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20> 마더 테레사 - 콜카타의 성녀
거룩한 성녀였지만 때론 나약한 여자였던…
인도 등서 평생 아프고 가난한 이들과 똑같이 생활, 잠깐 돕는 자선 아닌 스스로 몸낮춘 사랑의 실천가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에 믿음을 향한 투쟁 계속… 가톨릭적 보수성·고통의 신학 싸고 비판도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마더 테레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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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한 종교집회에 참석한 인도의 소년소녀들이 마더 테레사의 초상화 앞에서 설교를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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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대부분에게 '자선'이나 '봉사'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밑에 구세군 자선냄비에 몇 푼 넣는 일쯤이야 어렵지 않겠지만, 평생을 자선의 마음으로 사는 것, 더 나아가 제 삶을 자선행위나 봉사활동에 통째로 바치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 지난주에 살핀 다이애너 스펜서도 이혼 뒤의 삶을 자선활동에 상당 부분 바쳤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세계적인 명성이 있었고, 돈이 있었다. 다이애너의 자선활동은 일종의 취미활동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허영놀이였다. 그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 그만한 정도의 자선활동을 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그녀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갖추고도 그런 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 세상엔 수두룩하지만 말이다.
영국 소설가 윌리엄 서머싯 몸이 <불멸의 작가, 위대한 상상력>(개마고원 발행ㆍ권정관 옮김, 원제는 '열 편의 소설과 그 작가들')에서 인용한 프랑스 작가 스탕달의 말이 생각난다. 어려서부터 열렬한 공화주의자였던 스탕달은 11살 어느 날 저녁, 집 근처에서 구경한 혁명파 집회에서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무산자 계급이 더럽고 냄새날 뿐만 아니라, 야비하고 천한 말투를 쓴다는 걸 알았다. 그 경험은 뒷날 스탕달로 하여금 이런 글을 쓰게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세계적인 명성이 있었고, 돈이 있었다. 다이애너의 자선활동은 일종의 취미활동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허영놀이였다. 그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 그만한 정도의 자선활동을 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그녀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갖추고도 그런 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 세상엔 수두룩하지만 말이다.
영국 소설가 윌리엄 서머싯 몸이 <불멸의 작가, 위대한 상상력>(개마고원 발행ㆍ권정관 옮김, 원제는 '열 편의 소설과 그 작가들')에서 인용한 프랑스 작가 스탕달의 말이 생각난다. 어려서부터 열렬한 공화주의자였던 스탕달은 11살 어느 날 저녁, 집 근처에서 구경한 혁명파 집회에서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무산자 계급이 더럽고 냄새날 뿐만 아니라, 야비하고 천한 말투를 쓴다는 걸 알았다. 그 경험은 뒷날 스탕달로 하여금 이런 글을 쓰게 했다.
"요컨대, 예나 지금이나 나는 민중을 사랑하고 그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을 미워한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사는 일은 내게 영원한 고문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매우 귀족적인 취향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민중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용의가 있다. 그러나 장사치와 함께 사느니 차라리 매달 2주 동안 감옥에서 지내는 편이 낫다고 나는 믿는다."
이것은 진보적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 상당수가 마음 속 깊이 동의할지도 모르는 생각이다. 나는 진보적이지도 않고 지식인도 못 되지만, 스탕달의 이 말에 적잖이 공감한다. 다이애너 스펜서의 자선활동도 이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한 일이란 이따금 자선단체에 기부를 하는 것 외에, 가난한 사람이나 병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음으로써 그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것 정도였다. 그것은 한 움큼의 선함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봉사'였다.
그런데, 이들을 위해 기금을 내거나 이들과 사진을 찍는 데서 더 나아가 이들과 함께 사는 일이라면? 더구나 평생을. 이것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일 테다. 그것은 노력만이 아니라 천성이 따라주어야 가능한 일일 게다. 흔히 '마더 테레사'라 불리는 테레사 수녀(1910~1997.9.5)가 그런 사람이었다.
저번 차례에 비쳤듯, 그녀는 다이애너 스펜서가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지 닷새 뒤에 죽었다. 너무 저명한 사람과 비슷한 시기에 죽으면, 어지간히 저명한 사람도 제 죽음을 널리 알리지 못한다.
최근의 예를 들자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작고하기 전날 작고한 연기인 여운계 선생이 그랬다. 여운계 선생의 삶과 죽음은 대중매체에서 널리 조명 받을 만했지만, 전임 대통령의 급작스런 서거라는 그림자에 묻혀버렸다.
그러나 콜카타(캘커타)의 마더 테레사는 그런 불운을 겪지 않았다. 그녀의 명성은 다이애너 스펜서의 그것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그녀의 죽음을 추도했다. 그리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녀를 시복했다.
이 '빈자와 병자의 벗' 스토리는 너무 잘 알려져서, 그녀의 생애를 요약하는 것도 좀 싱겁다. 아니, 단지 너무 잘 알려져서만은 아니다. 그녀의 삶은 단순했다. 굴곡이 없었다.
콜카타의 빈민촌에서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고아들, 부랑자들과 산 것이 그녀 인생(정확히는 반생이라고 해야겠지만)의 거의 전부였다. 그녀의 전기들은 흔히 밋밋하고 지루한 에피소드들로 채워진다. 그 밋밋함과 지루함이 바로 거룩함이었다.
마더 테레사의 본명은 아그네스 본자 보자주다. 아그네스는 잘 알다시피 '어린 양'이라는 뜻이고, '본자'는 알바니아어로 장미꽃봉오리를 뜻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는 어느 나라 사람일까?
그녀가 태어난 곳은 오늘날 마케도니아공화국의 수도인 스코페다. 당시엔 오토만제국의 영토였고, 우스쿱이라 불렸다. 그러나 핏줄로 따지면 그녀는 알바니아인이었다. 그리고 뒷날 인도인으로 귀화해 인도인으로 죽었다.
아인슈타인의 경우에서 보듯, 저명인과 경계인을 겸한 사람은 국적쟁탈전의 표적이 된다. 마더 테레사도 이와 비슷하다. 알바니아도, 마케도니아도, 터키도 그녀를 제 나라 사람이라고 부를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녀가 인도를 제2의 조국으로 삼아 인도인을 자처한 만큼, 인도인으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 하기야 테레사 같은 이에게 국적이 무슨 상관이랴? 그녀의 국적은 하느님 나라였을 것이다.
어린 아그네스가 제 삶을 종교에 바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12세 때였다. 18세 때 아일랜드의 로레토 수녀원으로 들어간 뒤, 그녀는 평생 가족을 만나지 않았다.
그녀가 인도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9세 때인 1929년이었지만, 인도를 삶의 근거지로 삼겠다고 결심한 것은 1946년이었다. 그 즈음 쓴 글에서 그녀는 자신의 선교활동과 자선행위를 '소명 속의 소명'(the call within the call)이라 불렀다.
그녀가 제 근거지를 아일랜드로 삼았다면, 삶은 더 편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나는 수녀원을 떠나 빈자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도와야 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명령이었고, 내가 그 명령을 받드는 데 실패한다면 내 믿음도 깨져버릴 것"이라고 썼다.
그녀는 1950년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설립해 본격적 자선활동에 들어갔다. 1963년에는 '사랑의 선교 수사회'를 만들었다. 선교사로서만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자로서 테레사의 이름은 인도를 넘어서 전세계에 퍼졌다. 1979년에 받은 노벨평화상을 비롯해, 그녀가 각국 정부와 기관으로 받은 상과 감사장은 수도 없이 많다.
20세기 인도에 남자로서 간디가 있었다면, 여자로서는 테레사가 있었다. 그들은 종교도, 성별도, 세대도 달랐지만, 단순함과 평화로움이 거룩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실제로 마더 테레사의 삶은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함께 사는 빈자들, 사생아들, 병자들과 똑같이 먹고 똑같이 잤다.
그러나 간디가 일부 사람들로부터 정당하게 또는 부당하게 비판받았듯, 마더 테레사에게도 정당한 또는 부당한 비판이 날아들곤 했다. 그 비판의 일부는 그녀의 가톨릭적 보수성을 겨눴다. 마더 테레사는 낙태와 이혼을 결코 저질러서는 안 될 죄라 여겼다. 그녀의 주변에 사생아가 몰렸던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또 가난 자체를 타파해야 할 악으로 여기지 않고 하느님에게 가까이 가는 삶의 방식이라 여겼다. 그래서 수녀회에 기부된 돈의 상당 부분은 그녀 주변 사람들의 삶을 물질적으로 개선하는 데 쓰이는 대신 여러 곳에 지부를 만드는 데 쓰였다. 그것은 비판자들로부터 '고통의 신학'이라고 불렸다. 테레사에게 지상의 고통은 하느님의 축복이었기 때문이다.
마더 테레사는 주변의 수녀들에게까지도 '현대적 과학지식'을 '믿음'으로 대치하라고 강요했다. 예컨대 몸이 아파도 도심의 큰 병원에서 치료받는 것이 금지됐다.
선종하기 한 해 전, 그녀가 캘리포니아의 일급 병원에서 치료받기로 결정한 사실은 그녀를 위선자로 보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녀는 또 아이티의 독재자 뒤발리에 가족이나 부패한 사업가들로부터 기부금을 받고 그들을 축복하기까지 했다. 아무튼 그녀는 독선적이었다.
내가 마더 테레사의 삶에서 가장 감동받는 부분은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반생의 헌신이 아니다. 나는 그녀가 죽을 때까지 싸운 '믿음을 향한 투쟁'에 감동한다. 그녀는 사적인 자리에서 여러 번, 그리고 때로는 공적인 자리에서도,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늘어놓았다.
예컨대 그녀는 이렇게 썼다. "내 믿음은 어디 있는가?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도 텅 빔과 어둠밖엔 없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날 용서하시기 바란다. 천국을 생각하려 애써 봐도, 공허함이 엄습하면서 그 생각이 날카로운 칼처럼 되돌아와 내 영혼을 벤다. 이 남모를 고통이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내겐 믿음이 없다.
사랑도 열정도 없다. 내가 뭘 위해 일하고 있는가? 하느님이 없다면, 영혼도 있을 수 없다. 영혼이 없다면, 예수여, 당신은 가짜다." 그녀는 거기서 더 나간다. "예수님은 나를 특별히 사랑하실까? 그러나 나로선,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 커서,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다." 이 거룩한 여성은, 때때로, 나약한 여성이었다.
이것은 진보적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 상당수가 마음 속 깊이 동의할지도 모르는 생각이다. 나는 진보적이지도 않고 지식인도 못 되지만, 스탕달의 이 말에 적잖이 공감한다. 다이애너 스펜서의 자선활동도 이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한 일이란 이따금 자선단체에 기부를 하는 것 외에, 가난한 사람이나 병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음으로써 그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것 정도였다. 그것은 한 움큼의 선함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봉사'였다.
그런데, 이들을 위해 기금을 내거나 이들과 사진을 찍는 데서 더 나아가 이들과 함께 사는 일이라면? 더구나 평생을. 이것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일 테다. 그것은 노력만이 아니라 천성이 따라주어야 가능한 일일 게다. 흔히 '마더 테레사'라 불리는 테레사 수녀(1910~1997.9.5)가 그런 사람이었다.
저번 차례에 비쳤듯, 그녀는 다이애너 스펜서가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지 닷새 뒤에 죽었다. 너무 저명한 사람과 비슷한 시기에 죽으면, 어지간히 저명한 사람도 제 죽음을 널리 알리지 못한다.
최근의 예를 들자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작고하기 전날 작고한 연기인 여운계 선생이 그랬다. 여운계 선생의 삶과 죽음은 대중매체에서 널리 조명 받을 만했지만, 전임 대통령의 급작스런 서거라는 그림자에 묻혀버렸다.
그러나 콜카타(캘커타)의 마더 테레사는 그런 불운을 겪지 않았다. 그녀의 명성은 다이애너 스펜서의 그것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그녀의 죽음을 추도했다. 그리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녀를 시복했다.
이 '빈자와 병자의 벗' 스토리는 너무 잘 알려져서, 그녀의 생애를 요약하는 것도 좀 싱겁다. 아니, 단지 너무 잘 알려져서만은 아니다. 그녀의 삶은 단순했다. 굴곡이 없었다.
콜카타의 빈민촌에서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고아들, 부랑자들과 산 것이 그녀 인생(정확히는 반생이라고 해야겠지만)의 거의 전부였다. 그녀의 전기들은 흔히 밋밋하고 지루한 에피소드들로 채워진다. 그 밋밋함과 지루함이 바로 거룩함이었다.
마더 테레사의 본명은 아그네스 본자 보자주다. 아그네스는 잘 알다시피 '어린 양'이라는 뜻이고, '본자'는 알바니아어로 장미꽃봉오리를 뜻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는 어느 나라 사람일까?
그녀가 태어난 곳은 오늘날 마케도니아공화국의 수도인 스코페다. 당시엔 오토만제국의 영토였고, 우스쿱이라 불렸다. 그러나 핏줄로 따지면 그녀는 알바니아인이었다. 그리고 뒷날 인도인으로 귀화해 인도인으로 죽었다.
아인슈타인의 경우에서 보듯, 저명인과 경계인을 겸한 사람은 국적쟁탈전의 표적이 된다. 마더 테레사도 이와 비슷하다. 알바니아도, 마케도니아도, 터키도 그녀를 제 나라 사람이라고 부를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녀가 인도를 제2의 조국으로 삼아 인도인을 자처한 만큼, 인도인으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 하기야 테레사 같은 이에게 국적이 무슨 상관이랴? 그녀의 국적은 하느님 나라였을 것이다.
어린 아그네스가 제 삶을 종교에 바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12세 때였다. 18세 때 아일랜드의 로레토 수녀원으로 들어간 뒤, 그녀는 평생 가족을 만나지 않았다.
그녀가 인도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9세 때인 1929년이었지만, 인도를 삶의 근거지로 삼겠다고 결심한 것은 1946년이었다. 그 즈음 쓴 글에서 그녀는 자신의 선교활동과 자선행위를 '소명 속의 소명'(the call within the call)이라 불렀다.
그녀가 제 근거지를 아일랜드로 삼았다면, 삶은 더 편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나는 수녀원을 떠나 빈자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도와야 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명령이었고, 내가 그 명령을 받드는 데 실패한다면 내 믿음도 깨져버릴 것"이라고 썼다.
그녀는 1950년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설립해 본격적 자선활동에 들어갔다. 1963년에는 '사랑의 선교 수사회'를 만들었다. 선교사로서만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자로서 테레사의 이름은 인도를 넘어서 전세계에 퍼졌다. 1979년에 받은 노벨평화상을 비롯해, 그녀가 각국 정부와 기관으로 받은 상과 감사장은 수도 없이 많다.
20세기 인도에 남자로서 간디가 있었다면, 여자로서는 테레사가 있었다. 그들은 종교도, 성별도, 세대도 달랐지만, 단순함과 평화로움이 거룩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실제로 마더 테레사의 삶은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함께 사는 빈자들, 사생아들, 병자들과 똑같이 먹고 똑같이 잤다.
그러나 간디가 일부 사람들로부터 정당하게 또는 부당하게 비판받았듯, 마더 테레사에게도 정당한 또는 부당한 비판이 날아들곤 했다. 그 비판의 일부는 그녀의 가톨릭적 보수성을 겨눴다. 마더 테레사는 낙태와 이혼을 결코 저질러서는 안 될 죄라 여겼다. 그녀의 주변에 사생아가 몰렸던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또 가난 자체를 타파해야 할 악으로 여기지 않고 하느님에게 가까이 가는 삶의 방식이라 여겼다. 그래서 수녀회에 기부된 돈의 상당 부분은 그녀 주변 사람들의 삶을 물질적으로 개선하는 데 쓰이는 대신 여러 곳에 지부를 만드는 데 쓰였다. 그것은 비판자들로부터 '고통의 신학'이라고 불렸다. 테레사에게 지상의 고통은 하느님의 축복이었기 때문이다.
마더 테레사는 주변의 수녀들에게까지도 '현대적 과학지식'을 '믿음'으로 대치하라고 강요했다. 예컨대 몸이 아파도 도심의 큰 병원에서 치료받는 것이 금지됐다.
선종하기 한 해 전, 그녀가 캘리포니아의 일급 병원에서 치료받기로 결정한 사실은 그녀를 위선자로 보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녀는 또 아이티의 독재자 뒤발리에 가족이나 부패한 사업가들로부터 기부금을 받고 그들을 축복하기까지 했다. 아무튼 그녀는 독선적이었다.
내가 마더 테레사의 삶에서 가장 감동받는 부분은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반생의 헌신이 아니다. 나는 그녀가 죽을 때까지 싸운 '믿음을 향한 투쟁'에 감동한다. 그녀는 사적인 자리에서 여러 번, 그리고 때로는 공적인 자리에서도,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늘어놓았다.
예컨대 그녀는 이렇게 썼다. "내 믿음은 어디 있는가?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도 텅 빔과 어둠밖엔 없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날 용서하시기 바란다. 천국을 생각하려 애써 봐도, 공허함이 엄습하면서 그 생각이 날카로운 칼처럼 되돌아와 내 영혼을 벤다. 이 남모를 고통이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내겐 믿음이 없다.
사랑도 열정도 없다. 내가 뭘 위해 일하고 있는가? 하느님이 없다면, 영혼도 있을 수 없다. 영혼이 없다면, 예수여, 당신은 가짜다." 그녀는 거기서 더 나간다. "예수님은 나를 특별히 사랑하실까? 그러나 나로선,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 커서,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다." 이 거룩한 여성은, 때때로, 나약한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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