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주자를 임명해 키운다는 생각은
허황된 것 누가 키우면 정치인은 크지 않고 작아진다
엊그제 서울 광화문에서 웬 키 크고 잘 생긴 사람이 수행원 몇 명을 데리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해 주위의 눈길을 끌었던 모양이다. 그 광경을 본 한 사람은 "처음엔 누가 선거 유세를 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김태호 국무총리 내정자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김 내정자는 지금 성취감과 기대감에 한껏 고양돼 있을 것이다.김 내정자에게 실례가 되는 얘기이지만 국무총리는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자리가 아니다. 필자는 많은 총리를 보았고, 실제 총리실 취재도 해보았다. 총리는 헌법상 각료 제청권이 있고, 내각 통할권이 있다. 그러나 과거 어느 총리가 헌법상 권한의 '100분의 1' 정도를 독자적으로 행사해보려다가 다음 날 대통령에게 경질당했다. 지금 총리들이 행사하는 권한은 '진짜'가 아니다. 필자는 총리는 없어도 큰 문제는 없을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국무총리는 내정 발표가 나올 때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만 정작 국회 청문회를 통과해 정식 임명이 되면 며칠도 안 돼 국민들에게서 잊혀진다. 평상시엔 사람들은 국무총리가 누군지, 뭘 하는지 관심도 없다. 평상시에도 주목을 받은 총리는 김대중 정권 때의 김종필 총리밖에 없지만 그는 대통령과 공동 정권을 만든 특수한 경우였다.
총리가 계속 주목을 받으려면 두 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 때 이해찬 총리처럼 실제 힘을 위임받아 행사하는 경우다.
그 좋지 않았던 결말은 다 알고 있는 것과 같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렇게 할 생각도 없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통령과 맞서다가 그만두는 길이 있다. 그러면 정치적 주가(株價)는 상당히 올라간다. 두 명의 총리가 그렇게 해서 한때 지지율 선두를 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중 끝까지 성공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총리를 해보고 싶어하는 것은 체급이 높아질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총리를 대통령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삼아보려 한 사람은 여럿 있었지만 전원 실패했다. 그 중 한 사람은 나중에 제 고향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낙선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어찌어찌 대통령 선거에 출마는 했지만 군소후보 간 TV 토론에 나가야 했다. 거기에 나온 사람 중엔 선거 사기로 구속된 종교인 등 별 사람이 다 있었다. '총리 출신'의 체급이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코미디에 가까웠던 그 토론회 녹화테이프를 한번 구해 봤으면 한다. 정운찬 전 총리는 좋은 카드였지만 막상 총리가 되자 지지율이 1%를 넘기 힘들었다. 국민이 총리라는 자리에 보내는 존경이나 지지는 1%도 되지 않는다.
왜 국무총리 출신 대통령이 한 명도 없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기본적으로는 현직 대통령이 어떤 사람을 지정해 키워서 다음 대통령으로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비현실적인 것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아예 그런 시도도 못해봤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해보려다 일을 망치고 정권이 넘어갔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대통령은 전부 제 힘으로, 제 스스로 큰 사람들이다. 달리 말하면 이 네 사람은 아무도 키워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된 것이다.
지금 여당의 대통령 예비후보들도 전부 자신들 스스로 지지 기반을 만들었다. 박근혜 전 대표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오세훈법'이란 강력한 정치자금법을 만들고 서울 강남의 안정된 지역구를 버렸다. 그렇게 얻은 지지로 이번 지방선거의 야당 바람 속에서도 당선될 수 있었다. 국민이 이 과정을 보면서 지지가 쌓이는 것이다.
김문수 경기지사는 젊은 시절의 고난스런 노동운동, 누가 봐도 어려운 수도권 지역구에서의 연속 승리, 뚜렷한 소신으로 지금의 지지를 만들었다. 그가 치렀던 다섯 차례 선거에 비하면 영남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치르는 선거는 선거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정몽준 전 대표 역시 월드컵 유치와 전(前) 야당 대선 후보와의 맞대결 승리라는 자산을 갖고 있다. 이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누가 임명한 사람이 아니라 유권자에 의해 뽑힌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번 개각에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등용됐으면 하고 바랐다. 국정에 젊은 바람,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으면 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이 대통령이 김 내정자를 고른 의미가 그를 대선 후보로 키워서 누구의 대항마를 만든다는 허황한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김 내정자로 인해 실제 국민이 신선한 바람, 전에 없던 참신한 기풍을 느끼게 된다면 김 내정자는 누가 키워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대선 주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