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회문화/사회 , 경제

60년 전 장진湖의 그들

화이트보스 2010. 11. 15. 11:20

60년 전 장진湖의 그들

  • 장일현 사회부 국방팀장 ihjang@chosun.com

입력 : 2010.11.14 23:34

워싱턴DC에 본부를 두고 있는 미 해병대 의장소대는 구령을 전혀 붙이지 않으면서도 대원들의 동작이 마치 한 사람의 그것처럼 절도 있게 이뤄진다고 해서 SDP(Silent Drill Platoon)라고 불린다. '무언(無言)의 훈련 소대'인 셈이다. 이 부대는 미국에서도 특별한 존재로 대우받으며 대통령 등 국빈 행사나 극히 중요한 행사에서만 그 시범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SDP가 10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장진호 전투 기념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한 미군 장교들조차 "꼭 한번 보고 싶었던 시범"이라고 했다 한다. 미군측은 이들의 방한에 따른 비용 전부(약 1억5000만원)를 부담했다. 장진호 전투는 이들에게 무엇일까.

6·25 당시 동부 전선에 투입된 미 해병 1사단은 북한의 임시 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 개마고원 장진호에서 대규모 중공군에 포위당하고 말았다. 중공군은 제9병단의 7개 사단을 동원, 미군을 유인해 전멸시키려고 엄청난 공격을 퍼부었다.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약 2주일간 치러진 전투에서 미군은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추위를 이겨내며 개미떼처럼 몰려드는 중공군에 맞서 철수 작전을 벌였다. 당시 스미스 사단장은 "우린 철수를 하는 것이 아니다. 후방의 적을 격멸하고 함흥까지 진출하는 새로운 방향의 공격이다"라고 했다. 미 해병 1사단은 일본과의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끈 부대였고, 전장(戰場)이 지옥 같은 악조건이어서 이 전투는 미 전국의 관심을 모았다.

협곡에서 겹겹이 둘러싼 포위망을 뚫고 40km를 철수하면서 치른 이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 393명 등 총 2621명의 손실을 입었지만, 중공군은 약 4만50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 영향으로 중공군의 함흥 지역 진출이 2주일이나 지연됐고 흥남철수가 이뤄질 수 있었다. 중공군 9병단은 이후 전장에 나서지 못했고, 제3차 공세(1·4 후퇴를 부른 중공군 공세)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미8군 등 서부전선의 유엔군도 퇴로 차단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커다란 전과 때문에 장진호전투는 2차대전 때의 스탈린그라드전투와 함께 세계 3대 또는 2대 '동계 전투'로 불린다. 그러나 이 전투는 한국전쟁과 함께 미국에서도 거의 잊혀 있었다. 장진호전투가 본격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한국 국방부와 한·미연합사가 공동으로 행사를 마련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제 이 전투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급격히 악화된 전황을 수습해 '한국을 구한 전투'로까지 평가되고 있다.

행사에는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30여명을 비롯, 미국측 참전용사 170명과 국군 참전용사 270여명, 한·미 현역 장병과 시민 등 2000여명이 참여했다. 미 해병 노병들의 말이 귓가에 오래 맴돌았다. 장진호의 혹한에 동상으로 손발이 뭉개져 쓸 수 없게 된 한 노병은 "한국을 지켰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합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