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허표영
"여자가 앞에 서고 남자는 여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 걸었다
앞 못보는 남자가 미끄러졌다 여자도 함께 주저앉았다
서로 원망하거나 미안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미 함께 다닌 지 20년이 넘은걸요’"
백무동에서 세석평원으로 오르는 한신계곡은 깊고 험하다. 지리산을 오르는 등산로 중 힘들기로는 몇 손가락 안에 든다. 계곡은 짙은 초록 원시림이 내놓는 숲의 향기, 쏟아지는 물줄기의 하얀 포말, 주위의 소리를 한꺼번에 집어삼키는 폭포수의 울림 등이 어우러져 있다.자연스런 바위와 사람들이 채워 놓은 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해 걷기에 불편하다. 아차 하면 발목을 삐기도 하고, 넘어져 나뒹굴기도 한다. 땀이 가슴골을 타고 흐르고 호흡이 목에 걸리는 고난의 산행이다. 산장까지 오르지 못하고 폭포 곁에 앉아 도시락을 펼쳤다. 계곡물에 손을 담그니 보기보다 차갑지는 않았다. 성냥개비만한 송사리가 소리없이 돌아다닌다. 하늘엔 구름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오층폭포를 길에서 내려다보고 얼마나 내려왔을까. 앞서가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시선을 붙든다. 부부인 듯싶은 두 사람이 나란히 내려가고 있다. 여자가 앞에 서고 남자는 바짝 그 뒤를 따른다. 그런데 남자의 왼손이 여자의 어깨 위에 얹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올라갈 때도 이들의 이런 모습을 본 것 같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그들을 스쳐 몇 걸음 앞서 내려가다가 나는 멈춰 섰다. 두 사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앞이 잘 안 보이시나 보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자가 뜸을 들이다가 "예"라고 대답했다. 돌길을 내려가다 여자가 멈춰 섰다. 남자가 스틱을 두드리며 길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한쪽 발을 떼놓았다. 남자의 발이 내려선 것을 확인하자 여자는 다음 발을 움직였다. 너무 조심스러운 발걸음에 내가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조금 평탄한 길이 나오자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몇 마디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여자는 말이 드물었고, 남자는 의외로 말하기를 좋아했다.
- ▲ 일러스트레이트=이철원기자 burbuck@chosun.com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대전에서 왔다고 한다. 대전 인근의 산은 대부분 올랐으며 지리산도 성삼재에서 노고단까지 올라봤다고 한다. 나는 뱀사골 탐방로엔 계곡 옆으로 나무 데크 길이 잘 놓여 있어 쉽게 걸을 수 있으니 거길 가보라고 했다. 그러자 버스를 타고 어떻게 들어가느냐는 물음에 그만 답을 잃었다. 그들은 차 없이 오늘도 대전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하는 시외버스를 타고 백무동까지 왔다고 했다. 돌아갈 때도 여기에서 출발하는 오후 8시 반 버스를 타고 돌아갈 예정이라는 것이다.
갑자기 남자가 "아!"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돌길에 미끄러졌다. 여자가 놀라며 남자를 껴안으며 같이 주저앉았다. 한동안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며 있었다. 누구도 원망하거나 미안해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이 정도를 다행으로 여기며 미소를 머금은 얼굴들이었다.
두 사람이 안정을 되찾자, 그들의 산행에 대해 감탄의 말을 전했다.
"대단합니다. 이렇게 다녀보면 골짜기마다 다른 점이 느껴지나요?"
"그럼요. 보이지는 않지만 차이점을 느끼지요. 물소리, 바람소리, 특히 폭포 등에서 쏟아지는 소리 등으로 구별할 수 있어요. 발밑의 흙이나 돌의 느낌, 냄새, 감각 등도 다르고, 주변의 숲에서 나오는 향기, 소리 등도 다 다르지요."
집에 돌아가면 갔다 온 곳의 감상문을 쓴다고 했다. 남편이 말을 하면 아내가 받아쓰는 것이다. 아마 그것이 그대로 시이고, 수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망설이다가 참지 못하고 그의 아내에게 물었다. "이렇게 다니시기가 힘들지 않으셔요?" 새벽부터 하루에 한 번뿐인 버스를 타기 위해 앞이 보이지 않는 남편을 챙기고, 도시락 등을 준비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잠시 멈춰 선 여자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스쳐갔다.
"함께 다니니 행복하지요. 우리는 이미 20년이 넘은걸요."
여자의 짧은 말 속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길처럼 거친 세상을 두 사람은 초롱불 같은 빛으로 앞길을 밝히며 살고 있다. 세상에는 몸이 조금만 불편해도 구박하거나 심지어 버리고 떠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건강한 부부라도 이런 동행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어두운 세상의 험한 노정을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부축하며 살고 있다.
동료들이 기다릴 것 같아 나는 인사를 하고 서둘러 내려갔다. 마지막 버스가 출발하기 전에 그들이 무사히 정류장에 도착할 수 있기를 바랐다.
차를 타고 떠나면서도 나는 연방 뒤를 돌아보았다. 천천히, 한발자국씩 서로 의지하며 걷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눈앞에 자꾸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