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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박한 얼굴을 한 바가지

화이트보스 2010. 8. 26. 11:14

순박한 얼굴을 한 바가지

입력 : 2010.08.25 22:59

"서울, 한 장요." "자리 없습니다." "어제 예약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그건 모르고, 표는 없어요."

얼마 전, 지리산 근처에 다녀올 때의 일이다. 그 도도하고도 타협의 여지가 없는 불친절에 기가 질렸다. 배웅 나왔던 사람이 "인근 하동 터미널에 전화해보라" 일러줬다. 지방 터미널 혹은 정류장에는 시간별로 몇 좌석씩 배당되는데, 앞서 떠난 터미널에서 빈자리가 생겼으면 이쪽 터미널에서 탈 수 있다는 얘기였다. 우여곡절 끝에 버스에 올라탔다. 그러자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었다. 예약받기 귀찮아 그냥 타라고 해놓고서는 다음 날 모른 척 발뺌하는 건 무슨 처사인가. 소비자가 직접 알아보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그 심보는 무엇인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지인들에게 이 얘기를 전하니, 전국 방방곡곡에서 그간 겪었던 각종 '수모'들이 물밀듯 터져 나왔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산골짜기 펜션이라고 해서 1박에 15만원씩이나 주고 예약했는데, 가보니 시멘트 덩어리 건물에 내부는 장급 여관보다도 못해 그냥 나오려 했더니 이틀치 방값을 내라 하더라, 사정이 생겨 예약을 취소하려니 입금한 돈을 돌려줄 수 없다더라, '바비큐 시설 완비'라고 해서 고기 싸들고 갔더니 시설 이용료, 숯값으로 몇만원이나 받아 챙기더라 등등.

나라에서는 대중교통 이용을 권장하지만, 지방 소도시에서 버스를 타려면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한 예로 카드를 받지 않는 터미널은 전국에 수십 곳이다. 이용자 수가 적은 곳이라서 그런다는데, 이런 곳일수록 현금인출기를 찾기도 힘들다.

지방 펜션은 각종 소비자고발센터에 자주 불만이 접수되는 숙박시설 중 하나다. 일정 기한 내에 취소를 하면 예약금 전액을 돌려주는 건 기본이고, 일주일 내 90% 환불, 3일 내 50% 환불 식의 규정도 있지만, "우린 그런 거 모른다"며 생떼를 부리는 곳도 여럿이다. 대도시에 비해 유동인구가 적은 지방의 숙소라면, 손님의 예약취소로 손해를 볼 확률은 더 크다. 그래도 맘대로 '환불 못해준다'는 건, 억지다. 농촌의 소규모 민박은 그렇다 치더라도, 1박에 20만~40만원, 방송에 협찬광고까지 하는 기업형 한옥 펜션까지 카드를 받지 않는 것도 횡포다. 따져 물으면 "우리는 숙박업소가 아니라 농촌 민박집"이라 우긴다.

불친절과 바가지의 주체가 반들반들한 서울 호텔이 아니라, '시골 사람'일 때 도시인들의 실망은 더 크다. 지방으로 여행을 떠날 때는 '외갓집 인심' 같은 것을 꿈꾸기 때문이다.

시스템을 바꾸면 사람에 대한 실망을 줄일 수 있다. 제주시는 시가 나서 오는 9월부터 470개 민박집에 신용카드 결제기를 설치한다. 버스터미널 문제도 마찬가지다. 터미널을 운영하는 민간사업자들은 2~3%의 카드 수수료를 떼이는 것보다는 "카드 안 돼요"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다. 포항시 등 몇몇 도시는 카드 수수료를 업자들에게 보전해주는 조건으로 터미널에 카드단말기를 비치했다. 관광으로 먹고사는 도시들이 이 정도도 안 하는 건, 몰염치다.

요즘 도시생활자들은 900원짜리 버스를 타도, 1000원짜리 음료수를 사도 신용카드를 내민다. 젊은 세대일수록 이런 경향이 더 짙다. 언제까지 '시골 가면 불편하고 돈도 더 든다' '시골 사람이 더 무섭다'는 생각을 속으로만 삭여야 할까. 이런 생각부터 바꿔주지 않으면, 국내 관광의 품질 만족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