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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22> 브레트 애슐리

화이트보스 2010. 3. 22. 21:00

[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22> 브레트 애슐리

바스러질듯한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힘, 쾌락에 빠진 사랑의 망명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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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헨리 킹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에서 간호사 브레트 애슐리 역을 맡은 에바 가드너(왼쪽)와 신문기자 제이크 반스 역의 타이론 파워.‘ 길 잃은 세대’를 상징하는 남녀다.

"당신들은 모두 길 잃은 세대입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장편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1926)의 들머리에 놓인 제사(題詞)다. 거의 평생을 프랑스에서 산 미국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이 처음 발설한 것으로 알려진 '길 잃은 세대'란, 제1차 세계대전 뒤 삶과 역사에 대한 환멸 속에서 유럽(특히 파리)에 살던 한 무리의 미국 작가들을 가리킨다. 헤밍웨이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1920년대 파리는 이들 길 잃은 미국인 청년 예술가들의 둥지였다.

헤밍웨이가 이 말을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의 제사로 삼은 것은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이 죄다 '길 잃은 세대'라는 것을 암시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내가 소설 속의 그 '길 잃은 세대' 사람들을 처음 만난 것은 열다섯 살 때였다.

두 권의 상ㆍ하 문고본으로 편집돼 있던 그 소설을 나는 종로서적에서 선 채로 읽어치웠다. 지금이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종로서적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내 다리 힘이 모자라서 말이다.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는 사춘기 소년이 유럽에 지니고 있던 환상을 극대화했다. 퇴폐와 권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내 10대를 채우고 있던 삶의 에너지였는데,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에 바로 그것이 있었다.
내가 30대 후반을 파리에서 산 것도, 그 근원을 따라 올라가 보면,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에서 얻은 파리 이미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과 엇비슷한 나이였다. 비록 1990년대 파리는 1920년대 파리의 전위적 분위기를 잃었지만.

나는 파리의 거리를 쏘다니면서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의 길 잃은 세대를 생각하곤 했다. 허영심의 수준에서일지라도, 파리에서의 나는 역사와 삶에 대한 환멸을 그들과 공유하고 있었다.

소설에 몇 차례 언급되는 몽파르나스의 카페 '라 로통드'를 나는 자주 들렀다. 나는 그 카페에서 하이네켄에 취해, 과거의 한 때 그 곳에 들렀을 사람들을 상상했다. 길 건너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혀 있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문을 열고 들어올 것도 같았다. 비록 그들은 길을 잃어버린 적이 없지만.

이 소설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여기 등장하는 '길 잃은 세대' 사람들을 짧게 소개해야겠다. 화자 제이크 반스는 신문기자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이었는데, 이탈리아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성 불구자가 되었다.

그는 일 중독자이자 알코올 중독자다. 그는 자신에게 불가능한 섹스 외에 모든 일에 몰두한다. 제이크의 오랜 친구인 빌 고튼 역시 말리지 못할 모주꾼이다.

유대인인 로버트 콘은 프린스턴대학 미들급 복싱 챔피언 출신의 이름없는 작가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 열등감을 느낀다. 제이크 반스, 빌 고튼, 로버트 콘과는 달리 마이클 캠벨은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그리고 오늘 이 글의 대상인 브레트 애슐리의 약혼자다. 제1차 세계대전 때 간호사로 종군한 브레트는 제이크와 함께 이 소설의 실질적 주인공이다. 그 둘이 만난 것은 제이크가 입원한 병원에서였다.

로버트 콘의 애인 프랜시스와 '거리의 여자들'을 비롯한 단역들이 이따금 등장하긴 하지만, 브레트는 이 소설의 유일한 여자다. 브레트라는 항성 둘레를 남자들은 행성처럼 휘돈다.

소설의 서사는 간단하다. 소설 전반부에서 이들 '길 잃은 세대'는 그야말로 길을 잃고 술과 섹스에 탐닉한다. 소설 후반부의 배경은 투우 축제로 유명한 스페인 나바라 주의 주도(州都) 팜플로나다.

이곳에서 브레트 애슐리는 페드로 로메로라는 투우사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 짧은 사랑이 마드리드에서 끝났을 때, 절망에 찬 그녀는 제이크 반스를 애타게 불러대는 전보를 친다.

이 소설에서 직업을 지닌 사람은 제이크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부모 잘 만난 덕에, 또는 친구 잘 만난 덕에 백수로 살아간다. 로버트 콘의 아버지는 뉴욕에서 가장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 속해 있고, 마이클 캠벨 역시 넉넉한 집안 출신이다.

사실 이들에게 직장이 있다면, 이들을 '길 잃은 세대'라 부를 수도 없을 것이다. 이들을 길 잃게 만든 것은 전쟁이다. 소설 속에서 전쟁이 직접 언급되는 일은 거의 없지만, 등장인물들이 공유하는 짙은 허무주의에는 전쟁의 그림자가 황폐하게 드리워져 있다.

유럽 사람들(과 일부 미국인들)이 '아주 커다란 전쟁'(Tres Grande Guerre)이라고 할 때, 이 말이 가리키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이다. 물론 그 규모는 제2차 세계대전이 훨씬 컸지만, 제1차 세계대전을 이미 겪은 유럽인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은 그저 '또 하나의 커다란 전쟁'일 뿐이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그들이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아주 커다란 전쟁'이었다. 그 전쟁이 끝났을 때, 인간의 선함과 고귀함을 믿는 것은 더 이상 어렵게 되었다.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에 등장하는 파리의 미국인들 역시 인간의 선함과 고귀함을 믿지 못한다.

문득문득 우정이 그들을 묶어줄 때도 있지만, 그들은 근원적으로 원자화돼 있다. 허무와 권태와 불안이, 그리고 그것을 채워줄 술과 연애(라기보다는 섹스)가 그들의 양식(糧食)이다. 허랑방탕이 그들의 길이다. 그 잃어버린 길 위에서, 그들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술집을 바꿔가며 마시고 춤춘다.

소설 속에서 브레트 애슐리는 주위 모든 남자들이 욕망하는 대상이다.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제이크말고도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욕망한다. 한마디로, 그녀는 매력적인 여자인 것이다.

브레트 애슐리의 성격과 존재는 이중적이다. 모든 남자들이 그녀에게 이끌리기에 그녀는 그들 위에 군림하지만, 그 남자들 없이 그녀는 살 수 없다. 그녀는 강하면서도 약하다. 남자들은 그녀의 노예이면서 주인이다.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의 등장인물들이 원자화돼 있다고 할 때, 그 전형을 드러내는 것이 브레트다. 그 많은 남자들 틈에서 그녀는 외롭다.

그녀에겐 삶의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에게 섹스는 허무감을 견뎌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혼녀인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 제이크를 두고 마이크와 약혼을 하고, 약혼자 마이크를 두고 제이크의 친구 로버트 콘과 놀아난다. 그녀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에서 작가는 섹스 장면을 묘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브레트 애슐리가 일상적으로 아무 남자와 하는 섹스를 수없이 암시한다. 그녀는 '해방된 여자'인 것이다.

주변의 어떤 남자들보다도 성적으로 더 자유분방한 여자가 브레트다. 섹스가 '직업'이 아니라는 점을 제외하면, 그녀의 삶은 매춘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런 일상적 '난교'가 그녀의 허기를 채워주지는 못한다. 그 이유 가운데 큰 것 하나는 섹스의 대상이 제이크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그들은 같이 살 수도 있고, 결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제이크는 브레트와 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뜻을 브레트에게 비친다. 그러나 브레트는 거절한다. 섹스 없는 삶을 그녀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바스러질 듯한 삶을 겨우겨우 지탱해 주는 것이 그녀의 '해방된 섹스'다.

스페인 팜플로나의 투우 축제에서 만난 투우사 페드로 로메로와의 짧은 사랑은 브레트에게 가장 격정적인 사랑이었을 것이다. 페드로 로메로는 제 정열을 남김없이 브레트에게 건넨다. 그는 자립적이고 검질기며 헌신적이다.

그는 제이크와 달리 '길 잃은 세대'가 아니다. 그러나 그 사랑도 파탄한다. 브레트의 자의식 때문이다. 팜플로나에 제이크도 약혼자도 버려두고 사랑의 도피를 한 뒤에야, 그 건장한 투우사 로메로가 불과 열아홉 살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을 '구원'하러 마드리드의 호텔 방으로 찾아온 제이크와 술을 마시며 브레트가 말한다. "추잡한 여자가 되지 말자고 작정하니까 기분이 훨씬 좋아졌어. 그게 바로 하느님 대신 우리가 갖고 있는 거겠지." 제이크가 대꾸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을 갖고 있지."

나는 문득 지금 이곳이 1920년대의 파리나 팜플로나라고 상상한다. 사람들의 마음은 '아주 커다란 전쟁'이 할퀸 자국으로 흉흉하다. 나는 내가 30대 중반의 여자라고 상상해 본다. 브레트 애슐리라고, 중년에 접어든 사랑의 망명객, 사랑의 떠돌이라고 상상해본다.

내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녀를 처음 만났던 10대 중반에, 나는 그녀를 이해했었다(고 기억된다). 허무와 퇴폐는 사춘기의 가장 아름다운 장신구이므로. 길 잃은 시절의 가장 정확한 나침반이므로. 최근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