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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군묘(燕山君墓) 10대 연산군, 거창군부인(文城郡夫人) 신씨
제10대 왕 연산군(1494~1506 재위)과 그 부인 거창군부인 신씨의 쌍묘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사적 제 362호로 관리되기는 하나 유네스코 문화유산에는 등재되지 못하였다.
다만 정릉관리소에서 인원을 파견하여 관리하고 있으며 무료로 개방되고 있다.
비록 왕릉은 아니지만 조선왕릉 답사를 하는 입장에서 꼭 둘러보아야 했다.
<연산군 묘... 대군의 예로 조성하였으며 그에따라 홍살문이나 정자각은 없다.
딸이 시집간 능성구씨 선영에 묻혀 있는데 의정궁주 조씨묘와 딸, 사위의 묘로 복잡하다.>
ㅇ 쫓겨난 임금
조선역사에 2번의 반정이 있는데 그 첫 대상자가 연산군이다.
연산군은 성종의 큰아들이며, 어머니는 공혜왕후에 이어 왕비에 올랐던 폐비 윤씨이다. 어머니 윤씨가 폐비되어 사사(賜死)된 뒤인 1483년(성종 14) 7살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1494년 12월 성종이 죽자 왕위에 올라 초기에는 나름대로 치세를 잘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성종대에 들어와 사림의 등장으로 수세에 몰린 훈구파의 정치적공작과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게 되면서 형성된 성격상의 문제가 겹쳐 1498년 무오사화, 1504년 갑자사화등 2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비롯한 문신들을 대거 처형하고 언관(言官) 제도를 크게 축소했으며, 당시 사대부들의 윤리관에 어긋나는 행동을 거듭하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되었다.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손꼽힌다.
2차례에 걸친 사화로 연산군에 대한 반감은 사림파뿐만 아니라 훈구세력들간에도 커지게 되었다. 홍문관과 사간원을 없애고 경연(經筵)과 상소제도를 중단시키는 등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여론제도를 크게 위축시킨데다가, 갑자사화를 계기로 훈구파도 심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초상 때 역월지제(易月之制)라 하여 3년상 대신 25일상을 치르는 등의 행위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채청사(採靑使)·채홍사(採紅使)를 전국에 파견해 미녀와 좋은 말을 징발하고, 장악원(掌樂院)을 두어 기녀(妓女)를 양성한데다가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사대부의 여인들과 관계를 갖는 등 음행을 일삼았다. 더욱이 서총대(瑞蔥臺)라는 유흥장을 만들면서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고 베를 무더기로 바치게 하여 민심도 돌아서게 되었다. 또한 자신을 비방하는 한글투서가 발견되었다 하여 한글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마침내 1506년 성희안·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세움에 따라 왕위에서 쫓겨나 군(君)으로 강등된 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11월 31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그 후 중종 7년(1512) 12월 부인 신씨가 상소하여 묘를 강화에서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선영(先塋)이며 연산군의 사위와 딸의 무덤이 있는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현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하기를 청하여, 이듬해(1513) 2월 왕자군(王子君)의 예(禮)로 이장하고 양주군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묘의 상설은 대군(大君)의 예우로 장례하여 곡장을 두르고, 상석 1쌍, 장명등 1쌍, 망주석 1쌍, 향로석 1개, 문인석 2쌍, 비석 1쌍등이 세워져 있으나 병풍석이나 난간석, 석양과 석호, 무인석등은 세우지 아니하였다. 재실은 언덕아래 있으나 보수중이었다.
묘비는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 하고, 뒷면에는 무덤을 만든 '정덕팔년이월이십일장(正德八年二月 二十日葬)'이라 새겼고, 부인 신씨의 묘비는 '거창신씨지묘(居昌愼氏之墓)’, 뒷면에 ‘六月二十六日葬’이라 새겨져 있으나 연도 부분은 마멸되어 있다.
폐위된 왕의 무덤으로 여타 왕릉에 견줄 바는 못되지만, 단촐한 규모에 갖출 것은 웬만히 다 갖추고 있다. 가족 묘원 형식으로 딸 내외 무덤이 부모의 발치 밑에 묻혀 있으니 폐위되어 쫓겨난 후 죽은 비참한 말로였으나 사후에는 차라리 오붓해 보인다.
왜냐하면 연산군은 폐비 거창군부인 신씨 사이에서 2남 1녀, 후궁소생으로 많은 자녀들을 두었으나 아들들은 태어나자마자 죽거나 모두 귀양지에서 죽었으니 이렇게나마 가족묘원을 이룬것이 차라리 오순도손해보인다는 보는이의 심정이다.
연산군내외와 사위 딸 묘소 사이에 의정궁주 조씨 묘가 있는데 의정궁주 조씨는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었지만 곧 태종이 승하하여 빈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궁주의 작호를 받았다. 이 땅은 원래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땅이었는데 후사가 없는 의정궁주의 제사를 임영대군이 맡으라는 왕명이 있어 현위치에 묘를 쓰게 된것이다. 그런데 거창군부인 신씨는 임영대군의 외손녀가 되므로 연산군묘을 이곳으로 이장할것을 요청하여 의정공주묘 윗쪽에 묘를 쓰게 된것이다.
즉, 의정궁주 조씨 묘는 이미 1454년에 이곳에 조성되었으며 1513년에 연산군을 강화도에서 이장하였고, 1524년에 딸과 사위의 묘소가 조성된후 1537년에 군부인 신씨의 묘소가 조성되었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1498년 〈성종실록〉 편찬 때 김일손(金馹孫)이 사초(史草)에 실은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 弔義帝文〉이 세조의 즉위를 비방한 것이라 하여,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김일손·권오복(權五福) 등을 처형했으며, 정여창(鄭汝昌)·이주(李胄)·김굉필(金宏弼)·강혼(姜渾) 등을 귀양 보냈다 (무오사화).
1504년에는 어머니 윤씨의 폐비와 사사에 관련했던 후궁들과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김굉필 등을 처형하고 한치형(韓致亨)·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정여창·남효온(南孝溫) 등을 부관참시했다 (갑자사화).
이 옥사에서는 무오사화 때와는 달리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와 함께 훈구파의 거목들도 대거 참화를 당했는데, 이는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 등을 위해 훈구 재상들의 토지를 몰수하려는 조짐이 보이자 훈구파가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반정(反正)
전통사회에서는 천명(天命)이 다한 왕조를 교체한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뜻하는 말로 혁명을 쓰고, 반정은 왕조의 정통성은 유지한 채 왕위만 교체하는 것이므로 혁명이라 하지 않았다. 역사상 반정은 2번이 있는데, 1506년 9월 연산군을 축출한 중종반정과 1623년 3월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이다. 이때 '반'(反)은 돌이킨다는 뜻으로 정통으로 돌아가거나 어긋난 정도(正道)를 회복한다는 뜻이다. 이는 정권교체의 명분을 연산군은 난정(亂政)과 패륜, 광해군은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의 폐비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 다 묘호(廟號:태조·태종 등과 같은 명칭)를 받지 못해 '군'(君)으로 불렸으며, '실록'도 '일기'(日記)라고 부르고 여기에 실린 각자의 전기에 패륜행위를 강조한 것도 반정의 근거를 분명히 하기 위한 조치였다. 정종을 몰아낸 태종과 단종을 폐위시키고 즉위한 세조의 경우는 반정이라고 하지 않는데 이는 두 사람이 모두 선왕으로부터 선양(禪讓:왕위를 양도하는 것. 중국 삼국시대의 조비가 천자의 지위를 획득할 때 창안한 방법)받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종과 단종 모두 묘호를 추증 받지 못해, 정종은 공정대왕(恭靖大王),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불렸다. 이들의 묘호는 각각 1681년(숙종 7)과 1698년(숙종 24)에 추증한 것이다.
장녹수
조선 제10대 왕인 연산군의 총희(寵姬). 제안대군(齊安大君:예종의 둘째 아들)의 종으로 가노(家奴)와 혼인하여 자식까지 하나 있었으나, 용모가 아름답고 춤과 노래를 잘 하여 연산군에게 발탁되어 입궁했다. 내명부(內命婦) 종4품 숙원(淑媛)에 봉해지고, 많은 금·은·노비·전택(田宅) 등을 하사받았다. 이후 연산군의 총애를 믿고 왕을 대신하여 상벌(賞罰)을 마음대로 내리기도 했다. 1503년(연산군 9) 종3품 숙용(淑容)에 봉해진 뒤 선공감(繕工監)으로 하여금 그녀의 집을 새롭게 단장시켰으며, 1506년에는 오빠와 자녀들을 양인 신분으로 올려주었다. 장녹수의 이러한 행동은 국사와 재정을 어렵게 만들어 연산군의 실정을 부추겼다. 1506년 중종반정 때 처형되고, 가산이 몰수되었다.
<연산군 묘소 입구... 주택가 뒷길가에 허름한 펜스로 가려져 있다.
정릉에서 파견된 관리인이 상주하고 있으며 바로 안쪽으로 묘소들이 보인다.>
<휀스를 들어서서 몸을 틀자 바로 전경이 보인다. 앞에 2기가 사위와 딸, 중간이 의정궁주, 뒤쪽이 연산군과 부인 묘.>
<제일 앞 왼쪽이 연산군의 사위 부마 능양위 구문경묘이다.>
<그 오른쪽은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묘.>
<중간에 의정궁주조씨묘가 제일 먼저 들어선 셈인데 특이하게도 봉분이 장방형 월대를 쌓아 사각형이다.>
<연산군 부부 묘... 곡장이 둘러쳐진 가운데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 상석과 비석이 보이며 가운데 향로대가 하나 있다.>
<왼쪽이 연산군 묘....>
<비석에는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 새겼다.>
<연산군 부인 거창신씨묘...>
<비석에는 '거창신씨지묘(居昌愼氏之墓)'라 새겼다. 비석상태가 많이 훼손되었다.>
<가운데에 향로대 하나를 세웠다. 비각이 없이 비석을 세웠으며 정자각이 없으니 봉분 앞에 큰돌은 혼유석이 아니라 상석이다.
상석에 진설해야하니 가운데에 향로을 피우는 향로대를 놓았다.>
<무인석은 없는 대신, 문인석을 2쌍씩 세웠다.>
<연산군 묘소 바로 앞은 주택가이며 아파트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바로 옆의 은행나무 수령은 600~1,000년쯤.
서울시 지정보호수 제1호인 '방학동 은행나무'이다.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불이 난다고 한다.>
<원당샘. 600년전 파평윤씨 일가가 이곳 원당마을로 정착할때 부터 식수로 씌여졌다고 한다. 일명 '피앙 우물'.>
조선 10번째 임금이자 최초로 쫓겨난 임금 연산군.
'금삼의 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들이지만 역사적 사실과 소설, 드라마는 많이 다를것이다.
어차피 역사는 승리자가 쓰는 것...
그래도 사후에는 사위, 딸 내외와 함께 묻혀 가족묘를 이루고 있다는데 다소 안도하며 답사를 마쳤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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