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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세, 열린 보수여야 산다

화이트보스 2010. 6. 9. 13:42

낮은 자세, 열린 보수여야 산다 [중앙일보]

2010.06.08 19:36 입력 / 2010.06.09 01:00 수정

“이번 지방선거 결과를 보면서 일종의 전율을 느꼈습니다. 2002년 대선의 판박이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다음 선거에서 보수 여당이 정권을 내놓는 상황이 올 것입니다.” 그저께 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가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2002년 대선, 이 대표로선 정말 통탄할 수밖에 없는 역전패였다. 지난 칼럼에서 거론했던 김대업 병풍 사건과 젊은 세대의 반란이 가장 큰 패인이었다. 이번 지방선거도 트위터라는 신병기 동원에 20, 30대는 물론이고 40대까지 동참하면서 선거 결과가 출렁거렸다. 젊은 세대의 이탈 현상이 계속될 경우 보수 정당의 정권 재창출은 어렵다고 보는 게 이 대표의 심중일 것이다.

나 또한 이 대표의 우울한 전망에 동의한다. 지방선거란 현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다. 여당엔 불리하고 수세적인 선거다. 해서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선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완패했다. 야당인 한나라당이 광역단체장에서 기초의회까지 싹쓸이를 했다. 이에 비하면 이번 지방선거는 천신만고 끝에 여당이 서울과 경기도를 확보했으니 절반의 성공이라 할 만하다. 다만 문제는 지역투표에서 세대투표로 이미 6년 전 바뀐 현상을 보수정권이 지난 지방선거와 대선의 압승으로 오만과 무능에 빠져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특히 경기도의 경우 기초단체장이나 의원 공천에 좀 더 신중했더라면 이런 참패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 같은 백면서생이 봐도 턱도 없는 인사를 공천해 놓고 당선을 기대했으니 이는 정치현실을 아는 보수 정당이라 할 수 없다. 국회의원이 광역 기초의원과 단체장 공천에 막강한 역할을 하면서 제 논에 물 대기 식으로 사유화했다. 자신에게 충성할 자만 고르다 보니 공천 싸움이 일어나고 결과적으로 보수 성향 지역에서도 패한 결과가 됐다. 보수의 탐욕이다.

경기도에서 일어난 무상급식 바람은 진보파 교육감 출현을 일찌감치 예고했다. 지난해 가을부터 불기 시작한 이 바람을 알면서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고, 뻔한 낙선을 알면서도 보수 후보들이 서울과 경기도에서 6~7명씩 난립하는 욕심을 보였다. 보수의 오만이 탐욕과 무능을 낳았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총리, 당 대표, 대통령실장이 번갈아 사의를 표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보다 근원적인 프레임의 개선이 필요하다. 낮은 데로 임하는 보수의 겸허한 자세 없이는 백전백패라는 사실을 이번 선거에서 학습해야 한다.

보수는 겸허하면서도 열려 있어야 한다. 열린 보수여야 오래 간다. 열린 보수는 사회통합적이다. 사회통합위원회가 거창하게 발진했다지만 그런 위원회 정치가 아니라 실질적인 보수 대화합이 긴요하다. 친이·친박으로 나뉘어 선거를 치렀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이젠 당내 화합 없이는 야당이나 진보세력의 추궁과 압박을 이겨낼 힘이 없다. 박근혜 전 대표뿐만 아니라 보수를 자처하는 모든 세력이 연합해야 한다. 한 발 삐끗하면 레임덕이다. 노무현 정권이 지방선거에서 완패한 지 두 달 후 개각을 했다. 회전문식 인사에 정권실세를 전면 배치하면서 노 정권은 급전직하의 레임덕에 빠져들게 된다. 레임덕 없는 정권이 되기 위해서도 사회통합적 열린 보수여야 한다.

‘품격 있는’ 보수 학자 김일영 교수는 지난해 49세로 너무나 아쉽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역저 『건국과 부국』은 우남 이승만의 건국 초기 농지개혁을 포함한 건국의 기초사업 연구와 박정희 시대의 부국을 향한 집념에 대해 정말 품위 있는 분석과 해석을 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건국과 부국의 길을 지나 강국의 길을 가야 한다. 한 나라를 강국의 반석 위에 올려놓으려면 적어도 10년, 아니 20년의 세월이 걸릴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지금의 시점에서 한 정권의 선거 승패에만 매달려 있을 때가 아니다. 강국의 길을 걷기 위한 정초(定礎) 정지(整地)작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큰 틀에서 보수 대통합을 일궈내는 과제가 더 시급하다.

이 정권이 언제 어떤 개각을 할지 그것은 그들이 책임질 몫이다. 다만 세종시·4대강 추진에 경제정책도 중단 없이 몰아가고 G20도 성공적으로 개최해야 하니 대통령 복심을 가장 잘 아는 코드 인사를 한다고 할 때, 지난 정권과 유사한 궤적을 그릴 것임을 상기코자 한다. 비록 약한 듯하면서도 포용적인 인사, 일부 진보세력까지 포용하면서 보수대연합을 이뤄내는 낮은 곳으로 임하는 열린 보수가 돼야 레임덕을 막으면서 다음 보수정권에 바통을 넘겨주는 교량역을 담당할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함께 보고 함께 걷는 것 아닌가.

권영빈 경기문화재단 대표, 전 중앙일보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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