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25> 프랑수아즈 지루 - 어떤 '프렌치 드림'
"중요한 건 운이었다" … 하는 일마다 성공을 거둔 신데렐라
터키 망명 정객의 딸로 프랑스에 정착
20대 이후 우연히 유명인들과 인연
'엘'의 창간 편집인과 문화장관 거쳐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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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계나 영화계에서 성공하려면 뭐가 필요하죠?"
만년의 프랑수아즈 지루(1916~2003)에게 젊은이들이 묻곤 했단다. 지루의 대답은 이랬다. "노력과 운과 재능이죠. 셋 가운데 하나라도 부족하면 제자리걸음을 하게 될 거예요."
사실 이 대답은 핵심적이면서도 너무 평범하다. 그리고 그것이 꼭 언론계나 영화계에만 들어맞는 말은 아닐 것이다. 지루가 뭔가를 크게 이룩한 분야가 언론계와 영화계여서, 젊은이들이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게다가 재능이라는 것도 결국 운에 속하지 않을까? 그것은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타고나는 것이니 말이다. 심지어 노력이라는 것도. 노력할 수 있는 성격(이를테면 끈기) 역시 상당 부분 타고나는 것이니. 흔히 동아시아에서 발설되는, 재주보다 센 것이 덕이고, 덕보다 센 것이 복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만년의 프랑수아즈 지루(1916~2003)에게 젊은이들이 묻곤 했단다. 지루의 대답은 이랬다. "노력과 운과 재능이죠. 셋 가운데 하나라도 부족하면 제자리걸음을 하게 될 거예요."
사실 이 대답은 핵심적이면서도 너무 평범하다. 그리고 그것이 꼭 언론계나 영화계에만 들어맞는 말은 아닐 것이다. 지루가 뭔가를 크게 이룩한 분야가 언론계와 영화계여서, 젊은이들이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게다가 재능이라는 것도 결국 운에 속하지 않을까? 그것은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타고나는 것이니 말이다. 심지어 노력이라는 것도. 노력할 수 있는 성격(이를테면 끈기) 역시 상당 부분 타고나는 것이니. 흔히 동아시아에서 발설되는, 재주보다 센 것이 덕이고, 덕보다 센 것이 복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복을 타고난 사람, 즉 운을 타고난 사람에겐 당할 재주가 없는 것이다. 이러다간 '팔자주의자(八字主義者)'의 넋두리처럼 될 염려가 있으니, '운'이라는 것의 오지랖에 대해선 이쯤 얘기를 멈추자.
그러려고 했더니, 지루의 또 다른 말이 떠오른다. "운을 잡아채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지나가는 순간에 단번에 올라타야 하는 야생마다. 돌이켜보면, 내 직업생활에는 언제나 운이 따랐다. 사랑하는 아르튀르…" '아르튀르'는 자신의 (직업적) 운에 지루가 붙인 이름이다. 일종의 수호천사라 할까?
한국에 <나는 행복하다>(신선영 옮김ㆍ열림원 발행)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프랑수아즈 지루 자서전의 원제가 <아르튀르, 또는 삶의 행복>(Arthur, ou, le bonheur de vivre)이다. 그 제목에선, 자신이 재능과 노력만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을 거라는 겸손함이 묻어난다. 그런데 사실, 이 자서전의 전체 분위기는 좀 젠체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자부심에 차 있다.
그녀는 아르튀르(다시 말해 운) 못지않게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팔자주의자'에 따르면 그 재능이나 노력조차 그녀의 아르튀르겠지만.
어디까지가 프랑수아즈 지루의 '아르튀르'였든, 그녀의 삶은 '프렌치 드림'이라고 부를 만한 것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어떤 개그 프로 때문에 요즘은 농담이 된,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언(聖言)을 지루만큼 눈부시게 보여준 여자도 없다.
프랑수아즈 지루는 스위스 로잔에서 망명 정객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스만제국(터키)의 전신국을 이끌던 정치 거물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중 터키가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에 가담하는 걸 반대하다 일급 국사범이 돼 스위스로 몸을 피했다. 어머니는 유대인이었다. 스위스를 거쳐 그들 가족이 프랑스에 정착했을 때, 터키에 살던 때의 유복함은 희미한 옛 세월의 그림자였다.
어린 프랑수아즈에게 아버지의 나라 터키는 외국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이 태어난 스위스의 기억도 거의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프랑스인이 되었다. 삶을 성공적으로 이뤄낸 뒤 쓴 자서전이어서 그렇겠지만, 이 책에서 지루가 드러내는 '프랑스 애호'는 듣기 거북할 만큼 짙다.
"프랑스… 이 단어가 당시에 한 외국인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 내 가슴을 얼마나 사랑과 숭배와 감사로 충만하게 했는지, 요즘 사람들은 짐작도 못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주 어릴 적에 물려받은 마음의 재산으로, 지금까지도 나는 매순간 프랑스에서 살아가는 행복을 절감하고 있다. (중략)
내 유년의 프랑스는 죽었다. 망가지고 훼손되고 '코카콜라화'돼 버렸다. (중략) 하지만 그 무엇도 삶의 행복이 프랑스에만 존재한다는 내 생각을 결코 바꾸지 못할 것이다. 비록 그 행복이 프랑스 곳곳에 평등하게 분배되어 있지는 않더라도."
그녀는 비록 '그루터기 프랑스인'은 아니었지만,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를 미친 듯 사랑했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했다. 그것이 늘 보기 좋지만은 않다. 때로는 안쓰럽기도 하다. 아니, 이 말은 취소해야겠다. 안쓰럽다니. 중년 이후 프랑스 영화계와 언론계를 쥐락펴락하고 더 나아가 정계의 거물이 된 여자에게 안쓰러움을 느끼는 것은 내 분수를 한참 넘기는 짓이다.
'프랑스인' 프랑수아즈 지루의 삶이 화려하게 출발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의사가 되고 싶었으나, 가난 때문에 열여섯 살 때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그리고 학원에서 타자속기술을 배웠다. 그녀의 첫 직장은 서점이었다. 만년의 지루는 그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
학교에서 떨려난 그녀를 계속 지식 공간에 머물게 해준 것이 첫 직장이었으므로. 그녀의 '아르튀르'는 처음부터 그녀 삶에 대한 계획을 짜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계획 속에서, 지루는 프랑스 지식인 예술가 사회(더 넓게는 명망가 사회) 한복판에 자리잡게 돼 있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거미줄 같은 연줄 속에서 신분 상승을 이뤘다.
지루의 자서전을 읽다보면, 그녀가 20대 이후 얼마나 많은 '유명인'들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지 깨닫고 기이한 생각이 들게 된다. 물론 그 사람들은 거의 다 프랑스인이었다. 다시 말해 언젠가 이 자리에서 다룬 오리아나 팔라치가 만난, 수많은 국제적 거물들보다는 명성이나 권력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오리아나 팔라치가 만난 사람들이 대개 그녀의 인터뷰이에 불과했다면, 지루가 만난 명망가들은 그녀의 인터뷰이이자, 후원자이자, 친구이자, 매우 드물게는 연인이었다. 그들이 지루의 수많은 '아르튀르'가 되었다.
마르셀 파뇰 원작의 영화 '파니'의 스크립터로 영화계에 데뷔할 때부터 그녀는 '아르튀르'들에게 둘러싸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다가 게슈타포의 감옥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적도 있지만, 그 때도 '아르튀르'가 그녀를 도왔다.
해방 이후 여성 잡지 '엘'(Elle)의 창간 편집인이 됐을 때, 그리고 애인 장-자크 세르방-슈레베르와 함께 시사주간지 '렉스프레스'(l'Express)를 창간해 편집인과 발행인으로 이 잡지를 이끌었을 때, '아르튀르'는 그녀에게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언젠가 이 잡지에서 일군의 젊은 영화인들을 커버스토리로 다루며 그 특집에 '누벨 바그'(Nouvelle Vagueㆍ새 물결)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 말은 그 뒤 영화사(映畵史)가 누락시킬 수 없는 용어가 되었다. 뒷날 주인이 바뀐 '렉스프레스'는 오늘날 중도우파 성향을 띠고 있지만, 창간 당시엔 지루의 정치적 이념에 맞는 좌파 잡지였고, 그래서 드골 정권과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사실 이념적 인간으로서 지루의 정치적 행로에는 다소 기묘한 데가 있었다. 그녀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자신이 '좌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1974년 대선에서 그녀가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후보 지지를 공언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이 선거에서 미테랑은 중도파 정당 연합체인 UDF의 후보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에게 석패했다. 그런데 지스카르는 지루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걸 넘어, 발탁했다. 그래서 그녀는 (총리) 자크 시라크 내각에서 신설된 여성부의 첫 장관이 되었고, 그 다음 내각인 레몽 바르 내각에서는 문화부 장관을 맡았다.
특히 여성부 장관으로서, 지루는 소위 '여성을 위한 101개 조처'를 내걸고 프랑스 사회의 성차별을 시정하는데 온힘을 쏟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프랑스는 소위 '서유럽 선진국'으로서는 여성의 권리가 상대적으로 뒤처진 나라였다.
지루가 정계에서 언론계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잡지였던 '렉스프레스'는 제임스 골드스미스라는 영국인에게 팔려 있었다. 새 주필인 우파 사회학자 레몽 아롱은 그녀가 '렉스프레스'에 다시 합류하는 걸 반대했다. 그러나 '아르튀르'는 여전히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초년 기자 때부터의 친구였던 장 다니엘이 1983년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le Nouvel Observateur)의 논설위원으로 그녀를 초빙했다. 장 다니엘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창간인이었고(지금도 매주 논설을 쓴다), 이 잡지는 좌파 색채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루로서는 차라리 다행이었던 셈이다.
그녀는 이 잡지에 20년 동안, 다시 말해 작고할 때까지 글을 썼다. 그녀가 만년의 정열을 저널리즘에만 쏟아 부은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 동안에도 영화제작자로서, 전기작가로서, 소설가로서 성공적 삶을 이어갔다.
정계에선 최고 권력자 프랑수아 미테랑이 그녀의 벗 노릇을 해 주었다. 미테랑은 자기와 동갑인 이 오래된 친구를 각료로 발탁하지는 않았으나, 이런저런 모임에 수시로 초대했고, 해외를 방문할 때면 곧잘 함께 가자고 요청했다.
지루가 사적인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현역 저널리스트였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아르튀르'는 마지막까지 그녀를 수호했다. 삶의 행복이 프랑스에만 존재한다는 그녀의 생각은, 그녀 자신에 관한 한, 옳았다.
그러려고 했더니, 지루의 또 다른 말이 떠오른다. "운을 잡아채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지나가는 순간에 단번에 올라타야 하는 야생마다. 돌이켜보면, 내 직업생활에는 언제나 운이 따랐다. 사랑하는 아르튀르…" '아르튀르'는 자신의 (직업적) 운에 지루가 붙인 이름이다. 일종의 수호천사라 할까?
한국에 <나는 행복하다>(신선영 옮김ㆍ열림원 발행)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프랑수아즈 지루 자서전의 원제가 <아르튀르, 또는 삶의 행복>(Arthur, ou, le bonheur de vivre)이다. 그 제목에선, 자신이 재능과 노력만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을 거라는 겸손함이 묻어난다. 그런데 사실, 이 자서전의 전체 분위기는 좀 젠체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자부심에 차 있다.
그녀는 아르튀르(다시 말해 운) 못지않게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팔자주의자'에 따르면 그 재능이나 노력조차 그녀의 아르튀르겠지만.
어디까지가 프랑수아즈 지루의 '아르튀르'였든, 그녀의 삶은 '프렌치 드림'이라고 부를 만한 것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어떤 개그 프로 때문에 요즘은 농담이 된,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언(聖言)을 지루만큼 눈부시게 보여준 여자도 없다.
프랑수아즈 지루는 스위스 로잔에서 망명 정객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스만제국(터키)의 전신국을 이끌던 정치 거물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중 터키가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에 가담하는 걸 반대하다 일급 국사범이 돼 스위스로 몸을 피했다. 어머니는 유대인이었다. 스위스를 거쳐 그들 가족이 프랑스에 정착했을 때, 터키에 살던 때의 유복함은 희미한 옛 세월의 그림자였다.
어린 프랑수아즈에게 아버지의 나라 터키는 외국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이 태어난 스위스의 기억도 거의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프랑스인이 되었다. 삶을 성공적으로 이뤄낸 뒤 쓴 자서전이어서 그렇겠지만, 이 책에서 지루가 드러내는 '프랑스 애호'는 듣기 거북할 만큼 짙다.
"프랑스… 이 단어가 당시에 한 외국인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 내 가슴을 얼마나 사랑과 숭배와 감사로 충만하게 했는지, 요즘 사람들은 짐작도 못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주 어릴 적에 물려받은 마음의 재산으로, 지금까지도 나는 매순간 프랑스에서 살아가는 행복을 절감하고 있다. (중략)
내 유년의 프랑스는 죽었다. 망가지고 훼손되고 '코카콜라화'돼 버렸다. (중략) 하지만 그 무엇도 삶의 행복이 프랑스에만 존재한다는 내 생각을 결코 바꾸지 못할 것이다. 비록 그 행복이 프랑스 곳곳에 평등하게 분배되어 있지는 않더라도."
그녀는 비록 '그루터기 프랑스인'은 아니었지만,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를 미친 듯 사랑했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했다. 그것이 늘 보기 좋지만은 않다. 때로는 안쓰럽기도 하다. 아니, 이 말은 취소해야겠다. 안쓰럽다니. 중년 이후 프랑스 영화계와 언론계를 쥐락펴락하고 더 나아가 정계의 거물이 된 여자에게 안쓰러움을 느끼는 것은 내 분수를 한참 넘기는 짓이다.
'프랑스인' 프랑수아즈 지루의 삶이 화려하게 출발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의사가 되고 싶었으나, 가난 때문에 열여섯 살 때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그리고 학원에서 타자속기술을 배웠다. 그녀의 첫 직장은 서점이었다. 만년의 지루는 그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
학교에서 떨려난 그녀를 계속 지식 공간에 머물게 해준 것이 첫 직장이었으므로. 그녀의 '아르튀르'는 처음부터 그녀 삶에 대한 계획을 짜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계획 속에서, 지루는 프랑스 지식인 예술가 사회(더 넓게는 명망가 사회) 한복판에 자리잡게 돼 있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거미줄 같은 연줄 속에서 신분 상승을 이뤘다.
지루의 자서전을 읽다보면, 그녀가 20대 이후 얼마나 많은 '유명인'들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지 깨닫고 기이한 생각이 들게 된다. 물론 그 사람들은 거의 다 프랑스인이었다. 다시 말해 언젠가 이 자리에서 다룬 오리아나 팔라치가 만난, 수많은 국제적 거물들보다는 명성이나 권력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오리아나 팔라치가 만난 사람들이 대개 그녀의 인터뷰이에 불과했다면, 지루가 만난 명망가들은 그녀의 인터뷰이이자, 후원자이자, 친구이자, 매우 드물게는 연인이었다. 그들이 지루의 수많은 '아르튀르'가 되었다.
마르셀 파뇰 원작의 영화 '파니'의 스크립터로 영화계에 데뷔할 때부터 그녀는 '아르튀르'들에게 둘러싸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다가 게슈타포의 감옥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적도 있지만, 그 때도 '아르튀르'가 그녀를 도왔다.
해방 이후 여성 잡지 '엘'(Elle)의 창간 편집인이 됐을 때, 그리고 애인 장-자크 세르방-슈레베르와 함께 시사주간지 '렉스프레스'(l'Express)를 창간해 편집인과 발행인으로 이 잡지를 이끌었을 때, '아르튀르'는 그녀에게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언젠가 이 잡지에서 일군의 젊은 영화인들을 커버스토리로 다루며 그 특집에 '누벨 바그'(Nouvelle Vagueㆍ새 물결)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 말은 그 뒤 영화사(映畵史)가 누락시킬 수 없는 용어가 되었다. 뒷날 주인이 바뀐 '렉스프레스'는 오늘날 중도우파 성향을 띠고 있지만, 창간 당시엔 지루의 정치적 이념에 맞는 좌파 잡지였고, 그래서 드골 정권과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사실 이념적 인간으로서 지루의 정치적 행로에는 다소 기묘한 데가 있었다. 그녀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자신이 '좌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1974년 대선에서 그녀가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후보 지지를 공언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이 선거에서 미테랑은 중도파 정당 연합체인 UDF의 후보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에게 석패했다. 그런데 지스카르는 지루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걸 넘어, 발탁했다. 그래서 그녀는 (총리) 자크 시라크 내각에서 신설된 여성부의 첫 장관이 되었고, 그 다음 내각인 레몽 바르 내각에서는 문화부 장관을 맡았다.
특히 여성부 장관으로서, 지루는 소위 '여성을 위한 101개 조처'를 내걸고 프랑스 사회의 성차별을 시정하는데 온힘을 쏟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프랑스는 소위 '서유럽 선진국'으로서는 여성의 권리가 상대적으로 뒤처진 나라였다.
지루가 정계에서 언론계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잡지였던 '렉스프레스'는 제임스 골드스미스라는 영국인에게 팔려 있었다. 새 주필인 우파 사회학자 레몽 아롱은 그녀가 '렉스프레스'에 다시 합류하는 걸 반대했다. 그러나 '아르튀르'는 여전히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초년 기자 때부터의 친구였던 장 다니엘이 1983년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le Nouvel Observateur)의 논설위원으로 그녀를 초빙했다. 장 다니엘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창간인이었고(지금도 매주 논설을 쓴다), 이 잡지는 좌파 색채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루로서는 차라리 다행이었던 셈이다.
그녀는 이 잡지에 20년 동안, 다시 말해 작고할 때까지 글을 썼다. 그녀가 만년의 정열을 저널리즘에만 쏟아 부은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 동안에도 영화제작자로서, 전기작가로서, 소설가로서 성공적 삶을 이어갔다.
정계에선 최고 권력자 프랑수아 미테랑이 그녀의 벗 노릇을 해 주었다. 미테랑은 자기와 동갑인 이 오래된 친구를 각료로 발탁하지는 않았으나, 이런저런 모임에 수시로 초대했고, 해외를 방문할 때면 곧잘 함께 가자고 요청했다.
지루가 사적인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현역 저널리스트였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아르튀르'는 마지막까지 그녀를 수호했다. 삶의 행복이 프랑스에만 존재한다는 그녀의 생각은, 그녀 자신에 관한 한,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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