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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평론가 이덕일(50·사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중앙SUNDAY에 새로운 연재를 시작한다. 창간 4주년에 즈음한 211호(3월 27일자)부터다. 이 소장은 일제 침탈이 가시화된 무렵부터 일제 패망과 정부 수립에 이르는 시기를 인물과 사건 중심으로 정리할 계획이다. 본지에 ‘조선 왕을 말하다’를 2년 넘게 게재한 이 소장은 다음 주부터 ‘근대를 말하다’ 시리즈를 통해 한국 사회의 갈등 치유 방안을 모색한다는 구상이다.
박사학위 논문을 한국근대사로 쓴 이 소장은 요즘 관련 사료들을 뒤적이며 글을 구상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는 “우리는 구한말 이후 근대를 애써 외면하고 잊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며 “역사는 현재의 눈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인데 너무 결정론적 시각에만 사로잡혀 있는 게 과연 맞는지 생각해볼 때”라고 말했다. 17일 오후 본사 편집국에서 1시간30분 동안 그를 만났다.
일제시대 부동산·주식 붐도 다룰 것
-시리즈는 어떤 내용으로 구상하나.
“‘조선 왕을 말하다’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고종 때 나라가 사실상 멸망하고 식민지 체제에 들어가면서 강제로 근대에 편입된 게 우리 역사다. 지금의 우리를 만든 씨앗이 근대 속에 있다. 남북 분단, 좌우 대립의 문제도 내재돼 있는 건데 그 부분을 너무 무시해온 측면이 있다. 그동안 일제시대를 바라보는 프레임은 딱 두 개였다. 독립운동과 친일이다. 독립운동도 임시정부 중심의 우파 부분만 얘기돼 왔다. 하지만 사회주의도, 아나키즘도 있었다. 이제는 협소한 프레임을 넓힐 때가 됐다. 당시 존재하던 다양한 세력을 있는 그대로 두루 조명해야 하지 않나 싶다.”
-친일은 어떤가.
“친일도 시대 구분을 해야 한다. 3ㆍ1운동이 성공했다면 1910년 나라를 팔아먹은 이들은 아마 민중에게 맞아죽었을 거다. 하지만 일본이 멸망하기는커녕 1930년대엔 만주까지 점령하며 욱일승천했다. 나라 뺏긴 지 4반세기가 지났지만 독립할 가망은 없고…. 그러다 보니 자발적 전향자들이 나오게 됐다. 이들이 친일파가 아닌 건 아니지만 그냥 친일이란 한마디로 묶기보다는 조금 중층 구조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끝까지 독립운동을 지속한 분들이 그래서 대단한 거다.”
-당시 일본 내부도 들여다봐야 하지 않겠나.
“맞다. 일본도 그들 나름대로 선택을 한 건데 일본에 대해 너무 무지하지 않았나 싶다. 우리는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된 것만 알 뿐이지 그가 일본 정계에서 온건파인 문치파를 대표했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일본이 처음부터 군국주의로 흘렀다고 모두들 생각하지만 사실은 개항과 동시에 격랑에 휩싸였다. 자유민권운동도 거세게 일었고 온건파와 군부 강경파가 치열한 내분도 치렀다. 그 과정에서 문치파 총리가 암살당하고 군부 쿠데타도 발생했다. 식민지는 본국의 정치격변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 만큼 일본 본국의 움직임이 식민지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살펴볼 생각이다.”
지폐에 조선 성리학자만 나오는 건 문제
-시리즈는 어느 시점부터 시작하나.
“고민을 많이 했는데 러일전쟁부터 시작할까 한다. 러일전쟁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먹는다는 걸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시리즈를 하다 보면 여러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만주가 개발되면서 소위 부동산 붐도 일었고 주식 열풍과 각종 사기사건도 많았다. 정치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경제행위도 비중 있게 다뤄볼까 한다.”
-독자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우리를 한번 되돌아보자는 거다. 과거사를 단순하고 획일적으로 보던 시각에서 탈피해야 한다. 사실 항일무장투쟁도 1920년대 초반이 절정기였다. 만주에 자리잡은 참의부ㆍ정의부ㆍ신민부 등 항일무장 조직은 압록강 넘어 파출소를 타격하는 등 국내 진공작전을 100번 넘게 펼쳤다. 일본 총독이 탄 배에 수백 발의 총탄을 퍼붓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역사들이 다 묻혀 있다.”
-왜 그런가.
“일본은 한국인들의 역사인식을 바꿔놓지 않으면 영구지배가 힘들다고 판단해 조선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우리 역사의 시간과 공간을 축소해 나갔다. 삼국 건국은 다 거짓말이고, 조선 역사는 1500년밖에 안 된다고 강변했다. 지금 해외에선 다 그렇게 알고 있다. 3000년 이상 내몽골과 만주 대륙에 펼쳐져 있던 우리 역사의 무대도 반도사로 묶어 놓았다. 그런데 해방 이후에도 조선사편수회 사람들이 우리 역사를 도맡아 서술하다 보니 왜곡된 역사인식이 그대로 내려왔다.”
-만주 무장투쟁은 누가 주도한 건가.
“1910년 나라 팔아먹는 데 가담한 조직적 세력이 있었던 반면, 나라가 망했으니 해외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만들고 군사력을 기른 뒤 결정적 시기에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 나라를 되찾겠다는 사대부들도 있었다. 이회영ㆍ이시영 일가와 강화도ㆍ제천의 양명학자들, 안동의 남인들은 모든 재산을 처분해 온 가족을 거느리고 집단망명을 감행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 4월 만주 흥도촌과 추가가라는 작은 마을에 모여 노천 군중대회를 열었다. 이들이 만든 게 신흥무관학교다. 여기서 군사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청산리ㆍ봉오동 대첩을 이끌었다. 나라가 망하자 모든 걸 희생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이분들이야말로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후대에 대한민국 역사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자기의 모든 걸 바친 분들이 명예조차 되찾지 못하면 우리 역사의 롤 모델이 사라져 버린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나라 화폐 속 인물을 거론했다. “어찌됐든 조선의 마지막은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종결됐는데 그 시대의 성리학자들만 화폐에 등장시키는 건 매우 비정상적이다. 광화문광장에도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만 있는데 이게 조선시대 광장은 아니지 않나. 21세기 대한민국의 광장이면 나라가 이만큼 성장하는 데 기여한 근대의 인물들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근대사를 부정만 해선 지금의 대한민국 발전은 설명하기 힘들다.”
한국학 대학원대학 만드는 게 꿈
-중앙SUNDAY에 연재된 『조선 왕을 말하다』가 10만 권 넘게 팔렸다. 역사서로는 보기 드문 베스트셀러인데.
“1997년부터 책을 썼는데 그때보다 요즘 쓰는 책 내용이 사실 더 어렵다. 그런데 묘한 것은 어렵게 써도 독자들이 수용한다는 점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 수준이 높아졌다. 1차 사료의 근거도 제시하려고 노력하는데 이는 독자들에게 일종의 역사해석권을 주고 싶어서다. 그래야 당파적ㆍ식민사학적 관점을 독자들이 직접 판단할 수 있지 않겠나.”
-중앙일보가 신년기획을 통해 역사교육 바로 세우기를 제안했다.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걸 할 때다. 또한 국사 교과서도 새롭게 쓰여야 한다. 국사 교육은 한 개인의 정체성을 북돋아주고 이를 통해 한국 사회를 올바로 보게 해줘야 하는데 지금 국사 교과서로는 불가능하다. 국사로 인성교육을 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사육신 사건을 토론에 부칠 수 있다. 성삼문처럼 옳은 길이지만 자기도, 가족도 죽는 길을 가는 사람과 신숙주처럼 옳지 않은 길이지만 자자손손 잘사는 길을 가는 사람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물론 어릴 땐 다들 성삼문이 되겠다고 하다가 나이 먹다 보면 세상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겠지만(웃음). 역사 속에 길이 있다.”
-글은 주로 언제 어디서 쓰나.
“오전 9시 연구소로 출근해 낮엔 웬만하면 책도 읽고 글도 쓴다. 저녁 땐 지인들과 술도 한잔 하지만 약속이 없으면 늦게까지 공부한다. 강의도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안 나간다.”
-앞으로의 꿈은.
“한국학 대학원대학을 만드는 게 꿈이다. 대한민국이 이만큼 성장했다면 우리 내부에 발전을 추동할 만한 씨앗이 있다는 얘기인데 정작 우리의 역사ㆍ철학ㆍ종교ㆍ언어에 대해선 깊이 있는 연구가 부족하다. 한국학 전문가를 많이 배출해야 한다.”
박신홍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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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학위 논문을 한국근대사로 쓴 이 소장은 요즘 관련 사료들을 뒤적이며 글을 구상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는 “우리는 구한말 이후 근대를 애써 외면하고 잊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며 “역사는 현재의 눈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인데 너무 결정론적 시각에만 사로잡혀 있는 게 과연 맞는지 생각해볼 때”라고 말했다. 17일 오후 본사 편집국에서 1시간30분 동안 그를 만났다.
일제시대 부동산·주식 붐도 다룰 것
-시리즈는 어떤 내용으로 구상하나.
“‘조선 왕을 말하다’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고종 때 나라가 사실상 멸망하고 식민지 체제에 들어가면서 강제로 근대에 편입된 게 우리 역사다. 지금의 우리를 만든 씨앗이 근대 속에 있다. 남북 분단, 좌우 대립의 문제도 내재돼 있는 건데 그 부분을 너무 무시해온 측면이 있다. 그동안 일제시대를 바라보는 프레임은 딱 두 개였다. 독립운동과 친일이다. 독립운동도 임시정부 중심의 우파 부분만 얘기돼 왔다. 하지만 사회주의도, 아나키즘도 있었다. 이제는 협소한 프레임을 넓힐 때가 됐다. 당시 존재하던 다양한 세력을 있는 그대로 두루 조명해야 하지 않나 싶다.”
-친일은 어떤가.
“친일도 시대 구분을 해야 한다. 3ㆍ1운동이 성공했다면 1910년 나라를 팔아먹은 이들은 아마 민중에게 맞아죽었을 거다. 하지만 일본이 멸망하기는커녕 1930년대엔 만주까지 점령하며 욱일승천했다. 나라 뺏긴 지 4반세기가 지났지만 독립할 가망은 없고…. 그러다 보니 자발적 전향자들이 나오게 됐다. 이들이 친일파가 아닌 건 아니지만 그냥 친일이란 한마디로 묶기보다는 조금 중층 구조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끝까지 독립운동을 지속한 분들이 그래서 대단한 거다.”
-당시 일본 내부도 들여다봐야 하지 않겠나.
“맞다. 일본도 그들 나름대로 선택을 한 건데 일본에 대해 너무 무지하지 않았나 싶다. 우리는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된 것만 알 뿐이지 그가 일본 정계에서 온건파인 문치파를 대표했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일본이 처음부터 군국주의로 흘렀다고 모두들 생각하지만 사실은 개항과 동시에 격랑에 휩싸였다. 자유민권운동도 거세게 일었고 온건파와 군부 강경파가 치열한 내분도 치렀다. 그 과정에서 문치파 총리가 암살당하고 군부 쿠데타도 발생했다. 식민지는 본국의 정치격변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 만큼 일본 본국의 움직임이 식민지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살펴볼 생각이다.”
지폐에 조선 성리학자만 나오는 건 문제
-시리즈는 어느 시점부터 시작하나.
“고민을 많이 했는데 러일전쟁부터 시작할까 한다. 러일전쟁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먹는다는 걸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시리즈를 하다 보면 여러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만주가 개발되면서 소위 부동산 붐도 일었고 주식 열풍과 각종 사기사건도 많았다. 정치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경제행위도 비중 있게 다뤄볼까 한다.”
-독자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우리를 한번 되돌아보자는 거다. 과거사를 단순하고 획일적으로 보던 시각에서 탈피해야 한다. 사실 항일무장투쟁도 1920년대 초반이 절정기였다. 만주에 자리잡은 참의부ㆍ정의부ㆍ신민부 등 항일무장 조직은 압록강 넘어 파출소를 타격하는 등 국내 진공작전을 100번 넘게 펼쳤다. 일본 총독이 탄 배에 수백 발의 총탄을 퍼붓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역사들이 다 묻혀 있다.”
-왜 그런가.
“일본은 한국인들의 역사인식을 바꿔놓지 않으면 영구지배가 힘들다고 판단해 조선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우리 역사의 시간과 공간을 축소해 나갔다. 삼국 건국은 다 거짓말이고, 조선 역사는 1500년밖에 안 된다고 강변했다. 지금 해외에선 다 그렇게 알고 있다. 3000년 이상 내몽골과 만주 대륙에 펼쳐져 있던 우리 역사의 무대도 반도사로 묶어 놓았다. 그런데 해방 이후에도 조선사편수회 사람들이 우리 역사를 도맡아 서술하다 보니 왜곡된 역사인식이 그대로 내려왔다.”
-만주 무장투쟁은 누가 주도한 건가.
“1910년 나라 팔아먹는 데 가담한 조직적 세력이 있었던 반면, 나라가 망했으니 해외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만들고 군사력을 기른 뒤 결정적 시기에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 나라를 되찾겠다는 사대부들도 있었다. 이회영ㆍ이시영 일가와 강화도ㆍ제천의 양명학자들, 안동의 남인들은 모든 재산을 처분해 온 가족을 거느리고 집단망명을 감행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 4월 만주 흥도촌과 추가가라는 작은 마을에 모여 노천 군중대회를 열었다. 이들이 만든 게 신흥무관학교다. 여기서 군사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청산리ㆍ봉오동 대첩을 이끌었다. 나라가 망하자 모든 걸 희생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이분들이야말로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후대에 대한민국 역사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자기의 모든 걸 바친 분들이 명예조차 되찾지 못하면 우리 역사의 롤 모델이 사라져 버린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나라 화폐 속 인물을 거론했다. “어찌됐든 조선의 마지막은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종결됐는데 그 시대의 성리학자들만 화폐에 등장시키는 건 매우 비정상적이다. 광화문광장에도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만 있는데 이게 조선시대 광장은 아니지 않나. 21세기 대한민국의 광장이면 나라가 이만큼 성장하는 데 기여한 근대의 인물들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근대사를 부정만 해선 지금의 대한민국 발전은 설명하기 힘들다.”
한국학 대학원대학 만드는 게 꿈
-중앙SUNDAY에 연재된 『조선 왕을 말하다』가 10만 권 넘게 팔렸다. 역사서로는 보기 드문 베스트셀러인데.
“1997년부터 책을 썼는데 그때보다 요즘 쓰는 책 내용이 사실 더 어렵다. 그런데 묘한 것은 어렵게 써도 독자들이 수용한다는 점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 수준이 높아졌다. 1차 사료의 근거도 제시하려고 노력하는데 이는 독자들에게 일종의 역사해석권을 주고 싶어서다. 그래야 당파적ㆍ식민사학적 관점을 독자들이 직접 판단할 수 있지 않겠나.”
-중앙일보가 신년기획을 통해 역사교육 바로 세우기를 제안했다.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걸 할 때다. 또한 국사 교과서도 새롭게 쓰여야 한다. 국사 교육은 한 개인의 정체성을 북돋아주고 이를 통해 한국 사회를 올바로 보게 해줘야 하는데 지금 국사 교과서로는 불가능하다. 국사로 인성교육을 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사육신 사건을 토론에 부칠 수 있다. 성삼문처럼 옳은 길이지만 자기도, 가족도 죽는 길을 가는 사람과 신숙주처럼 옳지 않은 길이지만 자자손손 잘사는 길을 가는 사람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물론 어릴 땐 다들 성삼문이 되겠다고 하다가 나이 먹다 보면 세상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겠지만(웃음). 역사 속에 길이 있다.”
-글은 주로 언제 어디서 쓰나.
“오전 9시 연구소로 출근해 낮엔 웬만하면 책도 읽고 글도 쓴다. 저녁 땐 지인들과 술도 한잔 하지만 약속이 없으면 늦게까지 공부한다. 강의도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안 나간다.”
-앞으로의 꿈은.
“한국학 대학원대학을 만드는 게 꿈이다. 대한민국이 이만큼 성장했다면 우리 내부에 발전을 추동할 만한 씨앗이 있다는 얘기인데 정작 우리의 역사ㆍ철학ㆍ종교ㆍ언어에 대해선 깊이 있는 연구가 부족하다. 한국학 전문가를 많이 배출해야 한다.”
박신홍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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