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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선생이 기여한 것이 없다고?

화이트보스 2010. 10. 21. 15:15

황장엽 선생이 기여한 것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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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10.19 23:00

황장엽 선생이 그의 기구한 삶을 마감한 날인 10월 10일의 북한의 모습은 그의 죽음을 더욱 덧없고 슬프게 만들고 있었다. 허약한 모습의 김정일 옆에서 살찐 김정은은 히틀러 군대식으로 걷는 인민군의 광기의 열병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거친 군홧발 소리는 북한 주민을 짓밟는 소리이며 한국에 대한 무력 위협이었다. 13년 전 황 선생은 주민을 굶겨 죽이는 천인공노할 체제 범죄에 침묵할 수 없었고, 전쟁이라는 더 큰 재앙마저 준비하는 김정일을 도저히 묵과 할 수 없어 자신의 삶을 던졌다.

그는 당시 한국으로 넘어와야 할 다른 이유가 전혀 없었다. 국제 담당 비서로서 김정일의 신임은 여전했고 평양 고급 간부 아파트에서 귀여운 손녀와 함께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김정일에 대한 그의 환멸을 알게 된 것은 그가 베이징에 있는 한국 대사관으로 피신하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황 선생이 처음부터 망명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해 온 것은 아니었다. 암담한 북한의 현실에 절망한 그의 답답한 심정이 안기부에까지 전해져 왔을 뿐이었다. 황 선생은 자신이 북한에 머물러 있으면서 할 일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망명을 통해 김정일에게 충격을 주고 체제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본다는 자신의 의사를 우리에게 알려왔다. 이는 가족의 생명을 포함한 자신의 전 생애를 희생시키는 모험이었다.

안기부는 즉시 망명 작전에 돌입했다. 실패할 가능성이 언제든지 도사리고 있어 극도로 정교한 계획을 세워나갔다. 북한의 감시는 엄중했다. 황 선생에게 우리의 준비사항을 알려 주고 연락하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황 선생의 망명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일대 쾌거였다. 황 선생은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북한 정보의 보고(寶庫) 그 자체였다. 안기부, 미국 CIA 등 전 세계 정보기관은 북한을 알기 위해 매년 수천억원을 들여 정보 수집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노력으로 얻은 지식도 결코 황 선생을 능가할 수 없었다. 그는 김정일의 속내까지 꿰뚫어 볼 정도로 북한을 속속들이 알았다. 자유세계에 나와 있는 최고 권위의 유일한 정보 출처였다.

황 선생의 망명은 전대미문의 강압을 뚫고 터져 나온 분연한 항거였다.

이로써 북한에서도 양심적 각성이 일어나, 최소한 주민을 아끼는 체제로 변화하는 역사적 계기가 조성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 계기가 그냥 흘러가 버린 것은 안타깝게도 지난 두 번의 정부가 그 기회를 붙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 선생이 지닌 귀중한 북한 정보와 지혜를 모두 버렸다.

이제 북한의 형편은 황 선생이 "그까짓 놈"이라고 표현한 김정은이 우리와 국제사회를 향해 위협적인 열병식을 펼치는 상황이 되었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황 선생 사후에 정부가 훈장을 추서하기로 하자 "나라에 기여한 것이 뭐냐"고 묻는다니 어이가 없다.

1970년대 미국으로 망명한 솔제니친은 소련 내 비참한 상황을 아무리 설명해도 믿지 않는 미국 여론을 향해 "믿기지 않는 것을 믿는 용기"를 역설했었다. 황 선생의 유지(遺志)도 우리 사회가 그런 '믿는 용기'를 가져 달라는 염원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염원을 잊지 않는 것이 황 선생의 명복을 제대로 비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