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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김정일의 대한민국 공격사 65년

화이트보스 2010. 6. 1. 14:08

김일성·김정일의 대한민국 공격사 65년

여객기 폭파·도끼 살해·군함 격침·납치… 피랍 어부만 3710명
6·25 이후 북한에 의해 납치됐거나 사망한 한국인은 최소 4119명에 이른다. 1953년 7월 정전(停戰) 이후 국ㆍ내외에서 납치된 인원만 3811명이다(2009년 발간 정부 통일백서). 여기에 북한의 도발에 의한 사망자가 군인과 경찰, 민간인을 포함해 최소 308명에 이른다. 이들은 1967년 해군 당포함 피격 침몰 사건(39명 사망)과 1968년 울진ㆍ삼척 무장공비 사건(18명 사망), 1987년 KAL 858기 폭파사건(115명 사망)과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파 사건(17명 사망), 이번의 천안함 사건(46명 사망) 등 북한의 테러, 정규군ㆍ무장공비에 의한 공격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이다. 이 숫자는 언론에 의해 드러난 사건 희생자만 집계한 것이어서 실제 수는 이보다 더 늘어날 수 있다. 대한민국에는 정확한 피해자 통계도 없다.


1950
6월 25일

6·25 전면전
개요_ 북한군이 당시 남북분단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을 감행했다. 선전포고도 없었다. 3년1개월2일간의 전쟁이 계속됐고,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조인하면서 전쟁이 중지되었다.
피해_ 사망 51만1488명(군인 13만7889명, 민간인 37만3599명), 납치·실종 41만2239명(군인 실종 2만4495, 민간인 납치·실종 38만7744명), 부상 68만367명(군인 45만742명, 민간인 22만9625명), 포로 8343명


1955
5월 28일


대성호 납북
개요_ 한국전쟁 이후 첫 한국 어선 납북사례
피해_ 선원 10명 납북


1967
1월 19일


해군 당포함 피격 침몰
개요_ 명태잡이 어선의 월경을 막기 위해 초계 중이던 당포함이 북한 동해안 동굴포대의 해안포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피해_ 승무원 79명 중 사망 39명, 부상 40명


1968
1월 21일

1·21 무장공비 침투 사건
개요_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무장공비 김신조 등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위해 비밀 침투했다.  서울 세검정고개까지 들어왔다가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수류탄과 기관총을 난사한 사건이다. 공비 31명 중 28명 사살, 2명 도주, 김신조 생포.
피해_ 최규식 종로경찰서장  순직, 다수의 민간인 인명피해


1월 23일

미 군함 푸에블로 납치 사건
개요_ 동해 공해상(公海上)에서 미국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가 북한의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의 위협에 의해 납치된 사건이다.
피해_ 납치 당시 사격을 받아 미군
1명 사망, 82명 귀환


10월 30일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
개요_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1·21사태의 실패를 만회하고, 남한에서 반정부 민중 봉기를 일으킬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울진ㆍ삼척 지구에 무장공비 120명을 침투시킨 사건이다.
피해_ 이승복 어린이를 포함 군경 총 18명 사망


1969
6월 12일


흑산도 간첩선 침투
개요_ 남파 간첩과 접선, 이들을 월북시키기 위해 전남 신안 대흑산도로 북한의 간첩선이 침투했다. 섬으로 상륙하던 북한 공작원 3명을 사살하고 다음날 도주하던 6명을 추가로 사살했다.


12월 11일

KAL YS-11기 납치 사건
개요_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을 태우고 강릉에서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의 KAL YS-11기가 대관령 상공에서 승객으로 위장해 타고 있던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해 납치됐다.
피해_ 승객 승무원 중 39명은 한국으로 귀환하고 12명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1970
6월 5일


해군 방송선 납치 사건
개요_ 우리 어선 보호를 위해 서해 연평도 해역에서 비무장 경계임무 중이던 해군 방송선이 북한에 의해 납치됐다.
피해_ 함장 정수일 중위를 포함 승조원 20명 납북


6월 22일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미수 사건
개요_ 한국전쟁 20돌을 앞둔 1970년 6월 22일 새벽 서울 국립현충원에 북한 공작원이 잠입, 현충문에 폭약을 장치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하는 요인 암살이 목표였다. 천행으로 폭약 설치 중 폭약이 폭발돼 미수에 그쳤다.


1975
9월 11일


전북 고창 무장공비 침투사건
개요_ 전북 고창의 전경대 해안초소에서 경계병이 해안 순찰 중 북한공작원 두 명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두 명 중 한 명을 사살했고 한 명은 도주했다.
피해_ 경계병 3명 전사, 2명 부상


1976
8월 18일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개요_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두 명이 북한군이 휘두른 도끼에 의해 살해됐다.
피해_ 한국군 네 명 부상. 미군 장교 2명 사망, 4명 부상


1977
7월 30일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미수
개요_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배우 윤정희 부부를 유고의 자그레브로 유인해 북한으로 납치하려 했다. 우리의 예술인조차 납치 대상으로 삼았던 대표적인 사건이다.


1977~1978
8월~8월


서해 고교생 납치
개요_ 1977년 8월과 1978년 8월 전남 홍도와 1978년 8월 군산 선유도에서 1년 사이 고교생 다섯 명이 실종됐다. 이후 고교생들이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됐음이 밝혀졌다. 2006년 5월 북한이 일본인 피랍자 요코다 메구미의 유골을 일본에 공개하는 과정에서 1978년 선유도에서 실종된 학생 김영남의 존재가 알려지게 됐다. 메구미가 김영남과 북한에서 결혼했던 것.
피해_ 고등학생 5명 납북


1978
1~7월


신상옥·최은희 부부 납치
개요_ 1978년 1월 14일, 홍콩에 머물던 배우 최은희씨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되었고, 같은 해 7월 19일 아내를 찾겠다며 홍콩을 찾았던 신상옥 감독 역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됐다. 신상옥·최은희 부부는 납치 5년이 지난 1983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빈의 미국대사관을 통해 극적으로 탈출했다.
피해_ 2명


4월 13일

고상문씨 노르웨이에서 납북
개요_ 서울 수도여고 교사로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연수 중 여권분실을 신고하러 한국대사관을 찾다 택시기사의 착오로 북한대사관에 들어가서 북한 공관원에 의하여 붙들려 납북됐다.
피해_ 1명
여객기 폭파·도끼 살해·군함 격침·납치… 피랍 어부만 3710명
1980
3월 23일


한강하구 무장공비 침투
개요_ 한강 하구에서 경계 근무 중이던 우리 초병이 경기 고양 법곳리 한강변으로 침투하던 무장공비 3명을 발견하고 전원 사살한 사건이다.


1981
6월 21일

충남 서산 무장 간첩선 침투
개요_ 북한 공작원 아홉 명이 사살되고 김광현은 생포됐다. 당시 김광현은 40대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 남파 공작원의 연령이 젊어지기 시작했다.


1982
5월 15일


2인조 동해안 무장공비 침투
개요_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지경리 해안으로 침투하던 북한의 무장공비를 해안 경계병이 발견, 교전 끝에 한 명은 사살했고 나머지 한 명은 도주했다.


1983
10월 9일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묘소 테러
개요_ 버마(현 미얀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 일행의 아웅산 묘소 방문 일정을 미리 알아낸 북한 공작원들이 묘소 내의 지붕에 폭탄 두 개를 설치해 터트렸다. 전두환 대통령은 당시 예정보다 현장에 늦게 도착해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피해_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자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이계철 주버마 대사,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 하동선 기획단장, 이기욱 재무차관, 강인희 농수산차관, 김용한 과기처차관, 심상우 의원, 민병석 주치의, 이재관 비서관, 이중현 동아일보 기자, 한경희 경호원, 정태진 경호원 등 17명 사망. 이외 14명 부상


12월 3일

부산 다대포 간첩 침투
개요_ 부산 다대포 해안에 매복근무 중이던 초병이 침투하는 간첩 두 명을 발견하고 격투 끝에 생포했다. 이들을 침투시켰던 반잠수정은  우리 고속정과의 충돌로 격침됐다.


1987
1월 15일


동진호 납북
개요_ 서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제27동진호가 북한에 의해 납북된 사건이다.
피해_ 어부 12명 납북


11월 19일

KAL858기 폭파 테러
개요_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KAL 858기가 미얀마 근해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북한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에 의해 폭파됐다.
피해_ 승객과 승무원 115명 전원 사망


1993
11월 30일


강화 교동도
무장공비 침투
개요_ 강화 교동도 빈장포 해안을 따라 침투하던 북한의 무장공비를 해안 경계병이 발견, 교전을 벌였다.


1995
10월 24일

충남 부여
무장공비 침투
개요_ 충남 부여군 정각사 뒷산에서 남파 간첩을 월북시키기 위해 내려온 무장공비 두 명을 초병들이 발견하고 교전 끝에 한 명을 사살하고 한 명을 생포했다.


1996
9월 18일


강릉 잠수정 침투
개요_ 공작원 침투 임무를 위해 내려왔던 북한의 잠수정이 속초 해역에 좌초됐다. 타고 있던 공작원들은 강원도 일대에 상륙했다. 전쟁에 대비하여 한국의 군사 시설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강원도에서 열리는 전국체전에 참석하는 주요 인사들을 암살하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었다. 우리 군경의 추적 끝에 13명을 사살하였고, 조타수 이광수를 생포했다.
피해_ 국군 11명, 경찰·예비군 2명, 민간인 4명 사망


1997
2월 15일

이한영 피살
개요_ 이한영씨가 성남 분당 자신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북한공작원 두 명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이씨는 김정일의 동거녀로 알려진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의 아들로, 1982년 10월 한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후 한 방송국 PD로 일하면서 ‘대동강 로열패밀리’란 제목의 책을 펴내 북한 정권의 실상을 세상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피해_ 1명 사망


1998
6월 22일

속초 앞바다 잠수정 침투
개요_ 강원도 속초시 동쪽 바다에서 북한의 유고급 잠수정 한 척이 어선이 내려놓은 꽁치잡이 그물에 걸려 표류하다 해군 함정에 의해 동해안으로 예인됐다. 잠수정 내에서 승조원과 공작원으로 추정되는 9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1999
6월 15일



1차 연평해전
개요_ 서해 북방한계선 남쪽 2㎞ 해역까지 내려온 북한 경비정 4척에 대해 해군 참수리급 고속정과 초계함 10여척이 두 차례에 걸쳐 선체를 충돌시키는 밀어내기식 공격을 감행했다. 충돌 공격을 받은 북한 경비정 등산곶 684호가 25㎜ 기관포로 공격을 가해 왔다. 북한 어뢰정 3척도 공격에 가담했으나 우리 해군 참수리급 고속정, 포항함의 반격으로 반파돼 퇴각했다.
피해_ 해군 7명 부상


2002
6월 29일


2차 연평해전
개요_ 북한 경비정 두 척이 남한 측 북방한계선을 침범, 기습포격을 가해 해군 고속정 참수리호가 피격됐다. 25분간 양측 함정은 교전을 벌였고, 참수리호는 격침됐다.
피해_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등 6명이 전사, 19명 부상


2008
7월 11일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 피살
개요_ 금강산 관광지구에서 한국 관광객 박왕자씨가 북한 군사 경계지역을 침범하였다는 이유로 북한 초병에 의해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피해_ 1명

 

2009
11월 10일


대청해전
개요_ 북한의 경비정이 우리 측의 경고를 무시하고 북방한계선을 침범. 이에 해군의 고속정이 경고사격을 가하자 북한 경비정이 남측 고속정에 조준사격을 하며 교전이 발생했다. 우리 해군의 사격으로 북한 경비정이 반파되어 북으로 퇴각한 사건이다.


2010
3월 26일


천안함 격침
개요_ 서해 백령도인근에서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북한 잠수정의 기습 어뢰 공격을 받아 두 동강이 나면서 침몰했다. 승무원 46명이 사망했다.
피해_ 천안함 승무원 46명, 해군UDT대원
1명(한주호 준위)


6·25 전쟁 이후 北 납치史

납치어선 132척, 어부 3710명… 납북 후 미귀환 어부도 440명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 정전 이후 북한은 끊임없이 우리 국민을 납치해 갔다. 통일백서에 따르면 북한에 의해 납치된 우리 국민은 무려 3811명에 이른다. 이들 중 3317명은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494명은 여전히 북한에 억류돼 있다. 이들 납북자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1955년 5월 28일 대성호(10명)를 시작으로 동해와 서해에서 납치된 우리 어민들이다. 통일부가 발간하는 통일백서 및 납북자 관련 단체들을 통해 확인되고 있는 것만 지금껏 어부 3710명과 어선 132척이 납북됐다. 피랍자 중 3270명은 송환되었으나 440명은 지금도 북한에 억류되어 있다.

북한의 우리 어선과 어부에 대한 납치는 1960년대 중·후반에 특히 극에 달했다. 납북자가족모임(대표 최성용)에 따르면 1968년 한 해에만 44척의 어선이 납치됐고, 1964년부터 1969년까지 6년간 무려 77척의 우리 어선이 납북됐다. 이렇게 납북된 어선의 어부 중 223명이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북한에 억류돼 있다.

세상에 알려진 통계치보다 납북 어선과 어부는 더 많을 수 있다. 통일부는 물론 납북자 단체들이 내놓고 있는 자료들의 현황이 서로 상이할 뿐만 아니라 이제껏 납북자와 관련한 정확한 실태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나 납북자 관련 단체들이 내놓은 자료를 통해 현재 억류 중으로 알려진 납북자들이 북한에 생존해 있는지, 그 생사(生死) 여부조차 현재로서는 확인해볼 뾰족한 방법이 없다. 현재 간간이 이루어지고 있는 납북자들의 귀환은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송환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다. 1967년 천대11호를 타고 있다가 납북됐던 어부 진정팔씨(2002년 귀환·2009년 사망), 1970년 봉산22호와 함께 납북된 이재근씨(2000년 귀환), 1973년 꼬막 채취선 대영호를 탔다가 납북됐던 김병도씨(2003년 귀환), 1975년 동해에서 납북된 천왕호 선원 고명섭씨(2005년 귀환)는 모두 목숨을 건 탈북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1960~1970년대 납북된 어부들이 현재까지 생존해 있다면 대부분 일흔을 넘긴 고령이다. 빠른 시일 내 분단이 해소되지 않으면 이들이 고향 땅을 밟을 가능성은 낮다.


/ 조동진 기자 zzang9@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