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5> 오리아나 팔라치
'펜을 쥔 여전사'로 불린, 누구에게도 제압당하지 않은 인터뷰어
키신저·달라이 라마·숀 코너리…
거물급 인사들 꼼짝 못하게한 재간
시대의 큰 반향 남긴 인터뷰 수두룩
키신저·달라이 라마·숀 코너리…
거물급 인사들 꼼짝 못하게한 재간
시대의 큰 반향 남긴 인터뷰 수두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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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과 악수하고 있는 오리아나 팔라치. 그녀는 거물 인터뷰이들 앞에서 주눅들지 않는 인터뷰 전문기자였다. 아테네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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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돌아간 미국인 역사학자 대니얼 부어스틴은 대중매체의 인터뷰를 '기사화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유사사건(pseudo-event)'의 하나로 여겼다. 이 인터뷰라는 유사사건은 갑자기 터지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어(기자)와 인터뷰이(취재원)의 합의에 따라 미리 짜인다.
좋은 인터뷰 기사에는 인터뷰이의 의견만이 아니라 인터뷰어의 인격, 시각, 지식 따위가 함께 버무려져 있다. 다시 말해 거기선 두 인격과 세계관이 맞부딪치며 긴장의 불꽃이 튄다.
그것은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관계가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마찬가지다. 그 점이 인터뷰 기사의 매력이다. 좋은 인터뷰어는 인터뷰이가 알리고 싶어하는 사실만이 아니라, 독자(인터뷰어를 포함한)가 알고 싶은 사실을 인터뷰이로부터 끌어낸다.
인터뷰이의 의견을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다면, 매체는 인터뷰를 하는 대신 인터뷰이의 원고를 받아 지면에 실으면 그만이다.
모든 글이 그렇듯, 좋은 인터뷰 기사를 쓰는 일은 어렵다. 기자가 인터뷰이의 위세에 눌려 묻고 싶은 것을 못 묻고 상대가 바라는 질문만을 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위세만이 아니라 상호 감정도 개입한다. 인터뷰이에게 호감을 지닌 인터뷰어가 던지는 질문은 인터뷰이에게 악감을 지닌 인터뷰어가 던지는 질문과 많이 다를 것이다.
솜씨 좋은, 그리고 어떤 명확한 의도를 지닌 인터뷰어는 인터뷰이가 특정한(인터뷰어가 바라는)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게끔 대화를 한 편으로 몰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떨 땐, 그것이 좋은 인터뷰 기사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의도가 공익에 부합한다면 말이다.
물론 어떤 의도가 공익에 부합하느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것은 인터뷰어의 주관이다. 어차피 '완전히 객관적인' 기사란 있을 수 없다. 기사들은, 사설이나 칼럼 같은 의견기사가 아닌 스트레이트 기사일지라도, 어떤 사건의 한 면을 다른 면보다 더 부각시키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스트레이트 기사에서도 기자의 주관은 개입한다. 독자로서는 기자의 주관이 자신의 주관과 서로 어긋나지 않는 공익의 지평에 가로놓여 있기를 바랄 수 있을 따름이다.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오리아나 팔라치(1929~2006)는 한 시대를 주름잡은 인터뷰 전문 기자였다. 인터뷰 기사의 가치를 결정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인터뷰이의 명성이다. 그 점에서 팔라치는 동시대 어떤 기자보다도 재간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국제적 명성을 지닌 사람들과 마주앉을 기회를 자주 만들어냈다. 그 가운데는 정치인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헨리 키신저, 빌리 브란트, 무아마르 알 가다피, 야세르 아라파트, 인디라 간디, 구엔 반 티우, 골다 메이어, 줄피카르 알리 부토, 이란의 팔레비 국왕과 그의 최대 정적 아야톨라 호메이니, 레흐 바웬사 같은 이들이 그들이었다. 거기에 더해 달라이 라마, 영화배우 숀 코너리, 텔레비전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 같은 인물도 팔라치의 인터뷰이였다.
누구와 인터뷰를 할 때든, 오리아나 팔라치는 취재원에게 제압당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인터뷰를 주도했고,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을 물었다. 그래서 종종 이런 거물들의 적이 되기도 했다. 반면에 팔라치가 인터뷰이에게 반한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 초에 만난 그리스의 반(反)독재 투사 알렉산드로스 파나굴리스가 그 사람이었다.
파나굴리스는 군인-독재자 파파도풀로스를 살해하려 했다는 혐의로 투옥되어 끔찍한 고문을 당한 뒤 막 풀려난 참이었다. 팔라치는 첫눈에 파나굴리스에게 반했고, 파나굴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내 연인이 되었고, 사실상의 부부가 되었다. 그리스에 민주주의가 회복된 뒤 파나굴리스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1976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팔라치는 파나굴리스의 죽음에 '대령들'(쿠데타로 그리스를 거머쥐었던 군부세력)의 잔당이 관여돼 있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진상은 지금도 미궁 속에 있다. 팔라치와 파나굴리스의 불같은 사랑과 고난은 뒷날 팔라치가 쓴 장편소설 <남자>(Un Uomo)의 밑그림이 되었다.
담 큰 기자들의 꿈 하나는 전쟁을 취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쟁 전문기자가 될 사람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 같다. 그들에겐 용기만이 아니라, 체력과 민첩함과 객관적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전을 포함한 전쟁의 취재는 팔라치의 운명이었다.
그녀는 열 살을 조금 넘겨서부터 사람들이 사람들을 죽이는 광경을 일상적으로 지켜보았다. 소녀 오리아나는, 무솔리니의 정적 가운데 하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반파쇼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다. 해방을 맞은 그녀는 10대의 나이로 기자 노릇과 학업을 병행했고, 30대 말부터는 분쟁지역 전문 기자가 되었다.
오리아나 팔라치는 베트남을, 인도-파키스탄 국경을, 중동을, 남아메리카를 누비며 전쟁의 기록자가 되었다. 1960년대 말에 인쇄매체 기자로서 전쟁을 취재하는 것은 그리 매력적인 일이 아니었다.
예컨대 그는 오늘날의 CNN 기자 크리스티안 아만푸르처럼 화면 속의 포연이 만들어주는 아우라를 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팔라치는 펜으로 아우라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전투 기사들은 파릇파릇한 생동감으로 현실과 이미지를 포갰다.
그녀가 관찰한 수많은 전쟁 가운데는 레바논 내전도 있다. "기자로 기억되기보다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고 되뇌던 팔라치가 그 경험을 소설화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 소설의 제목은 아랍어로 '신의 뜻대로'라는 의미인 <인샬라>였다. 이 작품은 헤밍웨이의 전쟁소설들에 비견될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고, 많이 팔려나갔다.
그러나 <인샬라>는, 팔라치의 다른 책들이나 일부 기사들과 함께, 그녀에게 반-이슬람주의자 낙인을 찍는 데 한몫했다. 이 책 헌사에는 "신의 아들들이 자행한 베이루트 대학살에서 죽어간 400여 명의 미군과 프랑스군 병사들에게 이 소설을 바치고 싶다"라는 문장이 있다.
소설 자체가 이슬람 자살 테러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팔라치는 내전의 여러 '진영'을 비교적 공평하게 묘사한 이 소설에 너무 '인도적인' 애도의 헌사를 씀으로써 제 '진영'을 드러내고 말았다.
열 살 갓 넘어서부터 반-파쇼 저항운동에 참여했고, 키신저로부터 "베트남전쟁은 쓸데없는 전쟁이었다"라는 자백을 받아낸(팔라치는 끊임없이 베트남에 대해 묻고 키신저는 줄곧 베트남 얘기를 회피했던 이 인터뷰는 활자화된 뒤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닉슨은 10분마다 키신저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이 자유의 투사에게는, 아쉽게도 편견의 대상이 둘 있었다. 하나가 이슬람교였고, 또 하나가 멕시코였다.
그녀는 멕시코에 대해 공개적으로 혐오를 드러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직전 틀라텔로코 광장 학살을 취재하며 당한 테러가 그 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슬람(테러리스트들만이 아니라 이슬람 자체)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지녔던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사적으로, 그녀는 이슬람교와 나쁜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정말 공적 차원에서 이슬람교를 자유와 평화의 적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그녀가 이슬람 '테러리스트'를 혐오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쪽 편의 테러리스트가 다른 쪽에서 보면 자유의 투사라는 것을 그녀는 정말 이해하지 못했던 것일까?
더구나 팔라치의 생전에도 일부 이슬람 테러단체는 미국 이상으로 아랍의 절대군주제와 대립하고 있었다. 인도 인류학자 아르준 아파두라이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 코란은 민간인에 대한 어떤 일반적 폭력도 허용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역사상 서로 전쟁 중인 종교들은 늘 관용을 모욕해왔다.
팔라치가 정말로 편견에 찬 반-이슬람주의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생애 후반에 여러 차례 이슬람 단체들의 고소를 받았고, 인종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오리아나 팔라치는 강한 여자였다. 강함은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증오나 사랑 같은 감정과 결합하면 사태를 악화시키거나 크게 개선한다.
오리아나 팔라치의 강함은 양쪽과 다 연루돼 있었던 것 같다. 펜 하나로 독재자들을 희롱하고 모욕할 때 그녀의 강함은 선했다. 끝내 자신이 반-이슬람주의자가 아니라고 공언하지 못했을 때, 그의 강함은 바람직했던 것 같지 않다.
아니, 이것은 팔라치에 대한 모독이거나 오해일 수 있다. 그녀는 신념을 지닌 반-이슬람주의자였을 수도 있다. 그녀는 소수파인 여자이면서, 다수파인 유럽중심주의자, 서양우월론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완전히 반하지 못했다. 팔라치의 소설 <남자>에서 '남자'는 그녀의 연인 파나굴리스다. 그러나 나는 왠지 그 남자가 오리아나 팔라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좋은 인터뷰 기사에는 인터뷰이의 의견만이 아니라 인터뷰어의 인격, 시각, 지식 따위가 함께 버무려져 있다. 다시 말해 거기선 두 인격과 세계관이 맞부딪치며 긴장의 불꽃이 튄다.
그것은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관계가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마찬가지다. 그 점이 인터뷰 기사의 매력이다. 좋은 인터뷰어는 인터뷰이가 알리고 싶어하는 사실만이 아니라, 독자(인터뷰어를 포함한)가 알고 싶은 사실을 인터뷰이로부터 끌어낸다.
인터뷰이의 의견을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다면, 매체는 인터뷰를 하는 대신 인터뷰이의 원고를 받아 지면에 실으면 그만이다.
모든 글이 그렇듯, 좋은 인터뷰 기사를 쓰는 일은 어렵다. 기자가 인터뷰이의 위세에 눌려 묻고 싶은 것을 못 묻고 상대가 바라는 질문만을 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위세만이 아니라 상호 감정도 개입한다. 인터뷰이에게 호감을 지닌 인터뷰어가 던지는 질문은 인터뷰이에게 악감을 지닌 인터뷰어가 던지는 질문과 많이 다를 것이다.
솜씨 좋은, 그리고 어떤 명확한 의도를 지닌 인터뷰어는 인터뷰이가 특정한(인터뷰어가 바라는)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게끔 대화를 한 편으로 몰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떨 땐, 그것이 좋은 인터뷰 기사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의도가 공익에 부합한다면 말이다.
말하자면 스트레이트 기사에서도 기자의 주관은 개입한다. 독자로서는 기자의 주관이 자신의 주관과 서로 어긋나지 않는 공익의 지평에 가로놓여 있기를 바랄 수 있을 따름이다.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오리아나 팔라치(1929~2006)는 한 시대를 주름잡은 인터뷰 전문 기자였다. 인터뷰 기사의 가치를 결정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인터뷰이의 명성이다. 그 점에서 팔라치는 동시대 어떤 기자보다도 재간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국제적 명성을 지닌 사람들과 마주앉을 기회를 자주 만들어냈다. 그 가운데는 정치인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헨리 키신저, 빌리 브란트, 무아마르 알 가다피, 야세르 아라파트, 인디라 간디, 구엔 반 티우, 골다 메이어, 줄피카르 알리 부토, 이란의 팔레비 국왕과 그의 최대 정적 아야톨라 호메이니, 레흐 바웬사 같은 이들이 그들이었다. 거기에 더해 달라이 라마, 영화배우 숀 코너리, 텔레비전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 같은 인물도 팔라치의 인터뷰이였다.
누구와 인터뷰를 할 때든, 오리아나 팔라치는 취재원에게 제압당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인터뷰를 주도했고,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을 물었다. 그래서 종종 이런 거물들의 적이 되기도 했다. 반면에 팔라치가 인터뷰이에게 반한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 초에 만난 그리스의 반(反)독재 투사 알렉산드로스 파나굴리스가 그 사람이었다.
파나굴리스는 군인-독재자 파파도풀로스를 살해하려 했다는 혐의로 투옥되어 끔찍한 고문을 당한 뒤 막 풀려난 참이었다. 팔라치는 첫눈에 파나굴리스에게 반했고, 파나굴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내 연인이 되었고, 사실상의 부부가 되었다. 그리스에 민주주의가 회복된 뒤 파나굴리스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1976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팔라치는 파나굴리스의 죽음에 '대령들'(쿠데타로 그리스를 거머쥐었던 군부세력)의 잔당이 관여돼 있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진상은 지금도 미궁 속에 있다. 팔라치와 파나굴리스의 불같은 사랑과 고난은 뒷날 팔라치가 쓴 장편소설 <남자>(Un Uomo)의 밑그림이 되었다.
담 큰 기자들의 꿈 하나는 전쟁을 취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쟁 전문기자가 될 사람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 같다. 그들에겐 용기만이 아니라, 체력과 민첩함과 객관적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전을 포함한 전쟁의 취재는 팔라치의 운명이었다.
그녀는 열 살을 조금 넘겨서부터 사람들이 사람들을 죽이는 광경을 일상적으로 지켜보았다. 소녀 오리아나는, 무솔리니의 정적 가운데 하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반파쇼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다. 해방을 맞은 그녀는 10대의 나이로 기자 노릇과 학업을 병행했고, 30대 말부터는 분쟁지역 전문 기자가 되었다.
오리아나 팔라치는 베트남을, 인도-파키스탄 국경을, 중동을, 남아메리카를 누비며 전쟁의 기록자가 되었다. 1960년대 말에 인쇄매체 기자로서 전쟁을 취재하는 것은 그리 매력적인 일이 아니었다.
예컨대 그는 오늘날의 CNN 기자 크리스티안 아만푸르처럼 화면 속의 포연이 만들어주는 아우라를 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팔라치는 펜으로 아우라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전투 기사들은 파릇파릇한 생동감으로 현실과 이미지를 포갰다.
그녀가 관찰한 수많은 전쟁 가운데는 레바논 내전도 있다. "기자로 기억되기보다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고 되뇌던 팔라치가 그 경험을 소설화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 소설의 제목은 아랍어로 '신의 뜻대로'라는 의미인 <인샬라>였다. 이 작품은 헤밍웨이의 전쟁소설들에 비견될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고, 많이 팔려나갔다.
그러나 <인샬라>는, 팔라치의 다른 책들이나 일부 기사들과 함께, 그녀에게 반-이슬람주의자 낙인을 찍는 데 한몫했다. 이 책 헌사에는 "신의 아들들이 자행한 베이루트 대학살에서 죽어간 400여 명의 미군과 프랑스군 병사들에게 이 소설을 바치고 싶다"라는 문장이 있다.
소설 자체가 이슬람 자살 테러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팔라치는 내전의 여러 '진영'을 비교적 공평하게 묘사한 이 소설에 너무 '인도적인' 애도의 헌사를 씀으로써 제 '진영'을 드러내고 말았다.
열 살 갓 넘어서부터 반-파쇼 저항운동에 참여했고, 키신저로부터 "베트남전쟁은 쓸데없는 전쟁이었다"라는 자백을 받아낸(팔라치는 끊임없이 베트남에 대해 묻고 키신저는 줄곧 베트남 얘기를 회피했던 이 인터뷰는 활자화된 뒤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닉슨은 10분마다 키신저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이 자유의 투사에게는, 아쉽게도 편견의 대상이 둘 있었다. 하나가 이슬람교였고, 또 하나가 멕시코였다.
그녀는 멕시코에 대해 공개적으로 혐오를 드러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직전 틀라텔로코 광장 학살을 취재하며 당한 테러가 그 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슬람(테러리스트들만이 아니라 이슬람 자체)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지녔던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사적으로, 그녀는 이슬람교와 나쁜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정말 공적 차원에서 이슬람교를 자유와 평화의 적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그녀가 이슬람 '테러리스트'를 혐오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쪽 편의 테러리스트가 다른 쪽에서 보면 자유의 투사라는 것을 그녀는 정말 이해하지 못했던 것일까?
더구나 팔라치의 생전에도 일부 이슬람 테러단체는 미국 이상으로 아랍의 절대군주제와 대립하고 있었다. 인도 인류학자 아르준 아파두라이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 코란은 민간인에 대한 어떤 일반적 폭력도 허용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역사상 서로 전쟁 중인 종교들은 늘 관용을 모욕해왔다.
팔라치가 정말로 편견에 찬 반-이슬람주의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생애 후반에 여러 차례 이슬람 단체들의 고소를 받았고, 인종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오리아나 팔라치는 강한 여자였다. 강함은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증오나 사랑 같은 감정과 결합하면 사태를 악화시키거나 크게 개선한다.
오리아나 팔라치의 강함은 양쪽과 다 연루돼 있었던 것 같다. 펜 하나로 독재자들을 희롱하고 모욕할 때 그녀의 강함은 선했다. 끝내 자신이 반-이슬람주의자가 아니라고 공언하지 못했을 때, 그의 강함은 바람직했던 것 같지 않다.
아니, 이것은 팔라치에 대한 모독이거나 오해일 수 있다. 그녀는 신념을 지닌 반-이슬람주의자였을 수도 있다. 그녀는 소수파인 여자이면서, 다수파인 유럽중심주의자, 서양우월론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완전히 반하지 못했다. 팔라치의 소설 <남자>에서 '남자'는 그녀의 연인 파나굴리스다. 그러나 나는 왠지 그 남자가 오리아나 팔라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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