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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의 어머니들이여

화이트보스 2010. 7. 19. 10:52

천안함의 어머니들이여 [중앙일보]

2010.07.19 00:10 입력 / 2010.07.19 09:52 수정

천안함이 다시 침몰하고 있다. 함미와 함수가 올라왔을 때만 해도 한국 사회엔 어느 정도 단호한 정기(精氣)가 있었다. 그런데 폭침 4개월도 안 돼 기력은 수그러들고 패배주의·기회주의·무사안일주의만 여름철 대장균처럼 늘고 있다. 천안함을 폭침한 건 북한 어뢰지만 두 번째로 침몰시킨 건 다수의 유약(柔弱)과 소수의 미망(迷妄)이다.

대통령이 보여주어야 할 것은 눈물이 아니라 행동이다. 그는 5월 24일 호국영령과 국민 앞에서 단호한 조치를 약속했다. 하지만 그 말은 허공에 흩어지고 있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은 놀라울 정도로 유약했다”고 비판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중국이 거부권을 행사하더라도 의장성명 대신 결의안을 모색했어야 했다.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반대는 역사의 기록으로 남겼으면서 중국의 반대는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가. 유엔 조치에 따라 대북 심리전과 서해훈련도 쪼그라들고 있다.

대통령이 흔들리니 군대는 눈치만 보고 있다. 응징의 작전과 훈련은 없고 회의만 한다. 이러다가 한국군은 ‘회의·인양 전문 군대’가 될 판이다. 북한의 소행임을 죽어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군이 개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 군함 9척이 침몰하고 군인 수천 명이 죽거나 다쳤다. 미국인은 일본을 규탄했지 군을 몰아붙이진 않았다. 한국에선 많은 이가 북한에 대해선 침묵하고 군을 물어뜯고 있다.

제1 야당 민주당이 북한 소행을 인정하지 않고 대북 규탄 결의안에 반대했다. 옆집 깡패한테 어머니가 당했는데 장남이 깡패를 응징하지는 않고 ‘무능한 가장’이라며 아버지를 공격하는 꼴이다. 장남이 그러하니 조카뻘인 참여연대도 덩달아 미망의 춤을 추고 있다. 이들이 이런 춤을 추니 중국이 한국을 무시하고 북한이 남한을 농락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같으면 이런 정당이나 시민단체는 존립 자체가 위기에 처할 것이다. 이들의 맹북(盲北) 미망은 한국의 정신사에 충격으로 남을 것이다.

대통령은 약하고, 거대 여당은 정신적 발육장애에 걸려 있고, 제1 야당은 남과 북 사이에서 헤매고 있다. 군은 위축돼 있고 반(反)정부 시민세력은 군을 공격하고 북한을 방어한다. 이런 나라에서 누가 김정일 정권의 사죄를 받아낼 것인가.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때는 박정희 대통령, 1996년 강릉 잠수함 침투 때는 김영삼 대통령이 북한의 사과를 받아냈다. 이젠 누가 할 것인가.

김정일이 가장 무서워할 존재는 누구일까. 천안함의 어머니들 아닐까.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고 했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가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눈과 입은 어떤 분노보다 강할 수 있다. 지구상의 많은 어머니가 강했지만 아르헨티나 ‘5월 광장의 어머니들’은 특히 그러했다. 1976~83년 군부정권의 폭정은 ‘추악한 전쟁(The Dirty War)’으로 불린다. 납치·고문·살해·실종의 희생자는 1만2000여 명(인권단체 집계: 3만 명)이나 됐다.

77년 4월 10여 명의 실종자 어머니가 대통령궁 앞에 있는 ‘5월 광장’에 나타났다. 기저귀천으로 만든 하얀 스카프를 쓰고 그들은 광장을 조용히 돌기 시작했다. 30년 동안 매주 목요일 어머니들은 광장에 모였다. 구호나 절규 대신 작은 플래카드만을 들었다. “(아들이여) 산 채로 돌아오라.” 어머니는 강했고 역사는 응답했다. 83년 군정이 무너졌다. 이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국 마지막 군정 대통령 비뇨네를 비롯한 적잖은 학살자가 심판을 받고 감옥으로 갔다.

천안함의 어머니들은 아들의 시체(屍體)를 받았으니 “산 채로 돌려달라”고는 못할 것이다. 대신 그들은 “김정일은 사죄하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어머니들이 매주 서울광장을 돌면 어떨까. 아들의 해군 스카프를 두르고, 아들의 사진을 안고…. 모성(母性)의 어뢰가 남과 북의 심장을 때릴 것이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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