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국내 독자기술로 제작한 '중성미자' 검출기 올 연말 가동
우주 생성의 비밀 풀어줄 열쇠… 의미있는 연구 나오면 노벨상 유력
지난 4일 전남 영광 원자력 발전소 인근 한 야산. 험한 자갈길을 지나 산 아래에 도착하니 방공호처럼 생긴 작은 터널이 눈에 들어왔다. 어둑한 동굴 속으로 300m쯤 걸어 들어가니 높이 9m, 지름 9m의 거대한 원통 모양의 구조물이 나타났다.우주복처럼 생긴 방진복을 입은 과학자 10여명이 형광등 밑에서 자동차 헤드라이트처럼 생긴 장비들을 원통 내부에 부착하고 있었다. 빛을 감지하는 광센서였다. 한 줄기 빛조차 숨어들지 못하는 동굴 속에 빛을 감지하는 장치라니…. 현장을 지휘하던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김수봉 교수는 "영광 원자력 발전소에서 쏟아져 나오는 우주의근원 입자를 검출하기 위한 거대한 실험실"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우주의 근원 입자란 '유령입자'라고도 불리는 중성미자(中性微子·neutrino)이다. 김 교수는 "바로 여기서 노벨상에 도전할 연구가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 ▲ 서울대 김수봉 교수가 전남 영광 원자력발전소 인근에 있는 중성미자 검출장치에서 작동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지름 9m, 높이 9m의 원통 모양인 이 검출기 안에는 중성미 자가 들어왔을 때 발생하는 빛을 감지할 수 있는 430여개의 광센서가 붙어 있다. /영광=이재원 기자
지금 이 순간도 1초에 수백조개가 넘는 중성미자가 우리 몸을 통과해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느끼지 못한다. 존재는 하지만 감지할 수 없는 입자. 과학자들은 중성미자를 '유령 입자'라고 부른다. 이 '유령'을 처음 찾아낸 사람은 미국의 프레데릭 라이네스였다. 그는 1956년 중성미자를 처음 찾아낸 공로로 1995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현대 물리학의 핵심인 '표준 모형(Standard Model)'에서는 우주가 137억년 전 대폭발(Big Bang)로 생겼다고 설명한다. 빅뱅 직후에는 비슷한 숫자의 입자와 반입자(입자와 만나면 빛을 내며 사라진다)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입자 수가 많아지며 우주와 물질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때 존재했던 기본 입자의 종류는 12가지. 그 중 절반이 사라지고 현재 우주엔 6종의 기본 입자가 존재한다. 6종의 기본 입자 중 'u쿼크(quark)'와 'd쿼크', '전자(electron)'는 수소와 산소 등 각종의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로 쓰였다.
그리고 물질을 구성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우주 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미지의 세 입자. 그게 중성미자이다. 이들 세가지 중성미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바뀌는 성질을 갖고 있다. A가 B로 변하고 B는 C로 되는 식이다. 연구진은 이 세가지 중성미자들이 서로 바뀔 확률을 알아내려 하고 있다. 물리학계는 그간 중성미자를 연구해 대폭발 직후의 과정들을 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가 찾으려 애써왔다. 우주생성의 비밀을 풀 열쇠를 찾으려는 것이다.
◆거대한 실험시설이 필요
눈에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중성미자를 검출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거대한 실험시설이 필요하다. 지표상에는 중성미자 말고도 우주에서 날아오는 수많은 우주선(宇宙線)이 있어 중성미자만 검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다른 것들의 방해를 받지 않는 깊은 땅속에 검출장비를 설치해왔다. 미국 물리학회는 최근 남극 대륙 얼음에 2.4㎞ 깊이의 구멍을 뚫어 중성미자를 검출하는 '아이스 큐브'를 짓고 있다. 일부에서는 수조원이 들어가는 거대 가속기(입자를 높은 에너지로 충돌시키는 장치)를 지어 빅뱅과 같은 조건을 재현하려고 한다. 일본은 2000년부터 2조원을 들여 가속기 건설을 마쳤다.
- ▲ (아래 사진)전남 영광 원자력발전소 인근에 설치된 중성미자 검출장치 내부. 안쪽에는 아크릴로 만든 원통이 두 개 더 들어있다. 여기에 중성미자를 만나면 빛을 내는 150t의 화학물질이 채워질 예정이다. /영광=이재원 기자
◆설계에서 제작까지 독자 기술
영광의 서울대 연구진은 현재 원자력 발전소 인근에 두 개의 중성미자 검출기를 건설중이다. 원전의 중심과 가까운 거리(300m)에 한 개, 먼 거리(1.4㎞)에 또 한 개를 설치해 두 곳을 비교하려는 것이다. 검출기 건설은 거의 끝나가는 중이다. 연구진은 이날 원거리 검출기 안쪽에 핵심 부품인 광센서 430개를 모두 붙였다. 광센서 부착이 끝나고 300t의 물과 150t의 반응 물질(중성미자와 만나면 빛을 내는 물질)을 원통 안에 채우면 검출기는 뚜껑을 닫는다.
검출기의 작동 원리는 이렇다. 원전에서 발생한 중성미자는 산을 통과해 원통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반응 물질을 만나는 순간 빛을 내는데 이것을 광센서가 잡아낸다. 김수봉 교수는 "올 연말 본격 연구를 시작해 3년 정도 측정한 데이터를 모으면 결과를 발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우리 연구진이 의미 있는 결과물을 가장 먼저 내놓으면 노벨상은 우리 것이 될 확률이 높다. 게다가 이 실험 시설은 설계부터 제작까지 우리 힘으로 해 낸 것이라 의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