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 있는 사람이라면 젊었을 때 건방지단 소리 들어봐야 해요”
정리= 양성희 기자, 사진= 박종근 기자
60년대 한국 영화 황금기의 주역, 이만희와 신성일
j 객원기자로 나선 이혜영씨가 첫 인터뷰 대상으로 올해로 데뷔 50주년을 맞은 배우 신성일씨를 만났다. 아버지 이만희 감독과의 추억을 이야기할 때 눈물을 보이기도 한 이혜영씨가 신성일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장소협찬 = 63빌딩 워킹 온 더 클라우드 레스토랑] | |
신성일(이하 신)=내가 이 감독 얘기한다고 해서 이 자리에 기쁜 마음으로 나왔어요. 이 감독이야 내 최고의 파트너였지. 이만희 영화에 내가 주연을 가장 많이 했어요. 51편 중 11편, 그것도 다 좋은 작품에만. 여배우는 문정숙이 16편으로 제일 많이 했고. 개인적으로도 가까웠어요. 이 감독이 키도 크고 멋쟁인데 머리가 앞뒤 짱구라 나는 ‘짱구형’이라고 불렀고, 감독님은 동생 부르듯 ‘신짱’이라고 부르셨어. 오늘 혜영씨 만나려고 이만희 감독 책 다시 읽고 나왔는데 나보다 6살이나 많아서 깜짝 놀랐어. 지금까진 그저 한두 살 형인 줄 알고 어리광부렸었거든.
이=저도 선생님 책 읽고 공부 많이 했습니다(웃음). 선생님이야말로 지성, 연기력, 외모, 인기 등 배우의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신 대배우신데,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중국의 한 영화과 교수가 “중국영화를 세계에 알린 것은 장이머우지만 중국 사람들을 직접 울리고 웃긴 것은 배우들”이라고 했는데 선생님이 그렇죠. 선생님과 함께 60년대부터 한국인들은 웃고 울었죠.
신=나야말로 우리 이 감독이 점점 잊혀지는 게 안타까워요. 이 감독은 한국영화사에 귀중한 인물이죠. 이 감독이 계셔서 내가 외롭지 않았고, 한국영화가 황금기를 맞았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만추' 화보집이 나와서 50부를 사서 주변에 돌렸어. 유일한 형 이만희 감독, 유일한 동생 하길종 감독이 너무 일찍 돌아갔어. 그게 한국 영화계의 큰 손실이고, 내 활동 터전도 좁아졌어. 그래서 할 일을 찾아 국회의원 하고 그랬지(웃음). (기자에게) 정치 얘기는 더 안 할래. (손사래를 치며) 정치 그건 할 얘기 없어. 다 거짓말….
신=영화적 영향은, 이만희 감독한테 제일 많이 받았어. 이 감독은 평소 카리스마가 넘치다가도 연기 지도할 땐, ‘신짱 이렇게 해’라면서 실제 자기가 넘어져, 그러다 ‘아 돌멩이 조심’이라고 자상하게 말하고. 그런 분이 없어요. 이 감독과 처음 같이한 영화가 ‘흑맥’(1965)인데 문희의 데뷔작이지. 신인이라 연기를 하나도 몰랐어. 그저 감독이 시키는 대로, 보라면 보고.
이=그 다음 해 ‘만추’는 어떠셨나요.
신=당시 영화계가 일본 번안물 아니면 현대문학을 옮긴 문예물 일색인데 ‘만추’는 100% 오리지널 시나리오였어요. 작가가, 두 남녀가 창경원에서 동물들을 배경으로 데이트하는 장면을 써놨는데, 늦가을에 찍으러 가니까 추워서 동물들이 보이지 않는 거야. 이 감독이 갑자기 아이디어를 냈지. ‘박제박물관으로 갑시다.’ 거기서 호랑이, 독수리 등을 배경으로 찍었는데 영상이 일품이야. 그런 식의 순발력, 재치가 넘쳤어.
이=두 분이 성격도 잘 맞으셨던 것 같아요.
신=우리가 데카당스 하고 이념적으로 저항적인 것도 참 비슷했어요. 하드보일드나 남자의 패기, 용기, 의리도 좋아했고. 아쉽게도 같이 못한 영화가 ‘7인의 여포로’인데, 이때 이 감독이 용공주의자로 몰려 옥살이 했잖아. 남산에 끌려가서 매도 많이 맞았지. 아래를 홀라당 벗기고 담요로 싼 다음 물을 흠뻑 뿌리고 때리면 외상이 남지 않았어. 대신 골병이 들었지.
이=제게도, 아버지가 새벽에 벽돌로 머리를 맞거나 테러당하셨던 기억이 있어요.
신=유명한 일화가 있어. 흑산도 근처 무슨 섬에서 영화를 찍는데, 거기에 ‘오적’으로 수배 중인 김지하가 도망온 거야. 이 감독, 김지하가 술 먹고 박통을 막 씹었어. 그런데 그걸 누군가 듣고 경찰에 신고한 거야. 시골 경찰이 와서 누군지도 모르고 잡아갔는데, 알고 보니 김지하인 거지. 그 경찰 횡재했지 뭐. 하하.
청춘스타 1호, 그리고 배우 인생 50년
이=아버지의 마지막 작품인 ‘삼포 가는 길’은 같이 못하셨지요.
신=74년 ‘들국화는 피었는데’를 강원도 인제에서 찍었어요. 우리는 시골 촬영 가면 항상 방을 같이 쓰고 잘 먹고 다녔어. ‘짱구형은 영화계 기둥이야. 좋은 거 먹고 오래 살아야 돼’ 이러면서. 송이버섯, 뱀탕을 밤낮으로 먹었어. 그 영화는 임권택 감독의 ‘증언’과 함께 영화진흥공사가 제작한 건데, 공사는 둘 다 반공영화를 원했고 아버지는 반전영화를 만들려 했어요. 결국 촬영이 중단됐어. 그때 내가 “형 버틸 일이 아니다. 이건 개인 작품 아니고 공사 것이다. 작품다운 작품은 ‘삼포 가는 길’로 하자”면서 설득했거든. 4일 만에 촬영이 재개됐고, 나는 서울에 올라갔는데 세상에 영화 스케줄이 4개나 밀려 있는 거야. 도저히 같이할 수가 없어서 내 배역을 김진규가 한 거지. 그게 정말 후회돼. 결국 편집도 다 못하시고 돌아가셨잖아. 서슬퍼런 군사통제 속에서 용기 있게 작품을 하다 몸 상한 거지.
이(눈가를 훔치며)=데뷔 때 얘기를 해주시죠. 신상옥 감독의 ‘신 필림’ 전속배우로 시작하셨죠?
신=경북고 2학년 때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 졸업하고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 방황했어. 당시 가수 하는 친구 따라 충무로 근처를 헤매다 중부경찰서 옆 배우 전문학원에 입학했지. 6개월 다녔는데 내용이 좋더라고. 김수용·김기영·김기덕 감독이 강사로 오고, 양광남 교수가 국내 최초로 스타니 슬라브스키 연기론 가르치고. 그러다 신 필림 신인모집 광고를 봤는데, 응모하러 간 게 아니라 그냥 구경갔다가 뽑혔어. 응모생이 3600명이나 몰리니까 사무실에 다 들어가지 못하고, 이형표 조감독이 밖에 나와서 괜찮은 애들을 뽑았는데 눈에 띈 거지. 신성일이란 예명도 신 필림이 지어줬고.
이=신 필림의 전화 잘 받는 잘생긴 직원에서 스타가 됐다고 전해지는데요.
신=신 필림에는 최은희 등 기라성 같은 선배가 많았고, 나는 할 일이 없어 주로 조명기사 등 스태프로 현장을 쫓아다녔어요. 또 쟁쟁한 작가, 문화부 기자들도 들락거려 안면을 텄는데 신 감독 책상 전화가 울리면 아무도 어려워서 못 받는 거야. 그럼 내가 냉큼 받고 상대의 목소리를 기억했다가 ‘○○○선생님, 어떤 일이십니까’ 이러지. 상대가 반색하면서 ‘너 누구야’ 그러면 ‘신성일입니다’ 답하면서 내 존재를 알렸지.(하하)
이=그 쟁쟁한 선배들 사이에서 신인으로 어떻게 버텨내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신=‘로맨스 빠빠’에 무려 12명의 유명 배우가 나왔는데 내가 그 기에 치여 기를 못 폈어요. 신 필림은 유명 배우가 많으니까 나 같은 젊은 신인에 맞춰서는 기획을 안 해주더라고. 결국 다음 번 출세작 ‘아낌없이 주련다’는 신 필림에서 나와서 찍었지. 전속 끝났으니 나가겠다고 했다가 뺨 한 대 얻어맞고, 길가에서 얼마나 울었던지. 혼자 실컷 울고 이제 새출발이다 하면서 걸어갔던 게 생각나. 그 무렵 사강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영화화한 ‘굿바이 어게인’을 극장에서 봤는데, 이게 딱 ‘아낌없이 주련다’의 미국 버전이더라고. 주인공 앤서니 파킨스와 잉그리드 버그먼을 나하고 이민자에 대입시키면서 혼자 콘티 짜고 열심히 준비했어. 러시(가편집) 시사를 하는데 떨려서 들어가지 못했는데, 사장이 내 등을 탁 치면서 ‘잘했다’고 10만원을 쥐여줬어. 영화, 대성공했지. 내가 봐도 연기를 잘했어. 상대역 이민자를 너무 좋아하는 게 보여. 내가 눈에 불을 켜고 상대를 바라보더라니까(웃음).
이=선생님을 청춘스타로 만든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은 엄앵란 선생님과 같이 찍은 영화였죠?
신=18일 동안 감독은 편집실에 있고, 촬영은 조감독이 하면서 찍었지. 얼마나 흥행에 성공했는지 1964년 말에 아카데미극장이 이 영화로 1억원 빚을 다 갚았다니까. 개인적으로는 김기덕 감독의 ‘가정교사’가 더 기억에 남아. 원작 일본영화 사진 보고 주인공한테 반해 아직 캐스팅도 안 됐는데 사장님을 찾아가 ‘이 주인공처럼 스포츠 머리 해볼까요’라고 먼저 그랬지. 말런 브랜도가 ‘대부’ 때 스스로 분장하고 감독을 찾아가, 이렇게 하겠다고 한 거랑 비슷한 거야. 이발소에서 머리 깎고 오니까 사장님이 ‘김 감독, 성일이 머리 봐, 됐어!’ 했어.
이=그래도 데뷔시킨 신상옥 감독님을 잊긴 힘드실 것 같아요.
스타커플로 사는 법, 명배우로 사는 법
신=최무룡 선배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배자 멜로의 스승이에요. 멜로는 눈 연기인데, 눈 연기의 디테일을 그 선배한테 배웠어. 대사 처리도 일품이고. 근데 최무룡 선배가 못 가진 게 하나 있지. 바로 내 몸의 모양이야(하하). 초등학교 때 육상·수영, 중학교 때 평행봉 운동해 나온, 다듬어진 몸이거든. 외국 배우들이야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발레 배우지만, 우리 선배들은 악극단, 유랑극단 출신인데 먹고살기 힘들어 언제 운동해? 처음엔 감독들이 검열 때문에 못 보여줬지만 나중엔 요령껏 남자배우 웃통을 벗겼지. 그럼 마누라가 “또 벗어? 자랑하려고?” 그랬어.(웃음)
이=두 분은 스타커플 1호신데, 요즘 후배 커플들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신=‘가정교사’ ‘맨발의 청춘’ ‘말띠 여대생’ ‘떠날 때는 말 없이’ 등 30여 편을 같이했지. 그래선지 동업자라는 생각이 많았어요. 이런저런 일들 겪으면서 준비된 신랑 신부였고. 요즘엔 장동건·고소영이 나이 있어 결혼해 그런지 듬직해 보이더라고. 아이를 제대로 낳겠다니까 그것도 참 예쁘고.
이=후배들에게 모범이 되시는 스타 커플이신데 그 비결은 뭘까요.
신=우리도 위기가 많았지. 특히 홀어머니랑 며느리 갈등이 많았어. 스타 커플은 워낙 양쪽이 노출되니까 평범한 트러블도 크게 확대되잖아. 남편 입장에서는 마누라가 집안을 지킬 수 있게 하는 딱 한 가지 믿음을 줘야 해. 우리 엄 여사는 내가 최소한 딴살림을 차릴 사람은 아니다, 그걸 믿었어. 실제 내가 그것만은 지켰고.
이=호칭이 엄 여사세요?
신=신상옥 감독이 최은희 여사를 최 여사라고 불렀는데 듣기 좋아서 나도 따라 불러요. 집사람, 안사람, 와이프 이런 건 싫고, 마누라도 정감 있고.
이=성공적인 결혼생활의 비결이 엄 여사라는 호칭에 있는 것 같은데요(웃음).
신=나는 지금 서울에 오피스텔이 있고 영천에 한옥집도 있고 대구도 오가면서 지내요. 부부가 따로 지내는 것도 능력이야. 별거설, 불화설 계속 나오지만 나름의 불협화음 속에서 굳건한 게 우리 부부예요.
이=70년에 빨간색 머스탱 타고 경부고속도로를 거꾸로 달리셨단 일화가 있던데요?
신=당시 이태원 집이 400만원인데 차 값은 460만원. 내 1년 소득세가 400만원이었어. 당시 가수 1위인 최희준이나 이미자 연간 소득이 10만원이 안 될 때였으니, 정말 돈을 많이 벌었지. 스티브 매퀸이 ‘블리트’에 이 차 타고 나온 걸 보고 반해서 맘을 먹었지. 당시 수입 차는 개인이 살 수 없어서 대우실업한테 100만원 주고 기업의 쿼터를 샀어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하는 날(1970년 7월 7일), 박정희 대통령이 부산에서 테이프 커팅하고 서울로 올라올 무렵 난 부산으로 내려갔어요. 추풍령 근처에서 싹 스쳐 지나갔는데, 박종규 경호실장이 신성일이라고 보고하니까 ‘조심해서 다녀라. 오래 살라 해라’하셨대. 알려진 것처럼 박통한테 혼나진 않았어요(하하).
이=요즘 젊은 후배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씀은요. 또 한국 영화의 지향점은 뭐가 돼야 하나요.
신=요즘 잘나가는 젊은이(스타)들 너무 기백 없어. 우리는 의상도 직접 챙기고 바빴지만 대신 독립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했어요. 요즘은 매니저한테 너무 얽매여. 나약해. 야심 있는 사람이라면 젊었을 때 건방지단 소리 들어봐야 해요. 물론 오래가면 안 돼. 빨리 철이 들어야지(웃음). 우리 때랑 비교하면 문화의 역할, 영향력이 커지고 인정받는 거 참 반가워요. 대신 60년대 이만희 감독이나 영화인들이 문화의식을 높이려 애쓴 노력을 잊어선 안될 것 같아. 이 말도 꼭 하고 싶은데, 제대로 영화인 소리 듣고 싶으면 제작을 하라는 거예요. 한국영화에서 제작해 돈 번 사람은 없습니다. 전부 다 망했지. 나도 제작하면서 돈 날렸고, 다들 다른 사이드 잡이나 극장으로 버틴 거예요. 그래도 돈 생각 말고 제작을 해야 합니다.
j 칵테일 >> ‘원조 얼짱’ 32세 차이 하희라와 극중 로맨스
극중 배역은 70대 전직 대학교수 신정일. 이름부터가 그렇듯이 제작진은 애초부터 그를 염두에 뒀다(이창동 감독의 부인 이정란씨가 작가다). 정일은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정력가. 매사에 정열적이고 뜻밖에 찾아온 죽음까지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29살 차이가 나는 40대 이혼녀(하희라)와 마지막 로맨스도 불태운다.
신씨는 “처음 감독이 시놉시스를 줬을 때 드디어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쾌재를 불렀어요. 게다가 작품까지 마음에 들어 행복했죠”라고 말했다. TV나 영화 모두 활동이 없어 그 안의 배우 본능이 근질거렸다는 뜻이다. “극중 정일은 50% 정도 나를 닮았어요. 특히 몸 관리 잘하고 젊은 여자 좋아하는 모습이 그래. 정일이 ‘외모를 가꿔야 젊은 여자들이 긴장하고 남자로 보지, 안 그러면 투명인간 취급한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정말 공감됐다니까. 하하.”
극중 29세, 실제 32세 차이가 나는 하희라는 그의 막내딸과 동갑이다. “내 나이라고 딸뻘과 연애 못할 이유가 있나요. 하희라씨와 연기하며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어. 감독한테도 하희라씨를 최대한 예쁘게 찍어달라고 했지. 내 눈에 예뻐야 시청자 눈에도 예쁘고, 상대 배우를 사랑해야 리얼한 연기가 가능하거든.”
그간 영화 속에서 181명의 여배우와 사랑을 나눴다는 그다.
“몇 년 전 배우 박중훈이 안성기·정우성·배용준 등과 골프 친 뒤 사우나를 갔다가 우연히 내 벗은 몸을 보고 놀라 ‘원조 얼짱 신성일의 재발견’이라고 칼럼을 쓴 적이 있어. 언제 어떤 배역이든 소화하고, 멋진 옷을 입고, 가리는 것 없이 맛난 음식도 한껏 먹으려고 하루 3시간씩 웨이트 트레이닝도 하지.”
“그간 TV나 영화에서 불러주지 않아 섭섭했다”는 그는 “젊은 친구들이 내 이름은 알아도 얼굴을 잘 몰라. 이제 TV에 나와 얼굴을 알렸으니 영화에도 출연할 수 있겠지”라며 현역을 갈구하는 열정을 감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