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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이 서서히 대장정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미 개통된 70㎞에 덧붙여 130㎞의 새 구간에 대한 노선 조사와 정비사업이 올 가을에 마무리될 계획이다. 일부 섬진강변의 난구간과 순환코스 등의 문제로 완전 개통이 내년으로 미뤄지는 바람에 다소 아쉬운 감이 없지 않지만 국내 최장거리 도보 트레일이 그 윤곽을 드러냄에 따라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소설가 김훈·공지영과 하동 예정구간 답사
우리나라의 대표적 소설가인 김훈·공지영씨 등이 새로 이사한 하동군 화개면의 우리 집에 내려와 1박2일 머물며 하동 지역의 예정 구간을 걸었다. 그야말로 오뉴월 지리산의 푸른 눈빛과 섬진강의 여유로운 마음이 어우러지는 황홀한 길이었다.
이팝나무꽃과 철쭉꽃, 그리고 자줏빛 붓꽃 등 야생화가 신록의 연푸른 그늘 속에서 피어나고 온갖 새들이 지저귀며 함께 길을 나서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아주 천천히 걸으며 쉴 때마다 하동의 자랑인 야생 녹차의 햇차를 마시니 서로 눈빛만 보아도 절로 미소가 번지고, 몸속의 피마저 신록으로 흐르는 듯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태백의 시 ‘산중문답(山中問答)’의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 ▲ 소설가 김훈(앞줄 왼쪽)과 공지영(앞줄 오른쪽)이 지리산 둘레길 예정구간을 1박2일 동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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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젊은 20대일 때 눈 밝은 선배에게서 호를 하나 받은 적이 있는데 청람(靑嵐)이었다. 호를 갖는다는 게 왠지 쑥스러워 잘 쓰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에 고이 간직해왔다. 그런데 해마다 오뉴월이면 청람이란 호가 불쑥불쑥 두더지처럼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곤 했다. 청람의 뜻은 ‘오월에 이는 푸른 산기운’이다.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 신록의 산색을 낳는 미완의 바람으로서 연초록에서 초록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산기운인 것이다. 결과만 좇지 말고 내내 과정을 사랑하라는 뜻이 너무나 좋아서 오히려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날마다 첫 마음,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뜻으로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부처님 오신 날이 산색과 더불어 함께하니 이 얼마나 좋은가.
남원시 운봉읍의 바래봉이며 하동군 악양면의 형제봉(성제봉), 그리고 세석평전의 붉은 철쭉꽃들이 신록의 산색에 슬프디슬프고, 아프디아픈 화룡점정을 찍으니 비로소 지리산은 지리산다워지는 것이다.
- ▲ 연초록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있는 지리산 둘레길 하동 개통예정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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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수월암의 연관 스님이 운서 주굉의 <죽창수필>을 다시 선역해 펴냈는데, 그 제목이 또한 <산색>이다. 나는 이 책의 첫 장을 들여다보다 단 두 문장에 무릎을 치고 말았다.
“날쌘 말은 채찍 그림자만 보고도 내달린다. 송곳이 살갗에 꽂혀서야 알아채는 것은 둔한 말이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경구인가. 신록의 산색을 보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무엇을 보고 살아 있음의 묘미를 알아채겠는가. 지금은 다만, 잠시라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저 산색이 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굳이 송곳에 깊이 찔려야 알겠는가. 피를 토하는 철쭉꽃들을 연초록의 산색이 슬그머니 감싸주고 있으니 철쭉꽃 또한 더욱 붉을 수밖에.
- ▲ 5월 신록이 푸르고 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지리산길을 걸으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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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아쉽지만 1박2일을 걷고 다음을 기약한 소설가 김훈·공지영의 지리산 둘레길에 대한 당부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다.
“천천히 만들고, 천천히 걷자. 무에 그리 바쁜가. 그 과정이 중요하니 행여 개통된 뒤에도 건강상의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모두들 한번쯤은 생을 걸고, 인생을 걸고 걸었으면 좋겠다. 앞만 바라보고 뛰어가던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례자의 심정으로, 백척간두 진일보의 심정으로,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는 인생의 대전환기를 꿈꾸며 한 달 정도 시간을 내어 걸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