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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회사 '일룸' 양영일 대표이사의 집

화이트보스 2010. 8. 25. 10:28

가구회사 '일룸' 양영일 대표이사의 집
20~30년 된 책장·의자 등 곳곳에 시대별 제품들… "몇년 지나니 장단점 알게 돼"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시스템 가구회사 '일룸' 대표이사의 집이니, 첨단 가구가 가득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이름만 들어도 어지러운 값비싼 예술 가구들을 실컷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가구의 향연(饗宴)은 없었다. 양영일(62) '일룸' 대표이사 겸 '퍼시스' 부회장의 집엔 다만 높낮이가 다르고 비례가 맞지 않는 옛날 가구들이 애써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좀 어색해 보일 거다. 이게 한꺼번에 잘 짜맞춘 게 아니라 때마다 하나씩 새로 놓아서 그렇다." 양 부회장의 말이다. 1970년대 초 가구회사에서 처음 일할 때부터 하나씩 만든 가구들. 그는 이 가구들을 그냥 내다 파는 데 만족하지 않고 꼭 직접 써본다. 집이 곧 그만의 '가구 실험실'이다. 이 때문에 그의 집은 어딘지 어색하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는 공간이었다.

가구는 직접 써봐야 안다… 가구 실험실 같은 서재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에 있는 지하 1층, 지상 2층짜리 단독주택. 서울 강남 대치동에 살던 그는 "산이 보이는 집에서 지내고 싶다"는 아내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여기저기 둘러보다 이 집을 발견하고 10년 전 이사 왔다.

집을 옮기면서 마음먹은 건 세 가지다. 첫째는 거창하고 화려하게 꾸미지 말자, 둘째는 내가 만든 가구를 모든 방과 거실에 두고 쓰면서 장단점을 계속 평가해 보자, 셋째는 자연을 창 밖으로만 바라보는 집이 아닌 가까이서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집으로 꾸미자였다. 이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욕심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게 그의 서재다.

반지하방을 개조해서 만든 서재. 하지만 바깥에 나무데크를 늘려 베란다를 넓게 만든 덕에 햇살이 넉넉히 들어온다. 가운데 놓인 사무용 의자는 1988년 만든‘가보트’다. 양영일 부회장이 침대 겸 소파에 앉아 그가 디자인했던 연극 무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반쯤 지상에 노출돼 있는 지하층을 서재로 만들었다. 베란다가 없던 방이었는데 건물 밖으로 나무데크를 덧붙이고 늘려 베란다가 있는 공간처럼 만든 것도 특색이다.

서재 책장은 칸칸이 높낮이도 다르고 모양도 조금 어색하다. 아예 1980년대 초 나온 책장 '보스턴'으로만 꾸몄으면 좋았으랴만, 여기에 '알투스'란 책장도 더하고 '게티스'란 책장도 놓고 쓰기 때문이다.

"보스턴을 쓰면서 하나 둘 늘려나가다 보니, 이 가구가 처음부터 세트로 놓고 쓰기엔 참 좋은데 하나씩 늘려 쓰기엔 조금 불편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만든 게 게티스다. 패널을 덧붙이지 않아도 한 칸씩 더 늘려 쓸 수 있도록 깔끔하게 만들었다. 보스턴은 또 어디에도 어울리지만 귀엽고 아기자기한 맛은 없었다. 그래서 만든 게 알투스다. 모서리를 굴려 어린이 방에도 어울리는 가구로 만들었다." 양 부회장의 말이다.

컴퓨터 책상도 그가 직접 쓰면서 고쳐 신제품을 만들었다. 작년엔 접어 쓸 수 있는 책상 '줌(Zoom)'을 내놨다. 컴퓨터 책상으로 안 쓸 땐 접어서 보통 책상처럼 쓰다가 필요할 때 위판을 펼쳐 놓으면 키보드와 모니터를 함께 놓을 수 있는 책상으로 변한다. "하루 이틀 사무실에서만 쓰면 불편한 걸 모른다. 집에서 1년 2년 두고 써야 단점이 보인다."

방에 있는 의자들도 나이가 다르다. 서재 책상에 두고 쓰는 의자는 '가보트'. 1988년에 만든 사무용 의자다. 서재 입구에 놓인 깜찍한 1인용 소파 '페블'은 올해 나온 것이다.

한꺼번에 싹 바꾸지 않고 하나씩만 바꾼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이 이렇게 가구를 바꾸니까"라고 말했다. "한꺼번에 큰맘 먹고 돈을 들여 가구를 전부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다들 하나 바꾸고 또 고민하다 하나 바꾸고 하지. 나도 그렇게 해봐야 소비자들이 겪는 고충이 보이지 않겠나?"

양영일 부회장 자택 외관. 목조건물 외관은 나무데크를 달아 넓혔다./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손을 뻗으면 초록을 만질 수 있는 집

양 부회장의 집안 내력도 독특하다. 동생은 서울 신사동에 있는 유명 가구회사 '웰즈'의 양영원 대표. 이 집의 네 형제 모두 우리나라 가구회사 대표 또는 중역으로 일한다. 아내 역시 모두 미대 또는 디자인학과를 나왔다. 자녀도 하나같이 디자인 공부를 한다. 집안 사람들이 다 같이 모이면 늘 하는 얘기가 가구와 건축, 그리고 산업디자인이다. "좀 재미없을 수도 있는데, 우린 그게 낙이다. 이 집에 모여서 종종 술 마시면서 가구 얘기만 하다 하루를 보낸다."

사람 좋아하는 탓에 아내와 그는 집을 여러 사람을 불러 모아 놀기 좋게 고치는 데 시간과 품을 많이 들였다. 그 결과물이 건물 밖으로 길게 낸 나무데크다. 1층부터 3층까지 길게 베란다를 넓힌 셈. 여기서 회사 직원들을 불러 모아 함께 술을 나눠마실 때도 잦다.

데크는 구름다리 계단처럼 생겼다. 1층부터 3층까지 오르내릴 수도 있고, 정원으로 건너다닐 수도 있다. 양 부회장은 "자연은 가만히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난 이렇게 가까이서 만지고 향기를 느끼는 걸 더 선호한다. 그 과정에서 또 다른 가구를 위한 아이디어도 얻는다"고 했다.

그의 꿈은 오래도록 낡지 않는 가구를 만드는 것. "오래 써도 버리고 싶지 않은 가구, 오래 쓸수록 더 아름다워지는 가구. 그 단 하나의 가구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난 집에서 실험한다." 양 부회장이 22살 먹은 의자 '가보트'에 앉아 들려준 말이다.


●양영일 대표는

1948년생. 서울대 건축학과와 동대학원 졸업. 1974년부터 1983년까지 한샘 건축연구소 소장을 지내다 1983년 ㈜퍼시스를 창업했다. 1998년 ㈜일룸 대표이사로 취임했고 2009년부턴 퍼시스 부회장과 일룸 대표이사를 겸하고 있다. 회사 직원들은 그를 ‘CEO’라고 부르는 대신 ‘CDO(Chief Design Office)’라고 부른다. 의자·책상 같은 제품은 물론 펜·수첩·탁상달력에 이르기까지 회사의 모든 물품 디자인을 빠짐없이 살피기 때문. 2007년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현실에서 그가 추구하는 가구 디자인은 기능과 본질에 충실한 제품이지만, 취미로 틈틈이 하는 무대 디자인은 극적(劇的)이고 대담한 스타일을 지향한다. 1988년 실험극단의 ‘안 내놔? 못 내놔!’, 1996년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 올랐던 ‘빙벽 K-2’ 무대 역시 양 부회장의 손을 거쳐 완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