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에 다녀온 오은선 백발로 머리는 세고 주름은 깊게 패었다
노인의 모습이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내게도 꿈이 있다 암벽 등반하다 다친 발목에 박은 철심을
자동차 키에 걸고 아직 못다한 고산 등정의 꿈을 꾼다…
오은선 대장의 안나푸르나 등반 소식이 전해지던 날, 난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작년에 오 대장이 나와 산행을 하다가 히말라야 고산(高山)에서 쓰던 선글라스를 내 배낭에 잘못 넣어 그때부터 내가 그 선글라스를 맡아두고 있었다. 산악인들한테는 여러 가지 징크스가 있는데, 특히 내 경우 남의 물건을 맡아둔 채 그 사람이 산행을 나서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긴다. 이 때문에 오 대장이 이번 등정을 위해 네팔로 출국하기 직전 마지막 통화 때 나는 오 대장에게 “안경 받아가라. 그거 내 것 되면 나한테 평생 짐 된다”고 했다. 그랬더니 오 대장은 “무사히 잘 다녀올게요”라고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두고 간 선글라스가 만에 하나 유품(遺品)이 될까, 산을 타는 여정을 지켜보는 내내 마음이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나와 오 대장, 아니 은선이가 본격적인 히말라야 등정에 나서기 한참 전부터 막역(莫逆)한 사이로 지내왔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당시 내가 운영하던 등반팀 캠프에서 같이 산행을 하면서 처음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만 해도 국내 여성 산악계에는 오은선보다 걸쭉하고 화려한 스타 산악인들이 많았다. 그에 비해 내 눈에 은선이는 대기만성(大器晩成)형이었다.
은선이는 지난 1991년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선발됐지만 처음엔 히말라야의 고산지대에 적응하지 못해 정상을 밟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이후 박영석 대장에게 발탁돼 히말라야 원정에 동행하게 됐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크게 주목을 받진 못했다. 한동안 마땅한 스폰서가 없어 등반 일정이 잡혀도 전전긍긍해야 했고, 특히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하기 어려웠던 탓에 한때는 등산용품 전문매장에서 물건을 팔아가며 다음 일정을 준비했다.
-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은선이가 히말라야 14좌 등반이란 ‘백조’들의 꿈을 꾸게 된 것은 지난 2007년 K2에 올라갔다 온 뒤였던 것 같다. 당시 K2 등반을 마치고 만났던 은선이는 어느새 정신적으로 거인이 돼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산이 편안하게 느껴진다”고도 했다. 그렇게 한 사람이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가슴 뿌듯한 일이었지만, 해발 8000m대의 고봉(高峰)들을 정복하고 돌아온 은선이를 만날 때면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한번은 히말라야 등정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 은선이와 중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약속장소에 나갔다. 순간 사람을 못 알아볼 뻔했다. 머리를 한 갈래로 땋고 휴게소 벤치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노인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머리는 백발로 산화됐고, 주름은 산골짜기처럼 깊게 팼다. 직전 산행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었는지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히말라야의 해발 8000m가 넘는 고산에 오른다는 것은 일반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극한의 상황을 겪어내는 일인 것이다.
이 일을 겪고부터는 은선이가 히말라야 등반에서 돌아온 직후면 나는 칠선(七仙)계곡이나 주왕산처럼 국내에서도 기(氣)가 세기로 유명한 곳에 데려다 한 1주일 정도 요양을 시켜주곤 했다. 그런 시간을 보내면 은선이는 금세 기력을 회복하곤 했다. 산에서 뺏긴 기를 산에서 되찾는 영락없는 산 사람이었다.
한동안 은선이의 활약을 지켜보면서 대리만족을 얻어왔지만, 나에게도 산악인으로서의 한 가지 꿈이 있다. 과거 히말라야에 있는 8000m급 고봉인 ‘초오유’에 올랐던 나도 7대륙 최고봉을 모두 등정하고 싶다. 5년 전 국내에서 암벽을 등반하다 왼쪽 복숭아뼈가 으스러지는 사고를 당해 6개월이 넘게 고생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이 일이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됐다. 한동안 길이 10㎝에 달하는 철심을 박아넣고 다녔는데, 이후 제거한 철심을 지금도 자동차 키에 걸고 다니면서 고산 등정의 의지를 다지곤 한다. 훌쩍 커버린 오은선 대장이 이젠 어느덧 50대 후반이 된 내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꿈을 다시금 요동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