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송강 정철의 고향을 이야기하면 으례 전라남도 옛 창평현(昌平縣)을 말한다. 1914년 담양군과 창평군이 병합되어 지금은 담양군이 되었지만 송강이 살던 그 당시에는 지금의 고서면과 창평면 그리고 남면알대가 송강의 고향으로 알려진 창평현이었다. 그 중에서도 남면 지실(芝谷)마을은 송강 정철이 공부하던 환벽당과 성산별곡을 지었던 식영정이 있으며, 그가 산책하던 만수동이 있다. 송강의 사후(死後)인 1616년에 송강의 4남 기암 정홍명이 지실마을에 내려와 만수동입구에 계당을 지은 이후로 송강의 후손들이 점차 터를 잡기 시작한 곳이다. 따라서 지실마을은 송강의 고향이자 송강가사가 잉태한 우리 국문학의 성지와 같은 유서깊은 마을이다. 원래 송강은 서울 장의동(藏義洞, 지금의 종로구 삼청동)에서 1536년에 태어났다. 정유침의 4남3녀중 막내로 태어난 송강은 위로 큰 누이가 인종의 숙의가 되고 셋째 누이가 종실의 계림군에게 시집가서 궁중을 자주 출입하기도하고 특히 어린 명종과는 소꼽친구가 되는 등 비교적 화려한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송강이 10살이 되던 해인 1545년에 인종이 즉위 8개월만에 죽자 어린 명종이 즉위하게 되었는데, 명종이 어려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이때 문정왕후의 오라비인 윤원형(소윤)일파가 새로 권력을 잡기 위하여 인종의 외숙인 윤임(대윤)일파를 축출하는 과정에서 100여명의 선비가 죽거나 다친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을사사화이다. 이때 송강의 매형이었던 계림군 류가 역모죄로 처형되면서 송강의 장형인 자가 매를 맞고 귀양길에서 죽었으며 숭강의 아버지인 유침도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렇게 온 집안이 하루아침에 몰락하자 송강은 귀양가는 아버지를 따라 귀양지를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몇년이 흘러 송강이 16살이 되던 해, 조정에는 경사가 있었다. 후에 선조가 될 왕자가 태어나는 바람에 사면령이 있었고, 송강의 아버지도 귀양이 풀렸다. 이때 유침은 친산이 있는 지금의 담양군 고서면 당지산아래로 내려왔는데 송강도 아버지를 따라 내려오게 되었다. 그 해 여름 송강은 순천 처가로 은둔생활을 떠난 중형 소를 만나러 길을 나섰다가 환벽당 아래 용소에서 목욕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1572)도 나주목사를 그만두고 이곳 용지촌 언덕에 환벽당을 짓고 세월을 보내고 있던중, 낮잠을 자게 되었는데 꿈에 용소에서 용이 꿈틀대는 것을 보고 놀라 잠을 깨어 정자아래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보게 하였던 것이다. 사촌선생과 송강의 만남은 이렇게 전설처럼시작되었다고 전해온다. 송강은 사촌의 권고로 여기에서 머물며 그 이듬해 사촌의 사위인 류강항의 딸과 결혼하여 사촌의 외손서가 되었으며, 사촌의 물심양면의 후원으로 10여년동안 공부에 열중하며 27세에 장원급제하기까지 아름다운 청소년시절을 보냈다. 송강의 파란만장한 일생중 가장 행복한 시기를 이곳에서 보낸것이다. 때문에 중앙정계로 진출한 후에도 은퇴를 거듭할때마다 늘 창평으로 낙향했다. 이곳은 그에게 고향이었던 것이다. 이곳은 그가 공부했던 환벽당(環碧堂)외에도 성산별곡을 지었던 식영정(息影亭), 그리고 소쇄처사 양산보(瀟灑處士 梁山甫 1503-1557)가 조성한 원림 소쇄원(瀟灑園)이 어울려 성산삼승(星山三勝) 또는 일동삼승(一洞三勝)이라고 알려진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이룬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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