으로 불렸다)가 낳은 자식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새 왕이 즉위하면 새로운 성골 집단이 만들어지는데 이 경우 이전 왕의 형제와 자녀들은 진골로 신분이 떨어졌다(족강·族降)고 한다. 새롭게 편입된 성골 중에서 재위 중인 왕의 다음 대(代), 곧 그의 아들이나 형제의 아들은 모두 왕위 계승자로 선택될 수 있었다. 법흥왕에 이어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이 재위했을 때도 각각의 왕을 중심으로 한 성골 집단이 있었다. 진흥왕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장남 동륜태자가 개에 물려 죽는 바람에 차남이 왕위에 오르니 바로 진지왕이다. 진지왕 다음 대는 다시 장남 직계로 동륜태자의 장남이 왕위에 오른다.
성골 남자가 없다 문제는 진평왕 대에 이르러 발생했다.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물론 선덕여왕의 작은아버지인 진지왕에게 아들(김춘추 29대 태종무열왕의 아버지 용수)이 있었지만, 그보다 형인 진평왕이 즉위하면서 진평왕의 직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성골 집단이 만들어졌고, 따라서 진지왕 직계들은 진골로 신분이 강등됐다(조범환 ‘우리 역사의 여왕들’). 왕족이지만 아예 왕궁을 떠나 성골 거주 구역이 아닌 곳에 살아 공간적으로도 왕실과 멀어졌다. 더구나 진지왕은 즉위 4년도 안 돼 폐위되고 만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진지왕은 색을 밝혀 방탕했다. 폐위된 왕이 왕궁에서 살 수 없었으니 아들 용수도 자연히 왕궁과 멀어진 것이다. 급기야 진지왕은 폐위 3년 뒤 죽음에 이른다. 진평왕에게 직계 아들이 없었지만, 선덕여왕에겐 남편(음갈문왕)이 있었다. 실제로 선덕여왕 전후에 사위가 왕위를 잇는 경우가 있었다. 4대왕 석탈해는 처남 유리왕의 유언에 따라 즉위했고, 13대 미추왕은 11대 조분왕의 사위로 처삼촌인 12대 점해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선덕여왕 이후 한참 뒤인 48대 경문왕은 47대 헌안왕 사위였고, 53대 신덕왕은 49대 헌강왕 사위였다고도 한다. 조범환 박사는 선덕여왕이 왕위에 올랐을 즈음이면 남편 음갈문왕이 이미 죽어버린 뒤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여왕의 경우 생몰연대가 없지만 생몰연대가 밝혀진 조카 김춘추를 중심으로 나이를 역산해보건대, 선덕여왕은 50세가 넘은 나이에 즉위했고 이 나이라면 남편이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김춘추가 59세로 사망했다는 점을 들면 당시 남성의 평균 연령이 대략 추정된다). 따라서 진평왕이 사망했을 당시 성골 남자가 없었던 게 분명하다는 것이 학자들의 중론이다. 남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도 남자가 없었던 탓에 선덕여왕이 성골 신분으로 남녀불문 왕위를 잇게 된 것이다. 선덕여왕이 왕위를 이어받은 데는 신라 특유의 여성 배려(?) 제도 덕분도 있다. 다름 아닌 여자도 한 대에 한해서이긴 하나 가계 혈통을 이을 수 있는 ‘부계성원권’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선덕은 여자였지만 부계성원권에 의해 성골 신분이었던 것이다. 한편 진평왕에게는 선덕뿐만 아니라 천명이라는 딸도 있었다. 이종욱 교수는 ‘‘삼국사기’선덕여왕 즉위 조에는 선덕이 진평왕의 장녀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천명을 먼저 결혼시킨 것으로 보아 천명이 장녀였음을 알 수 있다’(‘춘추’)고 전한다. 진평왕은 당초 맏딸 천명의 남편인 용수를 왕위 계승자로 점찍었으나 선덕의 자질이 점차 빛을 발하자 그런 생각을 버리고 천명공주와 더불어 출궁토록 했다고 한다. 천명은 출궁 즉시 성골에서 진골로 족강되어 왕위 계승 자격을 잃었다. 하지만 훗날 그의 아들 춘추가 왕이 되니 억울해 할 일은 아니라고 보아야 하나. 이종욱 교수는 “이처럼 선덕여왕의 즉위는 계급제도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어서 따로 신비화할 필요는 없다”며 “선덕이 여자라는 것을 강조하기보다 그가 왕위에 올랐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 교수의 얘기는 당시 고구려 백제는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여자 왕이 배출된 일이 없기에 선덕여왕 즉위는 ‘비정상적’이었던 게 사실이지만, 당시 제도에 의한 산물이었기에 선덕을 ‘여자 왕’으로 보지 말고 ‘왕으로 보아야 한다’는 강조다. 한편 조범환 박사는 선덕여왕 즉위 당시의 국제 정세도 최초의 여왕을 배출하는 데 한몫했다고 분석한다. 바로 일본의 정치상황이다.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기 39년 전인 593년에 이미 일본에서는 최초의 여성 천황인 스이코(推古) 천황이 등극했다. 당시 신라는 진평왕 15년이었으며 일본과 교류가 활발했다. 진평왕은 사신들에 의해 일본에 여자 천황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이런 배경이 유례없는 여성의 왕위계승을 염두에 두도록 했을 거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김유신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진으로 돌진하고, 한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돌아와서는 집에도 들르지 않고 곧바로 다른 전쟁터로 달려가는 등 충성심과 용맹심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그는 선덕여왕을 철저하게 지지하고 보호하려 애썼다. 비담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며 한 말에는 그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자연의 이치에서는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러우며 사람의 도리에서는 임금이 높고 신하가 낮습니다. 만약 혹시 그 질서가 바뀌면 곧 혼란이 옵니다. 지금 비담 등이 신하로서 군주를 해치려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침범하니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로서 사람과 신이 함께 미워하고 천지가 용납할 수 없는 바입니다. …생각건대 하늘의 위엄은 사람의 하고자 함에 따라 착한 이를 착하게 여기고 악한 이를 미워하시어 신령으로서 부끄러움을 짓지 말도록 하십시오.’(‘우리 역사의 여왕들’에서 재인용) 김유신은 여왕이 통치를 잘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킨 비담에 대해 군신관계를 중요시하는 유교의 명분을 들었다. 일부 귀족들이 여자를 비하하는 것에 대한 반대명분을 내세운 것이다. 여성의 승리 역사상 첫 여왕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시대상황마다, 왕마다 서로 달랐다. 당과 연합해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한 후 다시 당의 공격을 받은 문무왕 때는 당에 대해 당당했던 여왕을 향한 추모 분위기가 일었다. 당시 문무왕은 선덕여왕이 세운 영묘사를 성전사원으로 관리하고 자신도 이 영묘사 앞에서 열병행사를 할 정도였다. 선덕여왕이 세운 황룡사 구층탑을 중수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에서도 여왕이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 속에서 국가를 수호하는 위업을 닦았다고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신라 하대에 이르러 헌안왕은 선덕과 진덕 두 여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과인은 불행히도 아들이 없고 딸만 있다. 우리나라의 옛 일에 비록 선덕과 진덕 두 여자 임금이 있었으나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비슷하므로 본받을 일이 못 된다. 사위(경문왕)는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노련하고 성숙한 덕을 가지고 있다. 경들은 그를 왕으로 세워 섬기면 반드시 선조로부터 이어온 훌륭한 왕업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다.’(‘삼국사기’ 권11 헌안왕 5년 봄 정월) 그가 이 말을 한 30년 뒤에 경문왕의 딸인 신라 세 번째 여왕, 진성여왕이 즉위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선덕여왕은 재위 5년째인 636년부터 병이 나 몸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종욱 교수는 여왕의 말년을 이렇게 기술했다. ‘선덕여왕은 636년 3월 병이 들었는데 의술과 기도로는 고칠 수 없어 황룡사에서 백고좌회를 열기도 했다. 어떤 병이 걸렸는지는 알 수 없으니 그 후 10년간 병에 시달린 것으로 볼 수도 있다. …647년 1월8일 선덕여왕은 세상을 떠났다. 그 열흘 후 비담의 난이 진압되고 그(비담)의 목이 떨어졌다.’(‘춘추’) 이 교수는 ‘신라의 역사’라는 책에서 신라시대 여성의 지위가 딱히 높지는 않았다고 밝힌다. 부계제 사회였기 때문에 혼인을 하면 여자는 남자 집으로 거처를 옮기는 게 원칙이었다. 다만 여자 집안의 신분이 높으면 남자가 여자 거처로 옮겨 여러 사회적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신라는 신분의 지배가 ‘부계’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왕이 나왔다고는 해도 다른 관직에 여성이 임명된 예는 찾기 어렵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여자들도 권력게임에 합류했다. 7세에 왕이 된 진흥왕의 뒤에서 섭정한 지소태후나 진평왕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사도왕후와 미실 등이 진지왕을 즉위시킨 과정에서 왕실 여성들의 역할이 막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독특하게 여성들 중 왕비를 공급하는 가계(인통)가 있었다고 한다. 지배세력의 부인들을 배출하며 세력을 유지하는 독특한 가계(진골정통 대원신통)였는데 ‘이는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신라의 독특한 제도’(이종욱 ‘춘추’)라고 한다. 이처럼 신라를 움직이는 사회 시스템은 현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철저한 신분제(골품·骨品)였다. 그런데도 오늘날 다시 선덕여왕이 소설 드라마 같은 문화 아이콘으로 등장한 이유로는 뭐니뭐니해도 여성의 지위 향상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달라졌음을 꼽을 수 있다. ‘그들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남성들보다 뛰어난 힘을 가졌다거나 정치적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도리어 남성들과 비교해볼 때 여러 측면에서 열악한 상황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왕의 등극이 이뤄진 것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승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조범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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