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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그룹 공중분해 비화 & 내 인

화이트보스 2010. 5. 14. 15:39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이 처음 털어놓은 동아그룹 공중분해 비화 & 내 인생의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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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큰 공사를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는 패기의 경영인이었고, 유명 연예인과 미모의 아나운서를 부인으로 맞으며 화제를 뿌린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1998년 재계 서열 10위였던 동아그룹을 잃고, 지금까지 야인으로 살았다. 그가 10년 넘게 닫아온 입을 열었다. 동아그룹을 빼앗긴 진짜 이유를 말하고 싶어서였다.
 

지난 1998년 동아그룹 회장직에서 사퇴한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이 10년 만에 그룹 해체의 비화를 털어놓았다. 최 전 회장은 기자와 인터뷰에서 그동안 소문만 무성했고, 밝힐 수 없었던 그룹 해체 과정을 상세하게 공개했다.

최원석 회장은 1998년 5월 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날 당시 그룹 경영권은 물론 자신의 전 재산(1천억 원 상당)을 강제로 빼앗겼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법정구속될 당시의 심정도 털어놓았다. 지난 10년 동안 40여 건의 민형사 소송에 휘말려온 그는 노무현 정권 초 재판을 받는 도중 법정에서 구속될 때 “자살할 마음까지 먹었다”면서 “추운 겨울 감옥에 들어가는 순간 자살하려고 했으나 차마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여러 차례 자살하려고 했지만 용기가 없어 죽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최 회장은 지난해 광복절을 기념해 특별사면복권됐다. 그는 지난해 가을 기자를 만나 동아그룹 해체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언론에 직접 인터뷰를 하는 것이 세간에 나쁘게 비춰질까 봐 선뜻 나서지 못했다. 해를 넘겨 비슷한 처지로 그룹을 해체당한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이 월간조선(2009년 3월호)에 인터뷰한 것을 보고, 자신도 공개적으로 나서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밝혔다.

최 회장은 지난 10년간 수십 건의 재판을 받아오면서 심신이 많이 약해져 있는 상태다. 특히 주변 사람들이 ‘여자 문제로 회사를 빼앗겼다’는 인식을 갖고 있어 너무 괴로웠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최 회장은 빼앗긴 재산 중 문중 선산까지 포함돼 있는 게 너무 안타깝다. 집안에서 조상 묘도 제대로 못 지킨 놈이라고 욕을 얻어먹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래서 너무 힘들다고 비통한 심경을 토로했다.

지옥보다 힘들었던 지난 10년
불과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을 뿐인데, 최원석 회장은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그 세월의 몇 배를 산 사람처럼 많이 늙어 있었다. 한때 사하라사막에 4천 킬로미터가 넘는 거대한 인공수로를 만들어 물줄기가 흐르게 했던 대역사의 주인공, 한때 22개 계열사를 이끌며 자산규모 11조 원으로 재계 순위 10위를 기록했던 재벌그룹의 총수가 10평도 채 안 되는 작은 사무실을 직무실로 이용하고 있었다. “다른 대기업 회장처럼 번듯한 회장실에서 인터뷰를 했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요”라고 인사를 건네자,“그래도 다방에서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최원석 회장은 사업이 무너진 이후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누구를 자주 만나느냐는 물음에 “아무도 안 만난다”고 답하고, 그 이유에 대해 “예전에 알던 사람들에게 전화하면 괜히 ‘도와달라’는 소리로 들릴까 봐 스스로 피한다”고 말했다. 인터뷰 자체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래서인지 대화 나누는 것 자체를 몹시 불편해했다. 그는 “검찰 수사와 재판을 너무 많이 받아서 질문에 답변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말했다.

1943년 대전에서 출생한 최원석 회장은 23세에 동아콘크리트 사장을 시작으로, 30대에 동아그룹의 주력기업인 동아건설과 대한통운을 맡아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등 중동지역을 휘저었고, 40대에는 ‘세계 최대의 토목공사’라 불리는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현장에서 진두지휘했다. 그가 경영하던 동아건설은 IMF 당시 국내 재계 순위 10위의 대기업이었다. 이처럼 시대를 풍미했던 최원석 회장이 1998년 5월 동아그룹 회장직에서 사실상 쫓겨났고, 1천억 원대에 달했던 재산까지 몰수당했다. ‘제2금융권에 돈을 빌린 것 때문에 유동성에 문제가 조금 있었는데, 금융권에서 약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는 게 최원석 회장의 주장이다.

여자 때문에 회사가 무너졌다니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회사가 파산당한 직접적인 원인은 유동성 문제였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DJ 정부에 밉보인 대가’라고 말했다. 이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IMF 금융위기 당시 재벌을 길들이기 위한 본보기로 자신과 동아그룹을 집중 공격했다는 주장이었다. 

“유동성 위기는 있었지만, IMF 당시 재무구조가 튼튼한 회사는 거의 없었어요. 우리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어요. 리비아에서 공사대금을 제대로 못 받았다는 이야기도 사실과 다릅니다. 100% 현금으로 받았습니다. 우리 그룹에 자금 문제가 심각했다면, 리비아 공사대금을 앞당겨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주지 않았어요. 어느 날 갑자기 외화를 빼돌렸다고 가택수색이 들어오고, 채권단에서는 ‘집에서 나가라’고 하고, 검찰 수사는 계속되고…. 대응할 엄두를 못 내는 사이에 회사가 넘어갔습니다.”

이번 취재를 진행한 월간조선은 ‘입수한 검찰수사기록과 회계법인의 실사자료를 분석한 결과, 당시 동아건설의 재무상황이 부실하다고 볼 근거는 부족했다’는 판단을 내렸다. 동아건설의 분식회계를 조사한 검찰은 과거 10년간(1988~1977년) 조성한 분식금액을 대략 7천억 원이라고 발표했는데, 분식금액과 16~17%의 이자, 협조융자금 등을 1988년도 회계결산에 모두 반영해도 동아건설의 자산이 부채보다 5천500억 원 가량 더 많았다는 것.

결국 최원석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당시 동아건설은 부실기업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월간조선에서는 청와대에서 동아그룹 처리 방향에 개입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당시 서울은행 동아건설 채권단 경영관리단장의 녹취기록도 공개했다. 최원석 회장의 이야기에 힘이 실리는 근거들이다.

회사가 풍전등화에 처해 있을 당시, 최원석 회장에게는 내환도 있었다. 첫 번째 아내와 이혼까지 하게 된 것이다. 세간에는 두 사람의 이혼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그러자, 집안 문제가 복잡해서 경영에 신경을 못 쓰는 바람에 그룹이 무너졌다는 말까지 있었다.

“그것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외도를 해놓고 모든 것을 나한테 뒤집어씌운 거예요. 그 사람은 오래전부터 바람을 피웠어요. 그걸 알고도 모른 체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코너에 몰리니까 ‘찬스는 이때다’ 하고 얼마나 집요하게 공격했는지 몰라요. 여성잡지를 통해서도 공격했고요. 그런데, 그런 문제를 가지고 권력이 동아그룹을 없애버렸다면 정말 큰 잘못이지요. 여자 문제는 동아그룹을 해체하기 위해 교묘히 이용한 것에 불과해요. 당시 동아그룹은 재무구조상 결코 부실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한 이후 최원석 회장의 여자 문제와 관련한 여러 이야기들이 소문으로 나돌았다. 대부분 연예인들과 관련된 소문이었다. 특히 첫 번째 부인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이야기라며 책을 내기도 했고, 여러 인터뷰를 통해 직접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최원석 회장은 그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그 무렵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대응을 하면 일이 더 복잡해질 것 같았어요. 유구무언으로 참고 지냈지요.”  

당시 최원석 회장에 대해선 악성 루머가 상당히 많았다. 주로 기업 경영보다 ‘다른 것’에 관심을 쏟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더욱이 그가 루머에 대해 함구하면서, 소문은 마치 사실인 양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기도 했다. 당시 최원석 회장은 루머에 무감한 사람처럼 비춰지기도 했는데, 이번 인터뷰에서 그는 꽤나 분노했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시간이 흘러서 미움과 분노가 많이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첫 번째 부인에 대한 미움이 많이 컸었다고 한다.

“생각하면 괘씸하지만 미워해서 뭐합니까. 참는 것도 도가 텄어요. 그 사람이 쓴 책이 노무현 정권 초 내가 법정 구속될 때 발간됐는데, 구치소에 들어갔더니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 책을 돌려가며 읽고 있더군요. 한마디만 하고 싶어요. 여자문제는 첫 단추를 잘못 꿰었어요. 이 나이에 내가 말 못할 게 뭐가 있겠소. 내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1 1977년 동아건설은 사우디아라비아와 12억5000만 달러 규모의 전화통신공사를 수주했다. 사진은 당시 사우디를 방문해 칼리드 국왕과 악수하고 있는 최원석 회장. 2 1998년 2월, 김포매립지에 놀이공원 시설 투자를 위해 방한한 마이클 잭슨과 함께. 3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와 함께. 4 최원석 회장의 40대 모습. 5 리비아 대수로 공사현장

처음 말하는 아내 장은영
최원석 회장은 동아그룹이 파산한 1998년 5월 이후 지난해 ‘광복절 특사’로 사면복권되기까지 10년 동안 40여 건의 민형사 소송 속에서 살았다. 2004년에는 법정 구속돼 6개월 간 구치소 경험을 했고, 동아건설이 동아생명 유상증자에 참여한 것을 배임이라 하여 2008년 4월에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을 때까지 7번 법정 선고를 받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그가 소유하고 있던 거의 모든 재산은 법정관리 대상이 됐다. 그는 다른 것보다 문중 선산까지 빼앗긴 것을 제일 가슴 아파했다.

“재산을 내놓으라고 해서 다 내놓았더니 저를 기다리고 있는 건 검찰수사와 재판뿐이었어요. 10년 동안 그 일을 해왔는데 이젠 진절머리가 날 지경입니다. 강산이 한 번 바뀌는 동안 검사와 판사만 만난 것 같아요. 자살할 생각도 여러 번 했지만, 용기가 없어서 죽지 못했어요. 지금도 민사 재판이 진행 중인데 개인적으로 은행계좌도 못 열어요. 그래도 선산은 꼭 찾아야 하는데. 충남 조치원 일대에 있는 선산도 다 빼앗겼어요. 집안의 윗대 어르신들이 묻혀 있는 곳을 제가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니 못난 놈치고도 한참 못났지요.”

최원석 회장은 현재 아내 장은영 전 아나운서가 이사장으로 있는 안성 동아방송예술대학 내에 살고 있다. 그 뒤에 선친 묘가 있다. 선친 묘를 자주 찾아가 사죄한다. 그는 아버지가 강조했던 경영 원칙들, ‘돈 빌리지 마라. 은행돈 빌리지 마라. 그날 받을 돈과 줄 돈을 매일 챙겨라’ 등을 지키지 못해 저세상에 가서 아버지를 뵐 면목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지금도 선친 묘를 자주 찾는 것이다.

최원석 회장은 아내 장은영 동아방송대학 이사장에 대한 이야기도 꺼냈다. 그가 직접 언론에 아내 이야기를 꺼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 만나게 된 이야기가 뜻밖이었고, 그래서 흥미로웠다.

“내 상황이 그렇잖아요. 길거리에서 여자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여자를 만날 기회가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 TV에서나 여자를 보게 된 겁니다. 아내도 TV를 통해 알게 된 셈입니다. 아내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그룹 총수 중 한 사람이었던 최원석 회장. 그는 한순간에 회사와 가정을 잃었고, 이후 10년은 재판정에서 살았다. 자살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어려움을 이겨냈고, 이제 태풍은 거의 지나갔다. 그래서인가? 그에게서는 분노보다는 회한이 더 많이 느껴졌다. 최원석 회장은 이번 인터뷰를 통해 그간 굳게 닫았던 입을 열게 된 데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는 회사를 강제로 빼앗아간 DJ 정권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굉장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처벌은 둘째치고 진실이 먼저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졌으면 합니다”라고.


 / 여성조선
   취재 백승구(월간조선 기자)ㅣ사진 서정리(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