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역사에서 배운다/6,25전쟁 자료

김일성 서신

화이트보스 2010. 4. 30. 15:57

김일성 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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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친필 중공군 개입요청서신 발견
중국단둥 항미원조(抗美援朝)기념관 소장 -포로수용소유적관에 전시예정
2006년 08월 24일 (목) 13:20:21 김영완 kjd2588@nate.com
   
 
  ▲ 서신말미에 나란히 보이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서명  
 

분단의 고착으로 작용한 김일성 친필서신

역사의 축을 거꾸로 돌리고 민족을 페허로 만든 한국전쟁의 귀중한 사료가 발견됐다.

북진통일을 눈앞에 둔 1950년 10월 1일 김일성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후방의 통로가 봉쇄되고 전황이 급격히 불리해지자 모택동에게 급박한 전황설명과 함께 한국군 참전을 호소하는 친필서한이 중국 단둥의 항미원조 기념관에서 발견되어 조선일보가 입수한 것을 거제시가 사본을 구해 공개했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김일성,박헌영 공동명의 서한은 초기 승리를 눈앞에 둔 상황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보급과 통신등이 차단되어 고립되는 상황을 언급하며  지원을 요청하고 조선을 미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로 내어주지 않기 위해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 아끼지 않은 것이라며 "친해하는 모동지시여"라는 존칭으로 중국의 개입을 요청하고 있다.

피아가 500만의 인명피해를 입고 60만 가구의 민가와 5000개가 넘는 학교,공공건물과 1000여개의 병원이 파괴되는 등 전 국토가 페허로 변한 한국전쟁의 아픈 역사는 다시 되뇌이고 싶지 않은 민족의 불행으로 남았다.

광복의 환희도 잠시 열강의 이익추구와 이데올로기에 한국은 미,소의 패권주의 갈등의 중심에서 스스로의 의사를 국제사회에서 발언조차 하기 어려운 약소국의 설움을 겪고 있었다.

한국이 상대의 독점적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을 견제한 미,소의 이해관계가 일치해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는 선에서 타협아닌 타협이 이뤄져 38선을 경계로 미,소가 진주하게 됨으로서 민족전쟁의 개연성은 이미 나타났다고 볼수있다.

한국전쟁에 미,소련 뿐 아닌 중국도 깁숙하게 개입

북에 진주한 소련은 한반도의 완전공산화를 목적으로 공산정권수립과 함께 국방력강화에 역점을 두어 현대적 장비와 군조직개편을 서두르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자마자 미군에 동시철군을 제의하게 된다.

반면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의 방파제 역활로 한반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기는 했으나 2차대전을 끝내고 다시 소련과의 지상전을 치룰 각오를 다지는 정도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않고 한국문제에 깊이 개입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방심을 틈탄 남침으로 3일만에 수도가 함락되는 등 일방적인 전황은  낙동강에 방위선을 치고 숨을 고른 연합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압록강까지 진격한 연합군은 통일의 염원을 이루기 직전까지 이르지만 한,만 국경에 비밀리에 집결한 중공군이 그해 10월 25일 100만이 넘는 대군을 투입 인해전술로 한국전에 개입하자 전세는 역전되고  후퇴해 다시 서울이 함락되고 수복되는 등 3년여를 이득 없는 동족상잔으로 이어졌다.

김일성의 서신이 1950년 10월 1일로 나타나 있는것으로 보아 수세에 몰려 어려운 상황에서 모택동이 약속했던 지원을 해 주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중공군의 개입은 사전에 약속이 되어있던 것으로 보여 한국전쟁에 미,소련 뿐 아닌 중국도 깁숙하게 개입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에 발견된 김일성 박헌영의 친필서한은 통일의 역사 일보전에 모택동에게 보내진 참전요구 서한으로 모택동이 자서전에서 밝힌 "한국전쟁 참전의 고뇌"시기에 참전결정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여 역사의 중요성을 담고 있다.

   
 
  중공군개입을 요청하는 김일성,박헌영의 친필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