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권은 유비가 징저우를 차지하는 것이 탐탁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유비를 공격할 수는 없었다. 북쪽에 있는 조조가 언제 다시 공격해 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로서는 유비와 동맹을 맺어 조조에 대항하는 것이 필요했다. 손권이 ‘징저우를 빌려 달라’는 제갈량의 요청을 못 이기는 척 들어 준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비는 징저우를 돌려주지 않았다. 아니 돌려줄 마음이 없었다. 지금도 ‘유비가 징저우를 빌리다(荊州借用)’는 말은 빌려간 것을 돌려주지 않음을 뜻한다. 징저우는 군사요충지다. 조조가 이곳을 차지하면 창장(長江)을 넘어 남북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근거지가 된다. 손권의 입장에서도 창장 남쪽의 통일과 든든한 국가건설을 위해서는 절대 필요한 곳이다. 유비는 어떤가. 유비에게도 서쪽으로 뻗어갈 수 있는 근거지가 되는 것이니 징저우는 누구에게나 포기할 수 없는 땅인 것이다.
징저우로 가는 길에 만난 시위대
한수이(漢水)를 에둘러 품고 선 샹양(襄陽)에서 징저우성(荊州城)을 향해 달렸다. 징저우까지 곧게 뻗은 대로를 달리던 자동차가 얼마 못 가서 갑자기 멈춘다. 알고 보니 공장에서 퇴출(退出)당한 사람들이 사거리를 점거하고 복직(復職)요구 시위를 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그늘이 중국사회에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리라.
차량은 꼼짝도 못하고, 사방으로 늘어선 차량의 행렬은 끝이 보이질 않는다. 트럭운전사들은 아예 차 밑에 돗자리를 깔고 눕는다. ‘언젠가는 풀리겠지’ 하는 생각에 밀린 잠을 청한다. 만만디(慢慢的) 정신인가, 아니면 중국사회주의 체제에 익숙한 그들만의 모습인가. 갈 길 바쁜 내 마음만 초조하다. 경찰서장쯤 되는 공안원도 어찌할 바를 모른다. 시위자들은 자기들의 주장이 해결되지 않으면 국가주석이 와도 통행할 수 없다며 엄포를 놓는다.
시위주도자에게 사정을 했다. 한동안 강경하더니만 그래도 내 처지를 들은 책임자가 공안원으로 하여금 우리 자동차만 샛길로 갈 수 있도록 해 준다. 산길 같은 논길을 굽이돌아 징저우로 향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색다른 경험을 많이 한다지만 참으로 고단한 여정이다. 징저우성을 보러 가는 길이 이토록 쉽지 않으니 예부터 병가필쟁지지(兵家必爭之地)로 이름이 높아서인가? 이러하매 삼국시대 영웅들의 징저우쟁탈전은 오죽했으랴.
견고하고 웅장한 성벽에 징장(荊江)을 해자로 삼은 징저우성의 모습은 그 옛날 철옹성(鐵甕城)의 위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징저우성은 삼국시대의 많은 유적지 가운데 그 형태를 가장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삼국시대의 모습을 간직한 징저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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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저우성의 시대별 성벽 보수 흔적. |
성을 찬찬히 돌아보니 성벽은 시대별로 보수되어 온 흔적이 역력하다. 성의 축조방식은 시기마다 다르다. 징저우성은 오랜 시기를 버텨 왔기에 왕조가 바뀔 때마다 보수됐다. 성 안에는 이를 알아볼 수 있게 안내해 놓았는데 시대별로 이 성의 세파(世波)를 느낄 수 있었다. 징저우성에서 중요한 문은 동문(東門)이다. 동문은 수로(水路)가 통하는 문으로 공안문(公安門)이라고도 하는데, 예전에 유비가 이곳으로 상륙하여 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성문은 모두 옹성(甕城)을 갖추고 있는데, 옹성이란 성벽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방어용의 작은 성을 말한다. 성벽은 커다란 석재를 기초로 하여 흙벽돌을 쌓았는데, 벽돌의 틈마다 석탄과 찹쌀로 만든 접착제를 넣어 마치 쇠처럼 단단하다고 한다. 성문 누각인 빈양루(賓陽樓)에 오르니 징저우성 안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유비의 징저우 공략
유비는 징저우를 차지하고 방통(龐統)까지 영입한다. 지난날 수경선생(水鏡先生)이 천하를 경영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제갈량과 방통을 추천했는데, 두 사람을 모두 얻었으니 유비의 기쁨이 어떠했으랴. 이제 제갈량이 제시한 ‘융중대책(隆中對策)’에 의거하여 이저우를 차지한 후, 천하를 통일하여 한나라를 부흥시키는 것은 눈앞에 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비는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유장을 제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유비의 생각은 천하의 여론과도 같은 백성들의 신임이 우선이었다. 이는 이저우의 주인인 유장을 아무 이유 없이 처단한 후 발생할 분란을 사전에 없애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자멍관(萌關)에 주둔한 유비는 주민들의 신망을 얻는 일에 집중한다.
그러던 중 유비는 손권과 조조가 전쟁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한다. 유비는 손권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유장으로부터 병력과 군량을 빌리고자 하였으나, 이저우 내 반대파의 여론에 소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