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역사에서 배운다/6,25전쟁 자료

검문중 우리 짐 속의 태극기 보고도 인민군 눈 피해 통과시켜준 좌익 청년

화이트보스 2010. 4. 23. 15:43

검문중 우리 짐 속의 태극기 보고도 인민군 눈 피해 통과시켜준 좌익 청년

  • 이대호(68·경기도 파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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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4.23 03:01

이대호(68·경기도 파주시)
전쟁이 터졌을 때 나는 경기도 파주에 사는 국민학교 2학년생이었다. 부모님, 누나까지 우리 식구 넷이서 부천의 친척집에 피했다가 집에 돌아오던 길이었다.

한 작은 마을 어귀에 도착하니 팔에 완장을 두른 청년들이 피란민들을 막아섰다. 좌익 단체인 '민청(북조선민주청년동맹)' 소속인 그들은 피란민들의 짐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옆에선 따발총을 든 인민군이 사방을 감시했다.

우리 식구는 사색이 됐다. 짐보따리 속에 태극기와 도민증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각되면 총살감이었다. 도민증은 요즘으로 따지면 주민등록증인데, 당시엔 좌·우익 사상을 구별하는 기준이 됐다. 분명 "왜 남쪽 도민증을 아직 안 버렸느냐"고 추궁할 게 뻔했다. 하물며 태극기가 발견되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우리 가족의 차례가 다가올수록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다행히 도민증은 이불솜 속에 넣고 실로 꿰매 가져온 터라 들키지 않았다. 안도하는 순간 옷 갈피 속에서 태극기가 나왔다. '이제 죽은 목숨이구나'. 그런데 분명히 태극기를 본 민청 소속 청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태극기를 덮더니 "얼른 가라"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지옥에서 살아난 기분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허겁지겁 짐을 챙겨 발걸음을 뗐다. 급히 산기슭을 올라가며 자리를 피하려는데, 아까 그 민청 청년이 달려오고 있었다. 결국 여기서 죽나 싶어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눈앞에 선 그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태극기를 갖고 다녀요. 아까 태극기 나왔을 때 (인민군한테) 들킬까봐 나도 진땀이 났네." 그는 "산 너머 마을에서도 짐을 조사 중이니 태극기를 버리고 가라"고 말하고는 도망치듯 가버렸다.

우리는 태극기를 땅속에 묻었고, 무사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60년 전 이름도, 성도 모르는 생명의 은인. 그가 무슨 이유로 민청이 된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양심에 맞지 않는 이념과 체제하에서 훗날 고통을 겪지 않았을까 언제나 걱정이 됐다. 그분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지금도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