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검찰, 김성호 전 법무장관에게 들었다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김성호 이사장은 인터뷰를 부담스러워 했다. 위는 2009년 자료 사진. 강정현 기자 | |
검사 시절 김 이사장은 ‘김폴레옹’으로 불렸다. 키가 작고 단단한 체구로, 큰 수사를 강단 있게 해 낸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김영삼 정부 초기인 1994년 그가 대검 중수부 2과장일 때 중수 1과장은 박주선 현 민주당 의원, 3과장은 안대희 현 대법관이었다. 김 이사장은 서울지검 특수3부장이던 95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수사를 담당했다. ‘공직부패방지를 위한 제도개선에 관한 연구’라는 박사 학위 논문이 노 전 대통령의 눈에 띄어 2004년 국가청렴위원회 초대 사무처장으로 발탁되면서 검찰을 떠났고 이후 고위 공직에 중용됐다.
-‘의리 문화’와 ‘투명 문화’는 충돌하나요.
“의리라는 것은 선한 목적을 위해 의기투합할 때 가치가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경우가 그렇지 않습니까. 같이 어울리기만 한다고 해서 의리는 아니지요. 투명함이 없는, 투명함을 견디지 못한 의리는 깡패들의 조폭 문화에 불과하지요.”
-그렇다면 사표를 낸 박기준 부산지검장이 정씨에게 ‘너와 나는 동지적 관계에 있고 우리의 정은 끈끈하게 유지가 된다’라는 녹취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박 지검장이 정씨를 달래느라고 한 얘기일 것입니다.”
검찰 스폰서 문화와 관련된 질문이 계속되자 김 이사장은 종이를 꺼내 한자를 쓰기 시작했다.
‘홍곡고비 부집오지 탄주지어 불유지류(鴻鵠高飛 不集汚池 呑舟之漁 不遊枝流)’
‘큰 기러기와 고니(큰 인물)는 높이 날아 더러운 연못에 모이지 아니하며 배를 삼킬 만한 큰 고기는 작은 냇가에서 놀지 아니한다’는 의미다. 중국 고전 열자(列子) 양주(楊朱)편에 나오는 말이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7년 8월 6일 오전 9시30분에 검사 신규 임관식이 있고 30분 뒤 내가 장관직 사임 의사를 공식 발표했다”며 “당시 검사 임관식 때 한 얘기”라고 말했다. 검사들에게 좌고우면하지 말고 오로지 거악 척결에 매진해 달라고 당부한 것이다.
인터뷰 도중 사무실 탁자 위에 놓인 전국 검사 배치표가 눈에 들어왔다. 김 이사장의 검찰 조직에 대한 여전한 관심이 느껴졌다. 속 시원히 말하지 못하는 인간적 고뇌도 이해가 갔다.
-예전에 막강한 검찰 수사권 견제를 위해 ‘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에 적극적이었죠. 지금도 마찬가지 입장인가요.
“돌이켜 보니 공수처에는 몇 가지 약점이 있더군요. 수사 대상을 차관급 이상 고위 공직자, 즉 사람의 직급으로 분류했는데 사건에 따라 분류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법무부 장관 때 미국의 FBI 같은 국가수사청을 설립하는 안을 만들었으나 내가 떠난 이후 추진되지 않았습니다. 수사 잘 하는 특수부 검사들을 국가수사청에 배치해 검찰 조직과 선의의 경쟁을 하게 하는 구도였죠.”
사실 검찰의 스폰서 문화는 오래고 넓고 깊게 퍼져 있다. 사석에서 일선 지검의 한 차장검사가 한 얘기가 생각난다. 그는 “지방의 지청장 등 기관장으로 부임했을 때 전임자가 봉투를 주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며 “봉투에는 돈이 아니라 지역 유지나 업자들의 신상명세와 성향을 적은 자료가 들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 인수인계 자료를 바탕으로 성향상 주의가 필요한 인사가 찾아오면 홀대해서 경고를 하고, 양질의 인사가 찾아오면 환대를 했던 기억이 난다”고 덧붙였다.
법무법인 대표로 있는 한 전직 검사장은 다음과 같은 경험담도 털어놓았었다. “내가 지청장으로 근무할 때다. 2년차 후배 검사가 전보돼 와서 전화 통화를 하는데 대화 중에 그 후배가 ‘가족이 다 함께 내려왔는데 애들이 개를 무척 좋아한다’고 말했다. 며칠 뒤 그 후배한테서 전화가 왔다. ‘관사로 강아지 한 쌍이 선물로 배달됐는데 살아 있는 동물이라 돌려주지도 못하고 그냥 키워야겠다’고 했다. 알아 보니 당시 우연히 내 방에 있던 지역 업자가 후배 검사와의 통화 내용을 듣고 인사차 보낸 것이었다. 스폰서 문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솔직히 옛날에는 스폰서가 있는 검사가 출세도 잘 했다. 선후배 검사들에게 술도 잘 사고 용돈도 주고 했으니 말이다. 스폰서가 없으면 바보 소릴 들었다. 검찰만 그랬나. 사회 전체가 그걸 용인했었다.”
다시 김성호 이사장과의 인터뷰.
-기업이든, 정부기관이든 혁신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이석채 KT 회장 같은 분은 “혁신에서 중요한 건 조직문화와 일하는 방식”이란 말을 하더군요.
“예, 맞는 말씀입니다. 결국 리더십의 문제가 아닐까요. 전 직원이 일체감을 갖고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리더가 만들어 줘야 합니다. 일방지시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시대는 갔습니다. 지도자는 경청하고 대화하고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조직을 이끌어야 합니다. 또 하나, 인사가 아주 중요합니다. 인사가 불공정하게 되면 대화와 소통이 안 됩니다. 기업들은 인사 문제가 깨끗하게 돼 있습니다. 정치권과 행정부 같은 공공기관이 아직 안 돼 있습니다. 인그룹(내 패), 아웃그룹(네 패)으로 가르는 패거리 문화가 남아 있는 거죠. 공기업도 혁파해야 합니다.”
-30년 가까이 공직자 생활을 했습니다. 공직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공명정대가 생명입니다. 선공후사(先公後私)라는 말 중에서 ‘후사’도 맞지 않습니다. 사적인 감정은 전이든 후이든 아예 배제해야 합니다. 선공후공이 맞습니다. 공자님 말씀 중에 ‘일월무사조(日月無私照)’라는 게 있습니다. 해와 달은 사사롭게 비추지 않는다는 뜻이죠. 공직자는 국민이 위임한 해와 달입니다. 그 빛을 사사로이 비추면 안 되죠.”
-공직자의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에 매몰되다 보면 공부할 시간이 없습니다. 틈틈이 공부한다고 하는데 그건 굉장히 어렵습니다. 내 경우엔 검사장으로 승진한 뒤 요직에 못 가고 3년 동안 한직에 있었는데 그때 박사 학위 논문을 썼습니다. 시간을 일부러 내서 집중적으로 해야 한다고 봅니다.”
김 이사장은 요즘 고구려ㆍ백제ㆍ신라가 경쟁하며 세력을 키워가던 삼국시대 100여 년의 역사를 복원한 김정산의 대하역사소설 『삼한지』(전 10권)와 『경영의 교양을 읽는다』 등의 책을 읽고 있다고 소개했다.
인터뷰를 마치자 김 이사장은 기자에게 폭탄주 제조용 미니술잔 세트를 선물로 줬다. 잔에는 ‘불고(不<89DA>)’라는 한자가 쓰여 있었다. ‘술잔이 아니다’라는 뜻. 큰 잔은 높이 9.5㎝, 지름 5.5㎝였고 작은 잔은 높이 5㎝, 지름 3.5㎝였다. 보통 폭탄주에 비해 3분의 1 정도의 양으로 미니 폭탄주를 만들 수 있게 돼 있다. 폭탄주를 적게 먹자는 운동의 일환으로 1000세트를 제작해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는데 거의 바닥이 났다고 한다. 사무실 벽엔 그가 쓴 붓글씨 액자가 걸려 있었다.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 우연일지는 몰라도 검찰이 처한 상황과 오버랩됐다.
조강수 기자
중앙SUNDAY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