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가 되려면 아직 한참 시간이 남았는데도 북엇국 집 앞 골목엔 벌써 긴 줄이 만들어져 있었다. 20분 기다렸다 10분 만에 뚝딱 한 끼를 때우는 정가 6000원의 북엇국 단일(單一) 메뉴 식당은 늘 이렇게 붐빈다. 나라를 아열대(亞熱帶)로 떠 옮겨온 듯 스콜(squall)처럼 느닷없이 후드득 쏟고 지나가는 빗줄기를 피하느라 어깨를 좁힌 채 우산을 받치고 있는데, 뒤쪽에서 두런두런하던 소리가 차츰 커져 왔다. '상식 밖'이라고 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고 했다. '그냥 밀고 나갈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개각(改閣) 이야기다. 우산을 살짝 올리고 돌아보니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 차림의 30대 안팎 젊은이들이다. '서울에, 아니 전국에 이런 골목이 몇 개나 될까'하는 생각이 문득 스치고 지나갔다.
국회 인사청문회 이후 나라 밑바닥에서 일고 있는 회오리와 소용돌이가 합쳐 흔드는 진동(振動)에 몸을 부딪힌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기지개를 켜는 소리를 '보는' 듯하고, 때가 가까워온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모습을 '듣는' 듯하다"고 했다. 권력에 젖고 논리에 기대는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보고, 들리는 것만 듣는다. 부산포(釜山浦) 앞바다를 가득 메운 왜선(倭船)의 모습을 보고 왜병들이 내지르는 함성을 듣고서야 비로소 난리가 난 줄 알던 400년 전 위정자(爲政者)들이 그랬다. 그러나 거친 물살에 휩쓸려 도리없이 떠밀려 내려갔던 경험을 몸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다르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의 소리에 흠칫하고, 들리지 않는 것의 모습에 가위눌려 소스라치듯 놀란다. 400년 전 왜란 때 그랬고 100년 전 국망(國亡)때 그랬듯이, 다가오는 위기 앞에서 본능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던 사람들은 조정(朝廷)의 먹물 대신(大臣)들이 아니라 저잣거리 무지렁이들이었다.
예나 이제나 위기의 냄새를 맡는 정치 본능을 마비시키는 건 권력이다. 권력에 갇힌 시간이 길어질수록 위기감각도 무뎌진다. 고심(苦心)을 거듭해 내놓았다는 개각이 도리어 민심(民心)을 거스른 이번 사태도 권력의 노화(老化)현상이라는 말로써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사람은 법의 거울에 자신의 행동을 비춰보며 두려워하고, 도덕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며 부끄러워한다. 정치는 이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교묘하게 섞어가며 나라를 다스리고 사회의 질서를 유지해 나간다. 법의 거울밖에 없는 사회는 부끄러움을 잃게 되고, 도덕의 거울로만 지탱하는 사회엔 두려움이 사라진다. 결과는 다 같이 혼란과 무질서다. 하물며 법의 거울과 도덕의 거울이 함께 망가진 나라의 앞날은 더이상 물을 게 없다.
대한민국은 1950년대에 60달러 하던 국민소득을 60년 사이에 300배로 키운 나라다. 그렇게 빠르게 변해 온 사회에 몸을 담그고 산 국민이 법적으로 한 점 흠 없고 도덕적으로 한 점 티 없기를 바라는 건 무리한 희망이다. 평생 세금 한 푼 내지 않은 채 그럴듯한 소리만 입에 올리며 지냈던 팔자 좋은 사람을 빼곤 형편이 크게 다를 게 없다. 남보다 더 빨리, 더 크게, 더 높이 되기를 목표로 달려온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 사정을 모르지 않기에 국민들도 이번 개각 때 하늘에서 떨어진 듯한 인물을 기다리진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도가 지나쳤다. 어느 누가 TV 인사청문회에 나온 얼굴들을 가리키며 다음 세대들에게 '너희도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살기만 하면 저렇게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개개인의 흠을 한 번 더 들춰내 생채기를 내려는 게 아니다. 그렇게 찾고 또 찾았다면서 단 한 명 의인(義人)의 그림자를 닮은 인물조차 그 명단에 끼워 넣지 못한 정권의 무능(無能)을 나무라는 것이다. 이 나라에 의인의 씨가 말라버리기라도 한 것인지 아니면 정권의 색안경 색깔이 그렇게 짙었기 때문인지 알 길이 없다.
이명박 정권은 보수정권이라는 말을 듣는 걸 거북하게 여긴다고 한다. 그러나 이젠 그런 거북한 일도 크게 줄 듯하다. 이 정권을 만든 보수적인 사람들이 먼저 정권과 거리를 두려 할 테니 말이다. 지금 전국 방방곡곡 수만 수십만개 골목에서 쏟아진 소리들이 장마에 물 불어나듯 큰 길을 메우고 콸콸거리며 흘러가고 있다. 이 흙탕물의 흐름이 2년 반 후 무엇을 허물고 무엇을 세우며 어떤 드라마를 만들어 갈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공자(孔子)는 2500년 전 이렇게 말했다. '멀리 보고 미리 염려하지 않으면 반드시 근심을 가까이 불러들이는 법이다(人無遠慮 必有近憂).' 공자는 멀리 볼 줄 알았다.
나라가 위법도 부도덕도 아무렇지 않다 하면…
입력 : 2010.08.27 19:23 / 수정 : 2010.08.27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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