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총리는 보통 하루에 10여건의 공식·비공식 일정을 소화한다. 1심 판결문에 따르면 한 전 총리는 2006년 12월 20일 하루 공식 일정만 국정조정회의, 미군(美軍) 위문, 저출산대책회의, 공관 오·만찬 등 5건을 가졌다. 이날 총리 일정 5건 가운데 2건이 지금 '검은돈' 수수 의혹과 관련돼 도마 위에 올라 있다.
아무나 총리를 만나고 싶다 해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아무나 총리와 함께 식사하고 싶다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공관 식사는 경호와 보안 때문에 정문 경비대에 참석자 차량번호와 운전자 이름까지 미리 알려야 하는 엄격한 행사이다. 따라서 총리가 공관 식사에 초대했다면 공적(公的)으로 그럴 만한 무게가 있는 인사(人士)이거나 아니면 사적(私的)으로 친분이 매우 두텁고 뭔가 특별한 사정이 있는 인사로 보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도 한 전 총리측은 그날 오찬에 대해선 "(동석했던) 정세균 당시 산자부장관 퇴임 송별연에 정 장관과 동향(同鄕)인 곽씨를 함께 초대했을 뿐"이라고 해명해 왔다. 또 그날 만찬에 대해선 "연말 연초에 이런저런 이유로 아는 사람을 못 만날 이유가 있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오찬 상대인 곽씨는 당시 석탄공사 사장직에 응모한 '민원인'이었다. 석공(石公) 사장 추천권은 동석했던 산자부 장관이 갖고 있었다. 곽씨는 점심이 있고 얼마 후 결정된 최종 후보 3배수 안에 올랐고, 나중에 산자부 산하 한국전력의 자회사 사장에 임명됐다.
만찬에 초대받은 세 명은 모두 건설업자였고, 그 중 두 사람은 당시 국회의원을 겸하고 있던 한 전 총리의 지역구(경기 고양) 내 업자였다. 건설업자들이 '요주의(要注意) 대상'이라는 건 정치 초보생(初步生)도 안다. 호의(好意)를 베푸는 척하지만 그 호의에는 '민원 부탁'이라는 꼬리가 달려있기 십상이어서 관가(官街)에서는 사무관급(級)만 돼도 만나기를 꺼리거나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무총리는 연말이고 아는 사이라 해서 그런 사람들을 공관에 초청해 식사를 해도 될 만큼 한가한 자리가 아니다.
이게 이상하지 않다고 하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역대 어느 총리가 대한민국 총리공관에서 같은 날 이런 오찬, 이런 만찬을 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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