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지팡이를 짚은 몸이 기우뚱하며 살짝 비틀거렸다.
15살때 발병한 골육종(뼈에 발생하는 암)은 제니의 좌·우 골반 뼈를 앗아간 대신 인공 골반과 커다란 흉터, 평생 함께가야 할 지팡이를 주었다.
생후 6개월, 소아암을 시작으로 리-프라우메니 증후군(유전자 변이로 여러 종류의 암이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하는 희귀병)은 제니의 세포 하나하나에 침투했다. 골육종을 거쳐 뇌종양에서 또다시 골육종으로 악순환은 계속됐다. 200회 이상의 화학치료와 방사선 치료…. 대수술도 10번을 넘게 받았다. 그런 제니가 내년 9월 USC의대에 입학한다. 4번의 암, 제니는 오늘도 웃는다.
# 불청객의 노크
"제가 태어난 지 6개월 정도 됐을 때 아빠가 기저귀를 갈아주다가 허벅지 안쪽에서 뭔가 덩어리 같은걸 발견하셨대요. 소아암이었는데 수술을 한 뒤론 정말 거짓말처럼 건강하게 지냈어요."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암을 제거한 자리에 훈장처럼 남은 상처를 통해 그때를 짐작할 뿐이었다.

제니는 중.고등학교 때 학교대표 배구 선수로 뛰었다. 강 스파이크를 날리는 배구 선수가 되고 싶었던 제니. 그러나 뼈 암의 일종인 골육종이 찾아들었다.
"웃기게 들리겠지만 병원에서 제 뼈에 암이 생겼다고 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났던건 '죽음'이 아니었어요. 배구를 못하게 될까봐 그게 가장 두려웠죠."
'죽을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안했다. 그저 몸이 조금 불편해질 수 있겠구나 했다.
그러나 '골육종'은 사춘기 15살 소녀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기 시작했다.
"화학 치료를 하니까 머리카락이 빠지잖아요. 친구들이 저를 웃겨 주려고 이 기회에 '모히칸 스타일(머리의 중앙부분만 남기고 삭발하는 머리스타일)로 바꿔봐'라고 했는데 '니 머리나 그렇게 밀어라'며 소리치면서 울기도 하고 그랬어요. 결국 나중엔 친구들 말대로 모히칸 스타일로 밀었지만요." 슬쩍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사춘기 소녀에게는 병마와 싸우는 고통보다 샤워후에 한웅큼씩 빠지는 머리카락들을 보는 고통이 곱절은 됐다.
# "엄마 아파서 미안해"
병마는 그녀에게 4년 이상 평화를 주지 않았다. 암과의 싸움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USC에 입학한 뒤 한동안 평화가 찾아왔다. 졸업 후 메디컬 스쿨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는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자신과 같이 소아암으로 시작해 리-프라메니 증후군을 겪는 이들을 치료하고자하는 목표가 그녀를 이끌었다.
"암을 이기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을 땐 시간이 멈췄으면 했어요."
그러나 3학년이 끝나가던 무렵인 2009년 늦가을 또다시 병마는 그녀를 찾았다. 이번엔 뇌종양이었다. 몇일 째 두통과 구토가 계속됐지만 위염 이려니 했다.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덴버에서 엄마가 날아왔다. 4년만에 찾은 병원에서 뇌 단층 촬영을 했다.
"아무 생각이 안났어요. 가슴이 철렁한 느낌도 아픈 기분도 들지 않았어요. 그저 온몸이 송두리째 마비된 기분…. 엄마만 옆에서 계속 우셨죠."
다시 지겨운 화학 치료와 방사선 치료가 시작됐다. 치료하며 뇌출혈까지 생겨 뇌수술이 불가피했다. 4년간 애지중지 길러온 머리카락을 다시 잃었다. 이번에 찾아온 놈은 제니를 쉽사리 놔주지도 않았다. '뇌암의 고통은 머리를 시속 100km 야구공으로 계속해서 맞는 것 같은 머리 속안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아빠는 제니가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할 때마다 그저 끌어안아줬다. 안 아플 때는 약에 취해 하루를 버티고 아플 때는 너무 괴로워서 '주님 그냥 저를 이제 놓아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뇌암 발병 2달 뒤 뼈 암(골육종)이 재발했다.
"모두들 제가 죽는다고 생각했어요. 하루는 아빠가 '뭘하고 싶냐'고 묻길래 '의사가 되고싶어. 결혼도 하고싶어'라고 얘기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놓아달라고 했던 기도는 삶의 끝자락에서 떨리던 절실함이었다.
부모님은 덴버에서 LA까지 딸의 간호를 위해 교대로 회사를 쉬며 오갔다. 딸의 유전병이 마치 자신들의 업인 양 괴로워했다. 한국어가 서툰 제니는 그런 부모님을 항상 다독였다. "엄마 미안해 내가 많이 아파서 미안해."
# 내 인생은 4막5장
스물두살. 지난 1월 뼈암과 뇌암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복용약도 끊었다. 그러나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암'. 어쩌면 암은 그녀의 인생에서 '싸워야 할 동반자'지만 그녀는 이제 암이라는 병마 앞에 담담하다. "암은 저에게 관문이에요. 또 언젠가 다시 암이 저를 찾아온다면…."
USC대학교 생물학과를 마치고 의대에 진학하는 제니는 입학을 내년 9월로 미루기로 했다. 비싼 등록금도 문제지만 '휴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병원에 있을 때 코스타리카를 사진으로 봤는데 그 곳에 가보고 싶단다.
"다시 학교에 가면 남자친구도 만날려구요. 그동안 '암'이란 놈 때문에 좀 바빴거든요"라며 너스레를 떤다. 이상형을 묻자 "눈은 별로 안높아요" 하면서도 '다니엘 헤니 쥬드 로 애쉬튼 커쳐 리차드 기어…' 계속 나온다. 암과 4번의 '맞짱'을 떠 승리했지만 천상 스물둘 천진난만한 여대생이다.
"스카이 다이빙이나 패러 글라이딩도 해보고 싶고 아기도 낳고 싶어요. 불가능하다는 건 알지만 제 인생에 포기는 없어요. 지팡이를 평생 친구로 삼아야하고 그렇게 사랑하던 배구를 못하지만 암과 싸움에서 제가 배운 것들도 있어요. 암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생각하게 됐고 또 의사가 되고자 하는 소망도 찾았으니까요."
"음…암을 고치는 의사 중에 저만큼 암에 많이 걸려본 사람이 있을까요?" 제니가 두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그 눈동자 안에서 무언가 반짝인다.
제니의 인생 4막 5장. 4번의 암을 이긴뒤 다섯번째 인생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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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영 기자 sonojune@koreadaily.com 중앙일보 기사 둘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