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23> 마리 블롱도
피로 물든 산사나무 꽃과 함께 진 메이데이 요정이여
1891년 5월 1일 프랑스 푸르미 지방서
살인적 노동 항의 시위 앞장선 18세 소녀
부르주아 군대의 총탄에 꽃같은 청춘 마감
세계 모든 노동자들의 기념일 선포 기폭제로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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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 철학 교사 크리스토프 라무르는 <걷기의 철학>이라는 작은 책의 한 챕터에 '시위'라는 표제를 붙였다. "걷기는 정치적일 수 있다. 우리는 자기 권리와 사상,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특정한 정치적 결정과 그것을 채택한 사람들에 대한 거부 의사, 분노, 적대감을 표현하기 위해 걸을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라무르의 짤막한 정의에 따르면, 시위는 '발로 하는 투표'다.
이 발로 하는 투표를, 제도 권력이 팔짱을 끼고 보고만 있지는 않는다. 제도 권력은 자신의 원칙, 가치관 그리고 고유의 권한 따위가 도전받고 있다고 느낄수록 시위에 난폭하게 대응한다. 그리고 자신의 존속에 위협적이라 판단되는 움직임을 씨앗부터 말려 죽이려는 경향이 있다.
정치적 걷기와 제도 권력이 부딪치는 양상은 체제마다 다르다.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해 일어난 촛불시위와 이에 대한 공권력의 대처 방식은 시민들에게 이 정권이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지 짐작하게 해 주었다.
라무르는 이 챕터의 끝머리에서, 1891년 5월1일(메이데이ㆍ국제노동절) 프랑스 노르 지방의 푸르미라는 소도시를 피로 물들인 시위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그 시위 도중 군인의 발포로 죽은 마리 블롱도라는 제사(製絲) 노동자를 거론한다. 그녀가 오늘 이 글의 주인공이다.
이 발로 하는 투표를, 제도 권력이 팔짱을 끼고 보고만 있지는 않는다. 제도 권력은 자신의 원칙, 가치관 그리고 고유의 권한 따위가 도전받고 있다고 느낄수록 시위에 난폭하게 대응한다. 그리고 자신의 존속에 위협적이라 판단되는 움직임을 씨앗부터 말려 죽이려는 경향이 있다.
정치적 걷기와 제도 권력이 부딪치는 양상은 체제마다 다르다.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해 일어난 촛불시위와 이에 대한 공권력의 대처 방식은 시민들에게 이 정권이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지 짐작하게 해 주었다.
라무르는 이 챕터의 끝머리에서, 1891년 5월1일(메이데이ㆍ국제노동절) 프랑스 노르 지방의 푸르미라는 소도시를 피로 물들인 시위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그 시위 도중 군인의 발포로 죽은 마리 블롱도라는 제사(製絲) 노동자를 거론한다. 그녀가 오늘 이 글의 주인공이다.
마리 블롱도라는 여자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 시기의 푸르미 경찰 문서를 뒤져보면 그녀의 삶에 대해 무언가를 더 알 수 있을지 모르나, 내가 접한 문헌들에선 이 여자의 삶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마리 블롱도는 1891년 '푸르미 학살'의 상징이고, 라무르에 따르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걷는' 모든 사람의 상징이다.
1886년 5월1일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미국 시카고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인 데서 비롯된 메이데이는 즉각 전세계에 퍼지지 못했다. 1891년 푸르미 시위도 미국 바깥에서 벌어진 첫 번째 메이데이 기념 시위였다. 그 당시 미국이나 유럽 노동자들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최저 10시간에서 최고 16시간을 넘었다.
1848년 2월혁명 뒤 10시간 노동제가 '법적으로' 확립된 프랑스에서도 이 법령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이었을 19세기 말 프랑스에서조차, 일주일에 60시간 이하로 일하는 노동자는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푸르미 시위는 대서양 건너편 노동자 동지들의 이니셔티브에 격려돼 프랑스에서도 8시간 노동제(주간 48시간 노동제)를 관철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조직됐다.
시위는 완전히 평화로웠다. 뒷날 이 시위의 상징이 된 마리 블롱도는 온통 흰색 옷을 입고 산사나무꽃을 한 아름 들고 걸었다. 그런데 프랑스의 '민주주의' 정부와 '너그러운' 부르주아는 군대를 동원해 이들에게 발포토록 했다.
모두 10명이 죽었는데, 이들 모두가 시위대는 아니었다. 총알은 시위자와 방관자를 구별할 수 없었다. 9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1명은 그 이튿날 쇼크사했다. 그리고 35명이 부상을 입었다. 단 몇 초 동안에 69발의 총탄이 불을 뿜으며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피살자 다수는 미성년자였다. 이 때 죽은 이들을 추념하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나열하련다.
마리 블롱도(18), 펠리시 톤리에(17), 에밀 코르나유(10), 클레베르 질로토(19), 루이즈 위블레(20), 마리 디오(17), 샤를 르루아(21), 귀스타브 페스티오(17), 에밀 스고(30), 카미유 라투르(46).
이 가운데 에밀 스고, 귀스타브 페스티오, 에밀 코르나유, 카미유 라투르는 시위대가 아니었다. 카미유 라투르는 현장에서 죽지 않고 그 이튿날 작고했다. 신앙심 깊은 펠리시 톤리에는 (수녀들이 가슴에 드리우는) 스카풀라리오를 걸치고 있었고, 애국심에 불탔던 클레베르 질로토는 삼색기를 흔들고 있었다. 이들의 이마를, 가슴을, 배를 총알은 사정없이 꿰뚫었다.
마리 블롱도가 이 날 시위와 학살의 상징이 된 것은 그녀가 시위대의 맨 앞에서 걸었고, 맨 먼저 사살됐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 학살에 책임지지 않았다.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부르주아지는 이 날 학살을 저항적 노동자들에게 주는 교훈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이들의 영결식에선 3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관을 따랐고, 사건의 반향은 국경 너머까지 일었다. 푸르미 시위 덕분에 노동절(메이데이)은 미국만의 노동절이 아니라 국제노동절이 되었다. 이 학살 직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이 이 날을 세계 모든 노동자들의 기념일로 선포했기 때문이다.
물론 8시간 노동제가 즉각 정착되지는 않았다. 그것이 국제규범으로 인정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지은 베르사유 조약이 그 247조에서 하루 8시간 일주일 48시간 노동제를 규정한 뒤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선언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한 세기 동안, 세계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를 위해 때로는 평화적으로, 때로는 피를 흘려가며 자본계급과 싸워야 했다.
일주일 40시간 노동제가 널리 퍼져있는 오늘날에도, 지구 이 구석 저 모퉁이에는 19세기 말 프랑스 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비참하게 일하는 노동자들이 많다. 그 가운데는 어린이 노동자들이 적지 않고, 노예노동에 가까운 관행도 아직 남아 있다. 이 '노동의 종말' 시대에도 여전히 우리들에게 국제노동절이 필요한 이유다.
마리 블롱도의 죽음 이전에든 이후에든 노동절에는 흔히 피비린내가 배곤 했다. 노동절을 탄생시킨 1886년 미국 노동자들의 시위 자체가 피로 흥건했다. 5월3일 시카고 시위에서 노동자 3명이 살해됐고, 4일 시위에서 의문의 폭파 사고가 터진 뒤 노동자 5명이 처형되고 3명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미국 바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리 블롱도의 조국 프랑스에서는, 1908년 파리 남쪽 교외 드라베유의 노동절 평화시위에서 4명의 노동자가 죽음으로 몰렸다. 유혈사태가 벌어졌든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든, 5월1일은 노동자와 자본가계급 모두에게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역사는 5월1일을 외면할 수 없었다. 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가 처음 5월1일을 휴일로 정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얄궂게도 나치 독일이었다. 히틀러는 1933년 이 날을 유급 휴일로 선포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페탱 정부도 히틀러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이 두 파시스트 정부의 노동절 기념은 '노사 화합'에 강조점을 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노동자들의 진정한 축제일로 메이데이가 유급 휴일이 된 것은 1947년 4월 들어서였다. 그 뒤, 사회주의권 나라에서만이 아니라,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5월1일은 유급 휴일이 되었다.
1890년대 프랑스 노동자들은 메이데이 시위 때 저고리 단추구멍에 붉은빛 세모 장식을 했다. 그 삼각형은 하루가 제가끔 여덟 시간씩의 노동과 수면, 여가로 나뉜다는 표지였다. 유럽에선 노동절에 친구나 애인들끼리 꽃을 주고받는 관습이 있다.
그것은 노동절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과거부터 5월1일이면 유럽인들이 실천했던 습관인데, 1891년 푸르미 학살 때 마리 블롱도가 팔 가득히 꽃을 들고 행진했다는 사실이 포개져 그 뒤 더욱 유행을 타게 됐다. 유럽인들은 이 날 꽃을 저고리에 꽂거나 지인에게 선물했다.
처음엔 특정한 꽃이 아니었다. 마리 블롱도가 안고 있던 산사나무꽃을 주고받기도 했고, 들장미꽃이 유행한 적도 있다. 1907년께부터 파리에서는 은방울꽃이 들장미꽃을 대체했다. 은방울꽃은 파리를 품고 있는 일드프랑스주(州)에 봄이 왔다는 상징이었다. 파리 사람들은 이 날 은방울꽃을 붉은 리본에 매어 저고리 단추 구멍에 매달고 다녔다.
그리고 이 풍습은 이웃 나라들로 퍼져나갔다. 오늘날, 메이데이에 은방울꽃을 저고리에 달고 다니는 관습은 거의 사라진 듯하다. 그러나 지인들끼리 주고받는 관습은 여전히 남아 있다.
서양 풍속을 꼭 따라야 할 것은 없겠으나, 우리도 메이데이에 가족이나 애인이나 친구들끼리 꽃을 주고받아도 좋을 것 같다. 작약이든, 붓꽃이든, 철쭉이든 말이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노동자계급이 분열하면서, 오늘날 메이데이 시위는 보기 힘들어진 것 같다. 그러나 '시위'라는 걷기가 메이데이와만 연결돼 있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토프 라무르가 지적했듯, 걷기는 정치적일 수 있고, 시위는 발로 하는 투표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유로 촛불집회를 할 때든 거리행진을 할 때든, 우리들은 역사상의 수많은 정치적 걷기를 잇고 있는 것이다. 그 때, 우리보다 앞서 이런 정치적 걷기를 실천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떠올려 보자. 그 이름들 가운데 마리 블롱도라는 이름도 한 번 끼워줘 보자.
1886년 5월1일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미국 시카고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인 데서 비롯된 메이데이는 즉각 전세계에 퍼지지 못했다. 1891년 푸르미 시위도 미국 바깥에서 벌어진 첫 번째 메이데이 기념 시위였다. 그 당시 미국이나 유럽 노동자들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최저 10시간에서 최고 16시간을 넘었다.
1848년 2월혁명 뒤 10시간 노동제가 '법적으로' 확립된 프랑스에서도 이 법령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이었을 19세기 말 프랑스에서조차, 일주일에 60시간 이하로 일하는 노동자는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푸르미 시위는 대서양 건너편 노동자 동지들의 이니셔티브에 격려돼 프랑스에서도 8시간 노동제(주간 48시간 노동제)를 관철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조직됐다.
시위는 완전히 평화로웠다. 뒷날 이 시위의 상징이 된 마리 블롱도는 온통 흰색 옷을 입고 산사나무꽃을 한 아름 들고 걸었다. 그런데 프랑스의 '민주주의' 정부와 '너그러운' 부르주아는 군대를 동원해 이들에게 발포토록 했다.
모두 10명이 죽었는데, 이들 모두가 시위대는 아니었다. 총알은 시위자와 방관자를 구별할 수 없었다. 9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1명은 그 이튿날 쇼크사했다. 그리고 35명이 부상을 입었다. 단 몇 초 동안에 69발의 총탄이 불을 뿜으며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피살자 다수는 미성년자였다. 이 때 죽은 이들을 추념하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나열하련다.
마리 블롱도(18), 펠리시 톤리에(17), 에밀 코르나유(10), 클레베르 질로토(19), 루이즈 위블레(20), 마리 디오(17), 샤를 르루아(21), 귀스타브 페스티오(17), 에밀 스고(30), 카미유 라투르(46).
이 가운데 에밀 스고, 귀스타브 페스티오, 에밀 코르나유, 카미유 라투르는 시위대가 아니었다. 카미유 라투르는 현장에서 죽지 않고 그 이튿날 작고했다. 신앙심 깊은 펠리시 톤리에는 (수녀들이 가슴에 드리우는) 스카풀라리오를 걸치고 있었고, 애국심에 불탔던 클레베르 질로토는 삼색기를 흔들고 있었다. 이들의 이마를, 가슴을, 배를 총알은 사정없이 꿰뚫었다.
마리 블롱도가 이 날 시위와 학살의 상징이 된 것은 그녀가 시위대의 맨 앞에서 걸었고, 맨 먼저 사살됐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 학살에 책임지지 않았다.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부르주아지는 이 날 학살을 저항적 노동자들에게 주는 교훈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이들의 영결식에선 3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관을 따랐고, 사건의 반향은 국경 너머까지 일었다. 푸르미 시위 덕분에 노동절(메이데이)은 미국만의 노동절이 아니라 국제노동절이 되었다. 이 학살 직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이 이 날을 세계 모든 노동자들의 기념일로 선포했기 때문이다.
물론 8시간 노동제가 즉각 정착되지는 않았다. 그것이 국제규범으로 인정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지은 베르사유 조약이 그 247조에서 하루 8시간 일주일 48시간 노동제를 규정한 뒤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선언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한 세기 동안, 세계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를 위해 때로는 평화적으로, 때로는 피를 흘려가며 자본계급과 싸워야 했다.
일주일 40시간 노동제가 널리 퍼져있는 오늘날에도, 지구 이 구석 저 모퉁이에는 19세기 말 프랑스 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비참하게 일하는 노동자들이 많다. 그 가운데는 어린이 노동자들이 적지 않고, 노예노동에 가까운 관행도 아직 남아 있다. 이 '노동의 종말' 시대에도 여전히 우리들에게 국제노동절이 필요한 이유다.
마리 블롱도의 죽음 이전에든 이후에든 노동절에는 흔히 피비린내가 배곤 했다. 노동절을 탄생시킨 1886년 미국 노동자들의 시위 자체가 피로 흥건했다. 5월3일 시카고 시위에서 노동자 3명이 살해됐고, 4일 시위에서 의문의 폭파 사고가 터진 뒤 노동자 5명이 처형되고 3명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미국 바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리 블롱도의 조국 프랑스에서는, 1908년 파리 남쪽 교외 드라베유의 노동절 평화시위에서 4명의 노동자가 죽음으로 몰렸다. 유혈사태가 벌어졌든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든, 5월1일은 노동자와 자본가계급 모두에게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역사는 5월1일을 외면할 수 없었다. 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가 처음 5월1일을 휴일로 정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얄궂게도 나치 독일이었다. 히틀러는 1933년 이 날을 유급 휴일로 선포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페탱 정부도 히틀러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이 두 파시스트 정부의 노동절 기념은 '노사 화합'에 강조점을 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노동자들의 진정한 축제일로 메이데이가 유급 휴일이 된 것은 1947년 4월 들어서였다. 그 뒤, 사회주의권 나라에서만이 아니라,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5월1일은 유급 휴일이 되었다.
1890년대 프랑스 노동자들은 메이데이 시위 때 저고리 단추구멍에 붉은빛 세모 장식을 했다. 그 삼각형은 하루가 제가끔 여덟 시간씩의 노동과 수면, 여가로 나뉜다는 표지였다. 유럽에선 노동절에 친구나 애인들끼리 꽃을 주고받는 관습이 있다.
그것은 노동절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과거부터 5월1일이면 유럽인들이 실천했던 습관인데, 1891년 푸르미 학살 때 마리 블롱도가 팔 가득히 꽃을 들고 행진했다는 사실이 포개져 그 뒤 더욱 유행을 타게 됐다. 유럽인들은 이 날 꽃을 저고리에 꽂거나 지인에게 선물했다.
처음엔 특정한 꽃이 아니었다. 마리 블롱도가 안고 있던 산사나무꽃을 주고받기도 했고, 들장미꽃이 유행한 적도 있다. 1907년께부터 파리에서는 은방울꽃이 들장미꽃을 대체했다. 은방울꽃은 파리를 품고 있는 일드프랑스주(州)에 봄이 왔다는 상징이었다. 파리 사람들은 이 날 은방울꽃을 붉은 리본에 매어 저고리 단추 구멍에 매달고 다녔다.
그리고 이 풍습은 이웃 나라들로 퍼져나갔다. 오늘날, 메이데이에 은방울꽃을 저고리에 달고 다니는 관습은 거의 사라진 듯하다. 그러나 지인들끼리 주고받는 관습은 여전히 남아 있다.
서양 풍속을 꼭 따라야 할 것은 없겠으나, 우리도 메이데이에 가족이나 애인이나 친구들끼리 꽃을 주고받아도 좋을 것 같다. 작약이든, 붓꽃이든, 철쭉이든 말이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노동자계급이 분열하면서, 오늘날 메이데이 시위는 보기 힘들어진 것 같다. 그러나 '시위'라는 걷기가 메이데이와만 연결돼 있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토프 라무르가 지적했듯, 걷기는 정치적일 수 있고, 시위는 발로 하는 투표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유로 촛불집회를 할 때든 거리행진을 할 때든, 우리들은 역사상의 수많은 정치적 걷기를 잇고 있는 것이다. 그 때, 우리보다 앞서 이런 정치적 걷기를 실천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떠올려 보자. 그 이름들 가운데 마리 블롱도라는 이름도 한 번 끼워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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