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대통령 10명 취재한 백악관 출입기자 헬렌토머스 “기자라면 도전적인 질문으로 대통령을 작게 만들어야” |
허문명│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
90세의 현역 기자. 백악관 출입 50년. 이쯤 되면 백악관 사정을 훤히 꿰뚫어보며 대통령의 시행착오에도 별로 흥분할 것 같지 않은데, 어림없다. 헬렌 토머스는 오늘도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재판정에서 피고인을 심문하듯 대통령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퍼붓는다. “사랑받고 싶거든 기자가 되지 말라”고 말하는 그녀지만,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근성으로 진정 사랑받는 기자가 되었다. |
지난해 8월4일 국내 신문들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생일에 직접 케이크를 들고 백악관 기자실에 들른 모습을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그날 기자실을 찾은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다름 아닌 자신과 생일이 같은 할머니 기자(?) 헬렌 토머스를 축하하기 위해서다. 헬렌 토머스 기자의 나이는 올해 90세. 1943년 UPI 통신사에 입사해 언론계에 첫발을 디딘 후 1960년 대통령에 당선된 존 F 케네디를 시작으로 린든 존슨,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부시(아버지 부시), 빌 클린턴, 조시 W 부시, 오바마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무려 10명의 미국 대통령을 취재해 왔으며 현재도 취재 중이다. 2000년까지 UPI 통신의 백악관 출입기자로 일하다 히스토리 채널과 휴스턴크로니클 등을 소유하고 있는 허스트 언론그룹 소속 칼럼니스트로 변신했다. 2008년 5월 위장질환으로 잠시 휴식을 가졌을 때만 해도 다들 ‘이제 헬렌 토머스도 은퇴할 때가 되었나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과 6개월 뒤인 그해 11월 백악관 기자회견 때 브리핑 룸 맨 앞줄 한가운데 있는 자신의 ‘지정석’에 나타나 날카로운 질문으로 건재를 보여줬다. 당시 백악관 대변인이 “복귀를 기쁘게 생각한다”고 하자 “오바마 대통령과의 허니문은 하루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이 언론의 속성 아니겠느냐”고 진담 반 농담 반 받아치기도 했다. 2000년 백악관 출입기자직을 사임할 때 클린턴 대통령은 “많은 대통령이 백악관에 왔다 갔지만 헬렌 토머스 기자는 40여 년 동안 밤낮으로 높고 막강한 권력자들을 쩔쩔매게 하는 질문을 퍼부으며 백악관에 있어왔다”고 치하하기도 했다. 2008년 8월 미국 영화전문 채널인 ‘HBO’는 그녀의 일대기를 다큐멘터리로 방영하기도 했다. ‘생큐 프레지던트: 백악관의 헬렌 토머스’라는 제목의 38분짜리 다큐멘터리에서 그녀는 “역사를 기록하는 기자의 진정한 목표는 도전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대통령들을 작아지게 하는 것”이라면서 “그러한 일이 불경스럽게 비칠 수도 있지만 대통령은 당연히 질문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며 기자정신을 피력하기도 했다. ‘직업이, 아니 인생이 백악관 출입기자’로 ‘미국 대통령직의 중요한 한 부분을 맡고 있다’는 평가까지 듣는 ‘저널리스트의 살아있는 전설’ 헬렌 토머스의 삶으로 들어가보자.
문맹 이민자의 딸 그녀는 10대 초반부터 기자가 될 결심을 했다니 삶의 목표가 어릴 적에 이미 결정된 운이 좋은 사람이다. 무엇보다 호기심이 많았다. 사람들이 어린 헬렌에게 “너는 너무 호기심이 많다”고 걱정하면 “호기심이 많다는 게 도대체 뭐냐?”고 되물었던 못 말리는 소녀였다. 헬렌은 자서전 격인 ‘백악관의 맨 앞줄에서’란 책에서 기자직을 선택하려는 사람들의 공통된 캐릭터에 대해 언급했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날 때 ‘그 자리에 있고 싶어하는’ 못 말리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 욕망이란 인생과 사람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그것을 밝혀내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어려서부터 글재주도 있었던지 디트로이트 이스턴 고등학교 2학년 때 영어선생님이 헬렌의 글을 높이 평가하고 학교 신문에 실어줄 정도였다. 헬렌은 그때 “마치 잉크가 내 정맥 속으로 흐르는 것 같은 희열을 느꼈고 나는 글 쓰는 일에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학교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한다. 어찌나 열심이었던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선생님들로부터 ‘오랫동안 신문사 기자로 헌신한 것에 감사하며, 1938년 1월26일’이라는 서명이 담긴 시집을 선물 받기도 했다. 대학 때도 학보사 기자가 본업이고 공부는 뒷전이었다. 헬렌은 중동 이민자 집안의 딸이다. 1920년 8월4일 아홉 형제 중 일곱째로 태어난다. 아버지 조지 토머스는 후에 레바논의 영토가 된 시리아 트리폴리에서 태어나 1892년 미국으로 건너왔다. 당시 그의 나이 17세였고 무일푼이어서 친척이 있는 켄터키 주 윈체스터에서 과일, 야채, 목화, 사탕, 담배를 마차에 싣고 팔러 다니는 행상을 했다. 타고난 성실함 덕분에 미국 정착 32년 만인 1924년 7월 디트로이트의 침실 다섯칸짜리 집에 정착한다.
그의 삶의 목표는 기회의 땅 미국에서 돈을 벌어 재산을 불리고 자식들에게 대학 교육을 시키는 것이었다. 비록 자신은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문맹(文盲)이었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과 교육의 중요성을 자식들에게 강조했다. 헬렌은, 글을 못 읽는 아버지를 위해 아들딸들이 성적표 점수를 읽어주면 언제나 상기된 표정으로 경청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헬렌의 아버지는 백내장 수술이 잘못되는 바람에 한쪽 눈을 실명해 고생하다 65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숨진다. 어머니는 신앙심이 매우 깊은 사람이었다. 아이들이 빵이라도 한 조각 떨어뜨리면 주워서 입맞춤해 다시 먹으라고 가르쳤다. 남편이 대공황 동안에도 내내 가게를 지키며 팔다 남은 물건을 집에 가져오면 이웃들에게 나눠주었다. 헬렌의 부모는 자식들에게 “해야 한다” 혹은 “하지 말라”는 말 대신 홀로 서기를 강조했는데, 이것이야말로 헬렌이 훗날 살아가는 데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고 한다. 낯선 이국땅에서 건너온 헬렌 가족에게 인종차별은 일상다반사였다. 한때 그의 아버지는 켄터키 주 윈체스터 언덕 꼭대기에 있는 아름다운 집을 사고 싶어했는데 단지 ‘시리아인’이란 이유로 거절당한 적도 있다. 어딜 가도 헬렌 가족은 멸시와 모욕의 대상이었지만 가족의 화합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한다. 독일이 군비를 강화하면서 유럽에 전운(戰雲)이 짙게 드리워진 1938년 헬렌은 웨인 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한다. 저널리즘학과가 따로 없어서 일단 교양과목으로 수강할 수밖에 없었다. 헬렌은 자신이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제멋대로인 인습 타파주의자에, 규율 없이 행동하는 자유주의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 수업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좋아했는데 나중에 기자 일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전쟁이 가져다준 기회 그녀는 대학 때부터 막연하게 백악관 출입기자를 동경했다. 여기엔 전시(戰時)라는 상황이 크게 작용했다. 그녀는 미국이 적극적으로 유럽전선과 태평양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보며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있는 백악관이야말로 매력적인 출입처라고 생각했다. 1942년 여름, 대학을 졸업하자 신문사에 들어가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좀 ‘큰물’을 만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사촌이 시청 사회복지부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워싱턴으로 가기로 한다. 헬렌은 일거리를 찾아 여러 회사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생활비가 다 떨어져갔지만 돈을 보내달라고 집에 전화를 걸거나 편지를 쓰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택한 첫 직업은 해산물 레스토랑 종업원이었다. 주인은 헬렌이 웃지 않는다고 시도 때도 없이 스트레스를 주었다. 가시방석 같았던 웨이트리스 일을 이제나 저제나 그만둘까 생각하던 차에 오매불망 기다리던 신문사 취직 기회가 왔다. 워싱턴에 있는 ‘데일리 뉴스’라는 곳에서 주급 17.5달러를 받는 편집장 비서이자 사환자리였다. 편집장을 위해 커피를 타는 일도 포함됐다. 그녀의 나이 스물두 살 때였다. 당시 헬렌은 신문사에서 일할 수만 있다면 바닥 청소라도 했을 것이라고 한다. 헬렌은 속보를 알리는 벨소리가 편집국에 울리면 텔레타이프에서 기사를 잘라내 즉시 편집장에게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 태평양전쟁과 북아프리카에서 날아오는 연합군 전투 소식들로 편집국 벨은 시도 때도 없이 울렸다. 그러던 그녀에게 행운의 여신이 찾아온다. 남자들이 계속 전쟁에 징병되는 바람에 여기자들이 사회부 같은 험한 일에 배치되고, 그녀도 마침내 견습기자로 발탁돼 지역 뉴스를 취재하게 된 것이다. 새내기 기자 헬렌에게는 모든 일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평소 존경해마지 않던 남녀 선배 기자들이 마감시간에 쫓겨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도 부러웠고 인쇄기가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도 흥미로웠다. 헤드라인을 작성하는 기자들이 적당한 단어를 고르기 위해 벌이는 논쟁을 주워듣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가장 하기 싫었던 일 가운데 하나는 전쟁 희생자 명단을 적는 일이었다. 데일리 뉴스 기자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파업이 일어나는 바람에 조합원인 헬렌도 해고를 당한 것이다. 다행히 전쟁 통에 기자가 모자라던 시절이라 이내 자리가 났다. 공교롭게도 이전 직장인 ‘데일리 뉴스’와 같은 계열사인 UP에 채용됐다. 라디오 새벽 뉴스 기사를 쓰는 일이었다. 그녀의 하루는 매일 새벽 5시 반에 시작되었고 덕분에 봉급은 주당 24달러로 늘었다.
케네디와의 인연 1945년 5월8일, 유럽에서 총성이 멎었다. 헬렌은 당시 뉴스 편집실에 있었는데 수천 명의 틈에 끼어 거리에서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그리고 석 달 뒤인 8월15일에 일본이 전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 전쟁 기간 징집됐던 남자들이 돌아오면서 많은 여기자가 해고통보를 받았다. 헬렌은 맡은 일이 워낙 고생스러운데다 남이 별로 주목하지 않는 일이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방송매체가 부상하면서 헬렌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온다. 신문과 방송의 융합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헬렌이 속한 라디오방송국 UP가 1958년 5월에 신문그룹 INS와 정식으로 합병한다. 헬렌이 일하던 UP가 UPI 통신사로 바뀌었다. 헬렌은 이곳에서 정식 기자로 일한다. 법무부, 우정국, 연방 통신위원회, 통상위원회, 보건교육 후생부를 출입하며 매일 각 부처나 관청에서 발표하는 자료를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리고 2년 뒤 케네디 대통령이 당선되자 케네디 전담 기자로서 백악관과 연을 맺는다. 당시 헬렌은 이미 누구나 인정하는 유능한 기자였지만, 나이 마흔에 시작한 일이 무려 50여 년이나 이어져 대통령을 취재하는 전문기자가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헬렌에게 맡겨진 첫 번째 일은 조지타운 N가에 살고 있는 대통령 당선자 가족을 취재하는 것이었다. 헬렌은 11월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케네디와 가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취재했다. 남자 전용 골프장에 잠입해 마치 파파라치처럼 수풀 뒤에 숨어 케네디의 모습을 취재한 뒤 ‘나는 여자 골프 스파이였다’는 제목으로 타전한 UPI 기사는 특종으로 성가를 높였다. 헬렌과 케네디의 인연은 댈러스에 간 케네디를 취재하기 위해 헬렌이 비행장으로 가던 중 차 안에서 케네디가 암살됐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끝이 났다. 헬렌이 10명의 대통령을 거치며 터득한 것은 국민에게 ‘신뢰감’을 얻지 못하면 그 어떤 대통령도 통치를 할 수 없다는 점이다. 헬렌은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잃어 낙마한 두 대통령으로 존슨 대통령과 닉슨 대통령을 꼽는다.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문제로 재선을 포기했고,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下野)했다. 매우 변덕스럽고 복잡한 성격의 존슨 대통령은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정보접근을 금지시키는 고약함을 보였다고 한다. 케네디가(家) 취재를 숨바꼭질에 비유한다면 존슨과의 관계는 누가 더 고집이 센지 겨루는 의지력 경쟁이었다는 것. 백악관 출입기자들에게 기자실을 그럴듯하게 마련해준 닉슨 대통령이 언론의 폭로에 의해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건 아이러니다. 포드 대통령은 아침식사를 손수 준비하는 등 소탈했으며, 대통령이 되길 결코 갈망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은 사람처럼 욕심이 없었다고 한다. 레이건 대통령은 ‘위대한 커뮤니케이터’라고 부를 만큼 언변이 좋고 우호적이었다. 영화와 TV에서 오랜 경력을 쌓아서인지 세인의 관심을 어떻게 다룰지 아는, 본능적인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핵심을 찌르는가 하면 날카로운 질문에는 대충 윤곽만 이야기하거나 특유의 함박웃음을 짓고 손을 흔들며 그 장소를 떠나는 등 언론에 관한 한 달인의 경지를 보였다고 한다. 반면 클린턴 대통령은 열정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냉담하게 언론을 대했다.
최초이길 원했던 대통령 헬렌은 백악관 출입기자를 하면 할수록 대통령에 대한 미국인의 경외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 경외심은 대통령 개인이 아닌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향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대통령과 언론은 멀어져서는 안 되는 사이다. 야합하라는 뜻이 아니라 정보를 서로 교환해야 한다는 의미다. 미국의 대통령이 잠들어 있을 때 세계의 절반은 분쟁을 조성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데, 자는 동안 깨어 있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 언론일 수 있다. UPI의 워싱턴 데스크 내부 규정에는 백악관에 일이 발생하면 언제든지 그곳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의무조항이 명시되어 있다.’(‘백악관의 맨 앞줄에서’ 중) 헬렌이 취재한 대통령들은 모두 하나같이 역사책에 기록되길 원해서인지 그들이 행정부에서 한 일이 ‘최초’의 것이 되기를 추구했다고 한다. 최초의 중요한 법 제정, 최초의 인간 달 착륙, 최초의 예산 균형, 외부 세력과의 최초의 관계 구축 등이 그것으로 ‘역대 대통령들은 훌륭하게 또는 비열하게 그 일을 추진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은 백악관 출입기자라고 하면 대통령과 눈을 맞대며 가까이 있기 때문에 대통령과 친숙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헬렌은 “어림없는 생각”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백악관 출입기자라고 해도 기자회견 이외에는 대통령에게 여론을 알릴 자리가 없다. 따라서 백악관의 기자회견은 공개 토론회 형식으로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킬 유일한 자리다. 대통령을 피고석 혹은 증인석에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다. 국민을 대신해 언론매체들이 대통령의 정책을 신문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기자회견 연단에 설 때 대통령은 혼자다. 때로 자신 혹은 보좌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 들어오면 그간의 모든 예행연습은 창문 밖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럴 때 국민은 그들이 택한 사람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대통령이 얼마나 언론의 자유에 기여하는지가 증명되는가 하면, 그의 행동이 반(反)언론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헬렌은 “만일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싶거든 기자라는 직종에 끼어들지 말라”고 조언한다. 기자에게는 철저하게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백악관에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역사적 과정을 목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헬렌은 특권을 가진 사람이다. 10명의 대통령이 경험한 승리와 실패, 영광과 몰락, 기쁨과 슬픔을 함께했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위대함에는 용기가 따라야 한다.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어떤 대통령은 그 도전을 이루려 했다.’(‘백악관의 맨 앞줄에서’ 중) ‘찬란한 고난’, 이 말은 토머스 제퍼슨이 대통령직을 가리켜 한 말이다. 그것은 이 나라의 최고 지위지만 한편으로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자리라는 의미다. 존슨 대통령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옳은 일을 하기란 쉽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도덕적으로 옳은 일’은 매우 확실하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옳은 일’과 ‘정략적으로 옳은 일’, 그리고 그밖의 ‘옳은 일’의 숫자를 헤아리다보면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고 그러면 종종 후회에 이른다. 헬렌은 “(대통령이) 정치적으로는 인기가 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결정하려면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오바마를 향한 충고 그녀가 지난해 10월 집권 1년 차 새내기 대통령 버락 오바마에게 기고문을 통해 한 조언은 이 대목에서 귀 기울여 들을 만하다. ‘대통령 전문기자’이기에 가질 수 있는 혜안과 용기가 담겨 있다. 먼저 ‘소신’을 강조했다. 헬렌은 오바마 대통령의 책 제목 ‘담대한 희망’을 인용하면서 “(당신은)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줬으니 이제 담대함을 보여달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아프가니스탄 미군 증파 문제에 대해 “오바마 대통령은 지금 존슨 대통령이 장군들의 조언에 경도됐다가 상황을 악화시킨 전철을 답습할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소신을 가지고 펜타곤의 미군 증파 요구를 물리쳐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트루먼 대통령이 중공군 개입 이후 한국전쟁의 확전을 주장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해임한 사례를 참고하라고 충고했다. 두 번째 주문은 ‘개방’이었다. 헬렌은 “대통령, 당신은 완벽하지 않으니 완벽한 척 가장하지 말고 단점을 숨기려 하지도 말라”면서 “지금도 담배를 피우고 있다면 솔직히 공개하고 금연의 어려움을 대중과 공유하라”고 했다. 국민의 알권리를 수호하는 언론의 눈과 귀를 가리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시사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는 “조지 W 부시 정부와 오바마 정부는 전적으로 다르고 언론을 대하는 태도도 다르나 우리(기자)를 싫어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면서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항상 기자들을 관리하려든다”고 꼬집었다. 헬렌은 지금까지 10명의 대통령이 말하는 것을 귀로 듣고 눈으로 관찰한 결과 후보시절 선거유세에 나설 때는 하나같이 ‘(언론에) 개방된 정부’를 약속하지만 당선과 동시에 그런 약속은 내팽개쳐진다고 회고한다. 화장실에 가기 전과 후가 완전히 다르듯 말이다. 헬렌에 따르면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느 대통령도 진실로 언론을 좋아하지 않았다. 레이건 대통령은 기자들을 향해 노골적으로 “하느님은 그들(기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을 용서한다”고 했고, 부시 대통령은 퇴임 후, “나는 백악관에 있을 때 언론의 자유를 믿었지만 지금은 언론으로부터의 자유를 믿는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여기자가 남자 기자와 동등한 대접을 받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애초에 남자 직업이었던 저널리스트 세계에서 여기자들은 한동안 별종 취급을 받았다. 이를테면 1908년 결성된 전국언론인클럽(National Press Club·이하 NPC)은 남자들만의 사교 클럽이자 정보교환 장소였다. 여기자 가입은 원천적으로 봉쇄돼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듣고 보도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자들의 NPC 가입은 1956년에야 이뤄졌다. 그것도 오찬에 한해 발코니에 있을 수 있으며 반드시 남성 기자가 바래다줘야 하고 오찬이 끝나면 바로 나가야 한다는 (지금으로선 얼토당토않은) 조건이 붙어 있었다. NPC에서는 여기자를 정식 회원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검토하기 위해 특별 소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1971년 3월에야 24명의 여기자가 가입을 허락(?)받았다. 헬렌은 그해 12월 재정비서로 선출됐다.
NPC 진입장벽이 요새처럼 공고하던 시절, 한편에서는 여기자들만의 클럽을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1919년 28명의 여기자가 창립한 ‘전국여성언론인클럽’이 그것이다. 이 클럽은 1930년대 영부인 엘리노어 루스벨트를 명예회원으로 가입시키면서 활기를 띤다. 1933년 4월3일, 루스벨트 부인은 모여 있는 여기자들에게, 금주법이 곧 폐기될 것이라는 특종을 준다. 맥주 음용이 합법화되는 즉시 백악관 식탁에 맥주가 올라올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모처럼 여기자들이 영부인의 남편을 취재하는 남자 기자들보다 한발 앞서 보도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전국여성언론인클럽은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부터 유명 인사들을 연사로 초대해 존재감을 굳혔다. 헬렌은 1959~60년에 회장직을 맡았는데, 취임식에 당시 검찰총장 윌리엄 A. 로저스와 FBI 국장 후버가 참석했다.
‘무례한 질문’이란 건 없다 백악관에서 금녀의 장벽이 무너진 것은 케네디 대통령 시절이었다. 헬렌은 백악관 최초의 여기자였다. 헬렌은 ‘첫 번째’ 혹은 ‘최초의’라는 수식어가 붙는 사건을 많이 겪었다. 그렇다고 ‘첫 번째’가 그녀의 목표는 아니었다. 다만 있어야 할 때에 그 곳에 있었고, 또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주목받기 원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떤 곳에 오래 있다보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주시할 날이 반드시 온다.” 지금 같은 변화의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여기서 ‘오래 있으라’는 말은 자리에 대한 연연함을 가리키기보다 일에 대한 집중력과 끈기를 일컫는 것이다. 그녀는 2006년 5월 86세의 나이로 ‘우리가 민주주의의 파수견이라고?’라는 제목의 책을 내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책 발간 직후 ‘뉴욕타임스 매거진’(5월28일자)과 한 인터뷰에서 “역대 대통령은 언론을 조작해 원하는 바를 이루려 했다”면서 “(그럼에도 매일 백악관 브리핑 룸에 앉아 있었던 것은) 오늘 돌아가는 이야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확한 정보제공을 기피하는 것 자체가 기사”라고 꼬집기도 했다. 진보적 성향 때문이었는지 헬렌은 아들 부시 행정부 때 노골적으로 ‘왕따’를 당했다. 심지어 부시 대통령이 기자회견 때 그녀를 제외한 모든 기자에게 질문 기회를 주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날 다른 기자들이 ‘소감’을 묻자 헬렌은 “대통령은 겁쟁이”라며 “부시 대통령은 오사마 빈 라덴에게는 덤벼도 나에게는 덤비지 못한다”고 당당히 말했다. 헬렌은 뉴욕타임스 매거진 인터뷰 말미에 “기자에게 무례한(rude) 질문이란 없다. 기자들이 자꾸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더 어색하다”고 말했다. 기자에게 부여된 특권이 있다면 ‘질문 특권’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기자가 되길 열망하게 하는, 그럼으로써 평생 직업으로 삼게 만드는 요인이다. 기자는 각종 사건의 원인과 소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의 흥분과 성취로 인해 존재감을 느끼지만 바쁘고 힘든 직업이다. 헬렌도 “새벽 6시 반부터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취재라인 뒤에서 떨고 서서 대통령 집무실에서 방금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해줄 누군가를 기다릴 때, 또는 그들을 다른 동료기자들보다 먼저 만나기 위해 밀고 당기는 억척스러운 취재경쟁을 벌일 때 (기자 일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고 전한다. 취재원들로부터 조롱을 당할 때도 있다. 클린턴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을 지낸 콜린 파월이 임명되기 전에 파티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헬렌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통령 당선자가 당신을 국무장관으로 내정했다는 설이 있는데 사실인가요?”라고 묻자 파월은 짧게 한숨을 쉬더니 그 뒤쪽에 서 있는 사람에게 헬렌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 여자를 보낼 만한 전쟁터가 어디 없을까?” 헬렌은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하지만 헬렌은 “내가 흥미롭다고 느꼈던 것은 백악관 감시자로서의 인생보다는 권좌에 앉은 이들의 인생 스토리였다”고 말한다.
<참고도서> ● 백악관의 맨 앞줄에서 : 헬렌의 두 번째 책으로 케네디에서 클린턴까지 8명의 대통령과 대통령 부인들을 지근거리에서 관찰한 정밀보고서이자 백악관 내부 관찰기록이다. 38년간 차곡차곡 취재수첩을 메운 숨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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