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 중인 대한민국 진단서ⓛ
written by. 이대용
월남패망과 한국의 유사증상 비교
이 글은 민주시민연합 전재혁 의장의 저서 「대한민국 어디로 가야 하나?」(도서출판 녹수) 제2장 '투병중인 대한민국 진단서'에 수록된 내용 일부다. 저자는 책에서 "좀 역설적 표현이지만 남한과 북한은 어디가 먼저 망하지 않느냐의 게임을 하고 있다. 북한은 자중지란으로, 남한은 북한의 공작에 의해 얼마나 견딜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라면서 前 주월(駐越)공사 이대용(李大鎔·예비역 육군준장)씨의 증언을 실었다.
李씨는 월남 패망 당시 주월 한국대사관 경제담당 공사로서 월남 패망 과정을 지켜보았고, 월남 패망 후 월맹군에 체포돼 5년 동안 억류 생활을 했다. '(증언) 월남패망과 유사증상 비교'라는 소제목의 글에서 이씨는 패망 당시의 월남 상황과 오늘의 한국 실정을 약간씩 대입하여 비교 설명했다.(여기서 • 표는 월남의 상황을, ◎표는 오늘의 한국 상황을 기술한 것이다) 코나스는 이 책에 수록된 이씨의 증언 부분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증언] 월남패망과 유사증상 비교①-前 주월공사 이대용
• 1954년 7월 21일 프랑스 원정군이 베트남에서 물러가면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 이남에는 자유 민주주의 정부인 베트남 공화국(월남)이, 그리고 이북에는 공산정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월맹)이 수립됐다.
청렴결백했지만 독재로 기울었던 고 딘 디엠 정권이 쿠데타로 쓰러지면서 수차에 걸쳐 군부 쿠데타가 반복되었다. 정권은 부패와 내부 분열을 거듭했다. 이 와중에서 월맹과 베트콩이 무력과 심리전으로 월남에 공세를 취하였고, 미국이 월남을 구하기 위해 참전하였다.
◎ 부패와 정치 불안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한국도 유사함.
• 미국은 직접전비(直接戰費)와 간접전비를 합쳐 연간 495억 달러(968년), 508억 달러(1969년)를 퍼부었고, 미군 병력도 53만 6,000명 선을 파병할 정도였다. 미국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진행되는 베트남 전(戰)에 진저리를 쳤고, 결국 수렁에서 발을 빼기 위해 1968년 5월 10일 월맹의 레둑토와 비밀 협상을 시작하였다.
◎ 미국과 북한의 관계에 있어서 미국은 다자협상과 핵문제를 주제로 하고, 북한은 북미회담과 불가침협정을 주장하고 있으나 미국이 베트남에서와 같이 허겁지겁 발을 빼는 형국은 아님. 다만 한미갈등의 폭에 따라 가변적인 상황이라고 볼 수 있음.
• 대북포용세력은 공산당의 프락치
파리에서 미-월맹 간 비밀 협상이 시작되기 전 해인 1967년 9월 31일에 벌어진 월남 대통령 선거에는, 무려 11명의 입후보자가 난립하여 이전투구(泥田鬪拘) 양상을 보였다.
이 선거에서 당선자인 웬반티우에게 차점(次點)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는, 선거 유세에서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이 이처럼 외세(外勢)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월맹과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 협상이 가능한데, 왜 북폭(北爆)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주장하며 미국과 월남 국민들의 반전(反戰) 여론을 자극했다.
◎ 한국에도 북한수령세력의 전략전술과 공작적 측면을 도외시한 평화주의자와 민족적 낭만주의자가 엄청 많음. 공개적으로 북한을 두둔하는 사람들이 세력화되어 있고, 간첩세력이 상당수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함.
북한수령세력의 대남공작, 해외 망명과 남북접촉 등의 과정에서 포섭된 고위층이 있을 수 있다고 봐야 하고, 정보기관이나 권력기관, 언론을 포함한 각계각층에 자생적 친북주의자 외에 북으로부터 지령을 받는 간첩이 상당수 있다고 볼 수 있음.
공개적으로 친북발언이 나오거나 북한에 이로운 발언이 현재의 대한민국 수준으로 나올 정도이고, 간첩을 잡을 수 있는 여건이 더욱 나빠지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는 것임.
• 대북포용정책의 명분 앞에 정부도 참여
한편 미국과 월맹이 파리에서 비밀 평화 회담을 진행 중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월남 내부에서는 국론(國論)이 두 갈래로 갈렸다. 여당은 강력한 반공정책을 주장하며 평화회담 참여 거부를 주장한 반면, 야당은 앞 다투어 포용정책을 들고 나와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회담 참여를 지지했다. 고민에 빠진 월남 정부는 어쩔 수 없이 회담 테이블에 나가야 했고, 1969년 1월 15일부터 미-월맹 2자 회담은 미-월남-베트콩(베트남 인민해방전선. 후에 베트남 임시혁명정부)-월맹의 4자 회담으로 확대되었다.
◎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나라를 피 흘려 지킨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을 일컬어 보수꼴통이니, 수구니 하는 모략적 선전이 보편화되어 가고, 대북포용이 시대의 추세인양 떠드는 것이 보편적 현상이 되고 있는 가운데 북과 직접 껴안는 세력이 있음.
•8개국이 조인한 평화협정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5년여 협상 끝에 베트남 전을 종식하는 역사적인 휴전회담이 열렸다. 이 휴전의 담보를 위해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20억 달러는 미국 직접원조, 20억 달러는 국제은행 IBRD 차관)의 원조를 제공, 이것으로 피폐한 월맹의 경제 재건을 돕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월남-월맹-베트콩(베트남 임시혁명정부) 등이 서명했다.
미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는, 보다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 4개국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이리하여 4개국 250명으로 구성된 휴전감시위원단은 하노이와 사이고, 그리고 휴전선을 감시하게 되었다. 한편 월맹에서는 하반라우 외무차관이 150명의 고문단과 함께 사이공에 체류했다. 일종의 인질 형식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믿지 못한 미국은 영국-소련-프랑스-중공 4개국의 외무장관까지 서명에 참여 시켰으니, 파리 휴전협정은 4+4+4 즉 무려 12개국이 담보하고 보증한 값비싼 서명문서였다. 그리고 월남과도 방위조약을 체결, 이제 미군은 철수하지만 월맹이나 베트콩이 휴전협정을 파기(破棄)하면, 즉각 해군력과 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키로 굳게 약속했다.
◎ 공산당과의 협정이나 협상안의 합의는 휴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는 국민이 태반임.
•미군이 남긴 막강한 무기
더북어 주월 미군이 철수하면서 그 동안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최신 무기까지도 모두 월남에 양도하여, 그 무렵 월남 공군력은 전 세계에서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처럼 철저한 제도와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에, 키신저는 주월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체제가 최소한 10년은 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 군 장비는 주한미군을 제외하고는 한국이 열세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음.
• 평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
수년간 미국의 골치 덩어리였던 베트남전이 휴전을 맞게 되면서 전 세계에는 평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닉슨의 데탕트 정책과 한반도에서 1972년부터 시작된 남북대화 등의 세계 평화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大勢)라고 믿었던 것이다.
◎ 오늘날 한국도 대북경계론에 대해 냉전세력이라는 공격이 행하여 질 정도로 남북한의 평화가 정착된 것으로 인식하는 착각이 대세를 이루어 가고 있고, 반미시위대는 반전평화라는 구호를 통해 남침전력을 갖고 핵개발을 하는 북한에 대해 평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을 경계하는 심리를 형성시켜 나가고 있음.
•불변의 무력통일 전략과 평화전술
그러나 결국 이 생각은 착각이었다. 그들은 미군의 북폭과 경제봉쇄로 피폐해진 나머지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하자 평화회담에 나섰으나, 그것은 전략은 변함이 없고 전술만 바꾼 셈이었다.
레둑토가 키신저와 평화 회담을 벌이는 한편에선 1950년대 중반에 수립된 대남 기본전략이 더욱 공고히 다듬어졌다. 그것은 「베트남에서 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중봉기를 일으켜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남반부에 창출하고, 무력으로 남반부를 해방시켜 조국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 수령집단의 대남전략은 변화가 없는 가운데 북한은 국제적 혁명역량의 약화와 인민의 굶주림 때문에 평화전술을 구사하는 것임. 국민은 이와 같은 공산당 특유의 전술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임.(계속) (konas)
이대용 (前 駐越 公使)
투병 중인 대한민국 진단서②
written by. 이대용
월남패망과 한국의 유사증상 비교
※ 아래에서 • 표는 월남의 상황을, ◎표는 오늘의 한국 상황을 기술한 것임.
[증언] 월남패망과 유사증상 비교② - 前 주월공사 이대용
• 체제의 우월성에 따른 대북 자신감
그래서 월남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경제력 우위를 바탕으로, 공산 측 지배를 월남 내에서 자연스럽게 소멸시킨다는 전략을 세웠다. 휴전 무렵 월맹은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매년 80만∼100만t의 식량 부족,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맹은 줄기찬 대남공세를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 북한이 년 평균 30만 톤의 식량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들어 북한의 전쟁수행능력을 과소평가하거나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전쟁 얘기를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북한수령집단은 6.15공동선언 이후 한국사회의 분열과 붕괴를 위한 공작지침을 지하세력에 하달한 바 있음.
• 요로에 프락치 침투, 정보 파악
휴전협정 이전부터 숱한 공산당 프락치들이 월남 곳곳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호치민이 1930년 2월 창당한 베트남 공산당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의장인 웬후토가 1962년 1월에 창당한 인민혁명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었다.
그래서 월남 패망 당시 월남에는 공산당원 9,500명과, 인민혁명당원 4만명, 즉 전체 인구의 0.5% 정도가 월남 사회의 저층(底層)에서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1969년 6월 6일 베트남 임시혁명정부로 개편될 당시 이 정부의 법무장관이었던 쭝뉴탄의 증언에 의하면, 캄보디아 국경선 근처 빈룽성 내의 지하 땅굴에 있던 혁명정부 청사에는 월남 정부의 각 부터와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회의 내용이 단 하루 후면 상세하게 보고 될 정도로 티우 정권의 핵심에 공산 프락치가 침투해 있었다고 한다.
1967년 대선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쭝딘쥬와, 당시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를 위시한 많은 정치인, 관료들이 모두 공산 프락치였음이 알려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었다.
◎ 과거정권 때에도 청와대 소식이 북한 당국에 보고되고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고, 지금은 남한 사정을 꿰뚫고 있을 것임.
• 반면 월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벌어질 때마다 대공(對共) 전문가들이 쫓겨나는 바람에, 월남 대공기관과 정보기관은 형해(形骸)만 남아 버렸다. 그들은 대(對)월맹 정보 수집은 말 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월남 내부에 침투한 공산 프락치 검거에조차도 무기력했다. 한 나라를 망하도록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보다도 그 나라의 정보기관부터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 지금 우리나라 정보기관과 대공기관이 정권의 부침(浮沈)에 따라 평지풍파를 겪으면서, 결국에는 간첩 하나 못 잡는 이빨 빠진 고양이로 전락하였음.
•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사회
휴전협정 이후 월남은 월맹보다 경제력은 무론 군사력에서도 월등히 앞서 있었다. 그래서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상황을 너무도 쉽게 낙관했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만의 하나 월맹군이 도발하더라도 즉시 미국의 해·공군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할 것이고 이후 대(對_월맹 경제원조도 중단하면, (당시) 세계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월등한 월남군 기동력과 화력으로 월맹군의 공세에 당연히 맞설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 누구도 공산군이 남침하리라고 믿지 않았다. 오랜 전쟁 후에 온 휴전 체제에서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래서 국방과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혹은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았다. 결국 그 믿음이 국방을 소홀히 하도록 하였고, 내부적으로도 극심한 정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 북한을 얕보는 사람, 남침 우려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안보라는 단어조차 사라질 지경에 놓여있고, 남과 북이 긴장관계 속에서 지내는 것을 원치 않는 사회심리가 보편화되고 있는 등 한국사회도 패망 직전의 월남과 유사함.
• 부정부패로 공산당 프락치 활동 공간 넓어져
1975년 9월에는 월남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정치인들은 대선 승리를 위해 이합집산과 분열, 반목, 대립과 갈등을 유감없이 연출했다.
고질적인 사회악이었던 뇌물과 마약, 매춘과 도박이 정치권의 혼란과 맞물리면서 마치 전염병처럼 전(全) 국토를 휩쓸었다.
정부의 부정부패는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계층 간 갈등이 조장됨으로써 공산 프락치들의 활동 공간은 점점 넓어져 갔다. 결국 이 선거가 최후의 자유선거가 되고 말았다.
◎ 김대중과 김정일이 서명한 6.15공동선언 이후 북한의 대남공작부서에서 작성, 한국 내 지하세력에게 지령한 내용 중에는 부정부패를 공격하여 대중성을 확보하라는 대목이 있음. 고위층 인사들마다 땅 투기 의혹이 있는 등 대한민국은 아주 기분 나쁜 나라임.
• 정규군 58만 명 중 10만 명이 위장휴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군내(軍內) 부정부패였다. 당시 월남 정규군은 58만 명이었는데, 이 중 10만 명이 뇌물을 주고 비공식 장기휴가를 받아 대학에 다니거나 취업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장군들이 운영하는 사(私)기업에 파견되어 무보수로 일하는 사례마저 있었다. 이처럼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는 군인들을 가리켜 당시 월남에서는 「유령 군인」, 「꽃 군인」이라 불렀다.
비록 독재로 기울기는 했지만 대단히 청렴결백했던 고 딘 디엠 대통령 시절, 월남군은 용맹하게 공산군과 맞서 싸워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그 덕택에 휴전 당시 월남은 전 인구의 90%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지도층의 부패였다. 티우 대통령의 사위가 군에 입대했는데, 그는 이름만 군적(軍籍)에 둔 채 외국 유학을 떠나버렸다. 대통령 사위가 그럴 정도였으니, 가른 고관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도층 아들들은 입대 영장이 나오면 일단 입대한 다음 뇌물을 써서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월남 지배층은 사리사욕과 부정축재,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천민자본주의의 극단을 보였다.
반면 「국가에 대한 의무」라는 말에는 코웃음을 치며 등한시함으로써 체제파괴 세력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군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평화무드로 공산군에 대한 경계심도 사라졌다. 이것이 월등히 높은 경제력과 막강한 화력을 가졌던 월남 군대가, 식량 부족으로 고민하던 월맹군에게 허수아비처럼 붕괴된 가장 큰 원인이다.
◎ 월남 군대처럼 부패하지는 않았다 해도 오늘날 사회 지도층 인사와 그 아들들의 병역기피 사례가 언론에 공개되는 모습은 월남군부와 같은 사기저하의 원인이 될 수 있고, 더욱이 군 입대 거부운동, 교전 장병의 사망에 무심한 사회분위기, 친북이적단체의 공공연한 활동 등은 정신전력의 약화와 젊은이들의 자기희생정신의 쇠퇴를 초래하고 있음.
•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를 좌익이 장악
한편 이 무렵 월남에서는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님 등이 모여서 「구국(救國) 평화 회복 및 반(反)부패 운동 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 사회단체 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일종의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문제는 이 순수한 반부패 운동 조직에 공산당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반체제 세력으로 변질시켜 버렸다는 점이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100여개의 애국단체, 통일 운동단체들이 수십 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 승려, 학생 그리고 좌익인사들이 한데 뒤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 운동, 문화운동 등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운동단체들을 총 동원하여 티우 정권 타도를 외치고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1975년의 월남은 월맹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공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것 이상으로 이들 100여 좌익 단체의 선전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1974년 10월, 월남에서는 유전(油田)이 발견되어 온 국민이 흥분에 휩싸였다. 나라 전체가 평화 무드에 젖어 있던 상태에서 석유까지 발견되자 사람들은 더욱 자유분방함과 안일주의에 기울어 갔다.
◎ 한국사회의 시민운동권이 북한비판을 전혀 하지 않고, 반미반전 촛불시위와 과격시위 조종, 앤티 조선운동 등을 하고 있으며, 체제수호와는 무관한 대북포용론을 기저로 하고 있음. (계속) (ko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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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前 駐越 公使)
투병 중인 대한민국 진단서③
![]() ![]() 2006/02/13 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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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 중인 대한민국 진단서③ | |||||
written by. 이대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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