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들이 지나가도록 놔두지 않겠어!" 스페인 내전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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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passio, -onis'를 차용한 것인데, 이 라틴어 명사는 '괴로워하다, (고통을) 당하다'라는 뜻의 동사 'pati'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 동사는 정신적 괴로움만이 아니라 육체적 고통스러움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열정이라는 것은 passion의 2차적 뜻이다. 수난이나 고통을 열정과 연결시킨 유럽인들의 상상력이 날랬든 엉뚱했든, 열정이 어느 정도 고통을 수반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열정에는, 설령 고통까지는 아니더라도, 얼마쯤의 스트레스가 따른다.
그것은 passion이 '(수동적으로)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assion의 수동성은, 예컨대 영어의 passion/action, passive/active,/ patient/agent 같은 낱말쌍에서 또렷이 드러난다. 격정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거기 사로잡히거나 휩쓸리거나, 그것을 잃을 수 있을 뿐이다.
이 passion이라는 말에서 나온 꽃이름으로 passion flower(영어), passiflore(프랑스어), pasionaria(스페인어)라는 것이 있다.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말들이다. 우리말로는 '시계꽃', 또는 '꽃시계덩굴'이라 불리는 풀인데 꽃잎이 불그스레하다.
그 꽃말은 '성스러운 사랑'이다. 붉은 색은 대체로 뜨거운 열정을 상징한다. 인간세상의 그 열정 가운데 큰 것이 이념을 향한 열정이다. 스페인 바스크 출신의 공산주의자 돌로레스 이바루리 고메스(1895~1989)가 '라 파시오나리아'를 필명으로 삼은 것은 그래서 그럴 듯하다. '라(la)'는 스페인어 여성 단수 정관사다.
이바루리 고메스의 퍼스트네임이 돌로레스인 것도 흥미롭다. 스페인어로 돌로레스는 고통, 괴로움을 뜻하기 때문이다. 돌로레스는 패션, 곧 수난인 것이다. 스페인어권 사람들, 자식 이름 짓는 취향이 좀 별났다. 돌로레스가 스페인어권에서 흔한 이름이어서 하는 말이다.
돌로레스 이바루리 고메스(앞으로는 라 파시오나리아라 부르자)는 20세기 스페인 공산주의 운동을 이끈 사람이다. 가난 탓에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독학으로 마르크스의 책들을 읽었고, 뒷날 모스크바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11남매의 여덟째였고, 결혼해서 자식 여섯을 두었다. 그 자식 가운데 넷은 어려서 굶주림으로 죽었고, 외아들은 뒷날 제2차 세계대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적군(赤軍)으로 참전해서 전사했다.
라 파시오나리아라는 이 열정의 꽃이 고통의 꽃이기도 했다면 그 으뜸가는 이유는 자신이 거두지 못한 자식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한 1989년에 작고한 것은 그녀의 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평생 지녀왔던 신념이 밑동까지 흔들리는 것을 보지 않고 죽었으니 말이다.
라 파시오나리아라는 이름을 역사에 굵은 글씨로 새긴 계기는 스페인 내전(1936~39)이다. 탁월한 웅변가였던 그녀는 치열했던 마드리드 전투를 '노 파사란!'(No Pasaran! : They shall not pass!)이라는 구호로 이끌었다.
"놈들이 여길 지나가도록 놔두지 않겠어!" 정도의 뜻이다. 그녀가 우렁찬 연설로 군중을 선동할 때, 꽃시계덩굴은 힘찬 열정으로 사방팔방 뻗어나가 파시스트들의 목을 죌 것 같았다.
그러나 프랑코의 파시스트 군대는 결국 마드리드를 함락시켰고, 쿠데타 성공 이후 스페인에선 모든 좌파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라 파시오나리아는 소련으로 망명했고, 그 곳에서 정치를 계속했다.
유럽 각지에서 소련으로 피신한 적잖은 정치적 망명객들과 달리, 라 파시오나리아는 소련 당국과 별 갈등이 없었다. 1930년대부터 코민테른 활동을 했다는 점이 그녀와 소련 당국 사이의 친밀감을 키웠을지도 모르고, 외국인 출신의 걸출한 정치 지도자를 후원하고 있다는 선전을 소련 당국이 계산에 넣었을지도 모른다.
파시스트의 승리로 끝난 내전 뒤 라 파시오나리아는 기다란 망명 생활을 강요받았지만, 그녀는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스페인 공산당을 이끌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무렵 그녀는 스페인 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돼 1960년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물론 몸은 소련에 있었다. 총서기 자리를 산티아고 카리요에게 물려준 1960년부터 1989년 작고할 때까지는 스페인 공산당 의장이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반세기 가까이 스페인 공산당의 상징이고 우두머리였다. 그 기간의 대부분을 소련에 있었으므로 신변의 안전도 보장되었다. 그녀가 스페인으로 다시 돌아간 것은 프랑코가 죽은 직후인 1975년이었다. 두 해 뒤에 그녀는 국회의원이 되었다. 1936년 이래 39년 만이었다.
라 파시오나리아의 삶에는 열정과 수난이 버무려졌지만, 그녀의 정치적 운은 나쁘지 않았다. 스페인 공산당의 가장 중요한 직책을 스페인 바깥 안전한 곳에서 수행했고, 조국이 민주화되어 귀국한 뒤에는 서유럽공산당에서 레닌-스탈린주의의 빛깔을 눅이려는 유로코뮤니즘 운동에 가담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계속 모스크바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그녀가 유로코뮤니즘 운동에 몸을 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라 파시오나리아에게 아우라를 부여해 뒷날 공산당의 중요 직책을 맡게 한 것은 스페인 내전기의 활동이다. 덧없지만 흥미로운 가정을 해보자. 만일 1936~39년의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 정부가 프랑코의 쿠데타를 제압하고 승리했다면(굉장히 어려운 승리였을 것이다), 그것은 스페인과 세계를 위해서 좋은 일이었을까?
소신있는 파시스트가 아니라면 모두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당시 스페인 내전은 세계 양심의 시험장이라 불렸다. 그리고 그 양심은 국제여단의 공화파 지지에도 불구하고 처절히 패배했다.
그런데 만일 영국, 프랑스 정부가 공화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히틀러가 팔짱을 끼고 있어 그 양심이 승리했다면, 다시 말해 프랑코의 쿠데타가 실패했다면, 그 뒤의 역사는 어떻게 굴러갔을까? 공화파 정부가 이겼더라도 3년간의 내전으로 스페인은 어차피 황폐해져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황폐해진 스페인은 곧바로 제2차 세계대전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주변의 민주주의 국가들을 단번에 유린한 히틀러가 '민주주의 스페인'을 그냥 놓아두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이 가상세계에서, 스페인은 3년간의 내전에 이어 6년간의 세계대전에 곧바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내전에서 승리했다는 감격과 자부심이 커 스페인 민주주의자들이 호락호락 백기를 들지도 않을 것이다.
아니 프랑스에서 그랬듯 스페인의 민주주의 정부가 히틀러에 힘없이 무너져 파시스트 괴뢰정부가 들어선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독일은 프랑스의 경우처럼 스페인 영토의 상당부분을 직접 점령하고, 나머지 지역의 행정을 괴뢰정부에게 맡겼을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스페인에서는 또 다른 내전이 시작됐을 것이다.
괴뢰정부에 반대하는 좌파 레지스탕스와, 히틀러(나 무솔리니)가 조종하는 괴뢰정부 사이에 말이다. 그럴 경우, 라 파시오나리아는 당연히 레지스탕스의 선봉에 섰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스페인 괴뢰정부는 히틀러를 도와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힘든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의 역사에서는 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스트가 이겼다. 게르니카 폭격을 비롯한 독일의 도움이 컸다. 그러나 내전이 끝난 뒤, 프랑코는 히틀러의 여러 차례 제안에도 아랑곳않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저 추축국 쪽에 우호적 중립을 지켰을 뿐이다. 히틀러로서는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이념을 지닌 군사대국 스페인을 적으로 돌리는 어리석은 짓을 그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스페인은 유럽만이 아니라 온 세계가 휘말려 들어간 전쟁에 끼이지 않고 국토를 보전할 수 있었다.
비록 프랑코의 탄압으로 국내 민주주의는 말살됐지만, 그리고 전후에도 독재체제가 계속됐지만, 유럽 중추국가의 하나로서 6년간의 세계대전에서 면제될 수 있었다는 것은 보통 행운이 아니었다. 독재자 프랑코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수십만 스페인 젊은이들의 목숨을 구했다.
더구나 전쟁이 끝난 뒤, 미국은 유럽의 반공동맹을 위해 국제여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프랑코의 파시스트 정부와 협력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가 승리했다면, 전후엔 좌파 정부가 들어서기 십상이었을 것이고, 스페인이 미국의 지지를 받아 경제를 발전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을 새옹지마라 해야 할까, 역사의 아이러니라 해야 할까? 지하의 라 파시오나리아는 어쩌면 공화파의 패배를, 자신이 마드리드를 지켜내지 못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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