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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의 영령들이 보고 있을진대

화이트보스 2010. 6. 10. 15:47

호국의 영령들이 보고 있을진대 [중앙일보]

2010.06.10 00:25 입력 / 2010.06.10 00:25 수정

연애 중이던 내 친구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국기를 향해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며 국기하강식이 있던 1970년대 권위주의 시대의 저녁 무렵이었다. 여친은 그냥 가자고 하여 밀고 당기는 언쟁이 붙었다던가. 행인들은 흥미롭게 쳐다보았을 터이고. 실연(失戀)을 감수하며 그가 선택한 것은 대한민국, 태극기, 애국심이었다고 했다.

호국영령을 기리는 달 6월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을 우러르는 현충일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만나며 옛날 친구의 일이 떠올랐다. 수많은 아파트를 둘러봐도 게양된 태극기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살기에 너무 바빠진 탓일까. 서랍장에 누여둔 태극기를 더 이상 꺼내지 않아도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펄럭이며 잘나가고 있기 때문일까. 어쩜 탈민족이 운위되는 글로벌시대, 개인 우선의 시대, 오락이 주도하는 시대에 진부한 주제가 되어버린 국가, 태극기, 애국심은 신장개업이 요구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국가라는 것이 멀리 있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국가는 김연아를 따라 밴쿠버 빙판을 가르고 세계인의 숨죽인 주목 속에서 예술의 극치가 되는 것이다. 태극기는 오은선 대장을 따라 안나푸르나 정상에 등정하여 히말라야 8000m급 14봉 완등을 완성하며 헐떡이는 숨소리를 전해오고, 애국심은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의 국민이었기에 소리치며 얼싸안고 흘린 눈물이었다. 수천, 수만 번 넘어지면서 도달한 연속 3회전 점프는 국민에게 기쁨을 주겠다는 각오가 일으켜 세웠고,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를 두려워하면서 오른 만년설의 최고봉에서 펼친 태극기는 대한민국이 보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 선수 모두의 몸값이 외국 팀 한 명의 액수보다도 적은 상황에서 월드컵 4강에 오른 것은 국민들의 염원과 하나가 되겠다는 공동체 의식 때문이었다. 팀원 간의 역할, 책임, 협력, 희생이 어우러질 때 선수 개개인의 산술적인 합을 훨씬 능가하는 전체로서 힘을 발휘했고, 그라운드의 선수 합은 11이었어도 팀으로서의 합은 무한대가 되었던 것이다.

천안함 침몰은 냉혹한 휴전 상태와 국제정치 지형에서의 대한민국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아들 46명의 생명을 앗아간 사건은 북한의 어뢰 공격에 의한 것으로 외국 전문가를 포함하는 조사단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했는데 미군에 의한 오폭(誤爆), 한반도의 긴장 고조를 위해 미군이 저질렀다는 음모설, 짜맞추기, 날조, 자작극, 증거 불충분이라는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나치스에 의한 유대인 학살인 홀로코스트도 날조라고 주장하는 이들처럼 객관적으로 입증된 사실을 거부하는 병적 부인주의(denialism)에 빠진 자들이나 북한 정권을 추종하는 단체와 인사들은 그렇다 치자. 우리 사회가 민주적 공동체로 진보하는 데 기여해온 잡지에도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는 주장이 실리고 온라인을 돌아다니는 상황은 자유방임에 지친 지식인의 오만이라고 해도 섬뜩한 일이다. 일부 정치인과 정당은 지방선거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이 사건의 책임을 대한민국에 묻는 논평들을 내고 있다. 선거도 정당도 정권도 유한하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는 무한한 것임을 잊은 작태이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안보를 정치적 이해에 관련시키는 망발은 실로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온갖 간난(艱難)으로 자신과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되면서 나라를 지켜온 분들께 더 이상 망령된 일은 없을 것이다.

“앉은뱅이가 되어서야/옥문을 나서니/쑥밭 된 집안 남은 거랑 없어/농사 아니 지으니 무엇 먹으며/빚을 수도 없는 술 어찌 마시리/친척들도 그 모두 굶주리는 꼴/솟구치는 눈물에 얼굴 가리고/아내도 집도 없어진 지금/어느 겨를 일신의 안정 꾀하리/…” (『김창숙』, 한길사). 훗날 일제의 고문으로 걷지 못하게 된 김창숙 선생의 어머니는 유림(儒林)의 사명을 받아 아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떠날 때 어머니를 걱정하자 “네게 지금 천하 일을 경영하면서 오히려 가정을 잊지 못하느냐”고 단호하셨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대한민국의 혼을 지킨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는 순국을 앞둔 아들에게 “앞으로 판결 선고가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하라”고 하셨다(안중근, 예술의전당).

태극기를 보기도 애국가를 듣기도 어려워진 세상이지만 나라를 지키고 번성케 하는 일은 우리 스스로를 위하는 일이다. 천안함 침몰을 규탄하는 국회의 공동결의안 하나 못 만들고, 유엔과 중국에 구애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처지가 착잡하기만 하다.

김정기 한양대 교수·신문방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