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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그리던 내집 마련,

화이트보스 2011. 1. 5. 18:17

꿈에 그리던 내집 마련,
10년 만에 '집채만한 빚' 악몽으로

[한국 경제 새로운 10년, 새로운 도전] <3〉버블의 유혹을 피하라
[나빚내씨 최악의 시나리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2020년 겨울, 거리에선 캐롤과 트리가 자취를 감췄다. '나빛내'씨가 퇴직 후 연 죽집도 불황의 영향을 받고 있다. 온 나라가 마치 우울증에라도 걸린 듯하다.

2011년 토끼해를 맞을 때는 이렇지 않았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가장 빨리 극복한 나라로서 자부심과 희망이 있었다. 나씨의 집엔 지난 10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11년 가을

나씨는 집주인의 전화를 받고 충격을 받았다. 집주인은 2년 전에 비해 전세값이 크게 올랐다면서 보증금을 5,000만원 올려주든지 매월 70만원씩 월세를 내라고 했다. 2년 동안 열심히 저축했지만 수중에 모아놓은 돈은 3,000만원뿐. 더 싼 곳으로 옮기려고 돌아다녀 봤지만 전세 매물은 너무 귀했다.

한국은행이 실물경제불안을 이유로 금리인상을 계속 기피하는 바람에 시중에 돈은 넘쳐나는 상황. 여기에 정부는 분양가 상한제를 비롯, 모든 부동산규제를 다 풀어 버렸다. 총부채상환비율(DTI) 해체를 골자로 한 8/29대책은 6개월 시한이 끝나자 다시 연장됐다. 정부의 정책방향은 분명 "빚을 내서라도 집 좀 사라"는 쪽이었다.

나씨는 남들이 부동산투자에 여념이 없을 때 홀로 열심히 금융저축만 하다가, 어느 새 직장 동료들 중에서 자산이 가장 적은 사람이 돼 버렸던 밀레니엄 첫 10년의 아픈 경험이 떠올랐다. 나씨는 결국 은행에서 2억원, 저축은행에서 1억원씩을 각각 연 4%, 연 8% 금리에 빌려, 5억원에 꿈에 그리던 내집을 마련했다.

하지만 월 소득 400만원으로 두 아이를 키우며 매월 160만원을 이자로 내는 것은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게다가 금리마저 오르기 시작했고, 매달 내야 하는 이자가 200만원으로 불어났다. 초등학생인 딸은 다니던 영어학원을 그만뒀다. 그래도 집값이 좀 올랐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2014년 가을

거치기간이 끝났다. 은행 직원은 원금과 이자를 같이 갚아야 한다고 했다. 국내 가계부채가 1,000조원을 넘으면서 금융당국이 대출을 조이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기 때문이다. 2011년 가계부채의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거치기간 연장을 막으려던 정부의 첫 시도는 은행권의 반발로 무산되었지만, 결국 정부도 늘어나는 빚 앞에선 어쩔 수 없었다.

은행 연체율은 급격히 높아졌다. 나씨는 그나마 원리금 분활상환 방식으로 대출을 받았으나, 이전에 일시상환방식으로 대출 받았던 사람들은 원금 일부조차 갚지 못해 끝내 연체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씨 부인도 대형마트에 파트타임 일자리를 구했다. 하지만 월 100만원 남짓한 부인의 소득으론 매월 대출원리금 갚기도 버거웠다. 늘어난 생활비, 점점 고액화되는 아이 학원비…결국 나씨는 제2금융권에서 비싼 3순위 대출을 받고 말았다.

2016년 가을

2년새 이자부담은 더 늘었다. 빚이 빚을 낳는 구조였다. 견디지 못한 나씨는 결국 '마지막 자산'인 집을 팔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막상 부동산 중개업소에 가 보니 나씨처럼 이자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매물로 내놓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집값은 나씨가 처음 샀던 2011년보다 오히려 떨어져 있었다. 인구는 줄어들고, 가족규모는 작아지고, 여기에 2012년부터 입주가 시작된 이른바 '2기 신도시'가 2015년까지 엄청난 '매물 폭탄'이 되면서 집값을 떨어뜨린 것이다.

일부 신도시에선 아예 공동화 현상까지 나타났다. 게다가 서울 내에서도 그 동안 진행됐던 재개발, 재건축이 상당수 완료되며 거주수요가 감소했다. 일본이나 미국처럼 '대폭락' 사태가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집값은 대세하락기에 진입한 것이 분명했다.

2018년, 나씨는 결단을 내렸다. 임원이 되지 못하면 2년 안에 회사를 퇴직할 것이 뻔한 상황. 내년이면 대학진학하는 딸의 등록금 때문에라도 지금 같은 생활은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나씨는 집을 처음 샀던 가격보다 1억원이나 낮은 가격에 팔고 '빚잔치'를 했다. 은행과 저축은행에 진 빚을 모두 갚았다. 남은 돈을 보증금 삼아 월 50만원 임대료를 내는 작은 아파트로 옮겼다.

2020년 겨울

나씨는 퇴직 후 퇴직금으로 작은 죽집을 열었다. 개업식을 끝내고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대학생이 된 딸이 말했다. "아빠, 만약 10년 전에 우리 집을 안 샀다면 어땠을까요. 엄마는 마트에서 힘든 일 안 하고, 아빠도 머리카락이 이렇게 다 희어지진 않았을지 몰라요. 저도 학원에 계속 다니면서 좀 더 좋은 대학에 갔을지도 모르구요."

때늦은 후회와 끔찍한 빚잔치는 국가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엄청난 규모의 가계부채는 원리금 부담으로 작용해 민간소비가 눈에 띄게 위축됐다. 자산의 가장 큰 부분인 주택 가격이 떨어지면서 고소득층의 소비까지 줄었다. 가계저축률은 마이너스 수준으로 떨어졌고, 경제에 활력이 떨어지면서 잠재성장률도 하락했다.

저소득층은 이자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은행과 제2금융권에는 부실이 나날이 늘어갔고, 저축은행은 여러 곳이 문을 닫았다. 공적자금이 계속 투입되면서 정부 재정도 크게 악화됐다. 불과 10년, 빚이 경제를 이렇게 죽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