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겨례의 지도자

朴槿惠의 잃어버린 18년절망의 심연을 끝없이 추락했고 그 바닥을 박차고 떠

화이트보스 2011. 3. 20. 10:44

朴槿惠의 잃어버린 18년

절망의 심연을 끝없이 추락했고 그 바닥을 박차고 떠올랐다 !

金泰完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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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고문받는 느낌이었고, 피가 역류하는 듯한 울분을 느꼈다』(朴槿惠)

● 6년간 국립묘지서 朴대통령 공개 추도식 갖지 못하고 집안 제사
● 1980년 29세 나이로 영남大 이사장이 됐다가 7개월 만에 물러나
● 신학대학원 청강하며 심령·종교·철학 서적 탐독
● 1980년대 말 鄭仁淑 사건 再조명되자 부친 명예 위해 대외활동 시작
●「崔太敏」 전횡이 발단, 자매싸움으로 번져 육영재단 이사장 물러나
● 독서와 사색…1997년 정치입문까지 은둔
  朴槿惠(박근혜) 前 한나라당 대표의 인생유전은 기구하다. 그녀의 삶에 드리운 榮辱(영욕)의 그림자는 너무 짙고 촘촘해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 삶의 단절은 불치의 병처럼 죄어 왔고 가학적 증오심은 거대한 공포였으리라. 1979년 10·26 사태 이후부터 1997년 12월 정계에 입문하기까지 그녀의 18년은 실존적 진공상태였다. 사실상의 영부인에서 「고아가 된 처녀가장」으로 零落(영락)한 이후 그녀의 18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모든 가치를 파멸당한 채 공허와 핍박, 증오 속에서 보냈던 시절을 정신병리 차원에서 진단해야 할까. 아니면 거세당한 자아를 찾아가는, 무시무시한 환멸의 체험을 이겨 내는 치유의 과정으로 봐야 할까.
 
  육영재단 운영을 둘러싸고 여동생과 험악하게 다투거나 남동생이 필로폰을 투약해, 그녀의 家系(가계)가 도마에 오른 적도 있었다. 1980년대 말 선친의 유업을 잇겠다며 대규모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대중 앞에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기간은 따지고 보면, 2~3년 남짓 짧았다.
 
  기자는 朴槿惠의 가려진 18년을 추적했다. 그녀에게 장문의 질의서를 보내고 주변 사람, 친지들을 만나 보았다. 1980~1990년대에 가진 인터뷰와 몇 권의 수필집을 찾아 읽었다. 조각난 삶을 끼워 맞추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1974년 陸英修(육영수) 여사가 文世光(문세광)의 흉탄에 쓰러진 뒤 朴槿惠는 퍼스트레이디가 되어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웠다. 그러나 5년 뒤 1979년 朴正熙(박정희) 대통령마저 쓰러졌고 그녀는 하루아침에 청와대를 떠나야 했다.
 
  그해 11월3일 國葬(국장)을 치르고 15년 11개월 4일 동안 살던 청와대를 떠나 사저로 옮긴 것은 11월21일. 쓸쓸히 「서울 신당동 62-43번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심경이 어땠을까. 당시 그녀가 남겼던 짤막한 말이다.
 
  『앞으로 아버지께서 심혈을 기울이신 이 나라 이 사회를 위해 조그마한 정성을 기울이며 조용히 살아가겠습니다』
 
  「조그마한」과 「조용히」라는 수식어는 그녀가 살아가는 삶의 지표가 되었다. 신군부는 육영사업을 제외한 모든 활동을 막아 버렸다. 1980년 5·17 조치 후 그녀가 이끌던 「새마음봉사단」(舊구국여성봉사단)은 강제 해산됐고, 그해 4월 영남大 3代 이사장에 취임했지만 7개월 만에 물러나고 말았다. 양친의 추도식은 집안 제사로 대신해야 했다. 추도식이 국립묘지에서 거행된 것은 10·26 이후 7년 만인 1987년에야 가능해졌다. 5共의 신군부는 朴正熙 추도식을 강제로 막았다.
 
 
  『朴槿惠는 숨쉬고 사는 것도 어려웠다』
 
朴正熙 前 대통령의 관을 보살피고 있는 朴槿惠씨의 모습. 당시 28세였다.

  金正濂(김정렴) 前 청와대비서실장의 증언이다.
 
  『추도식을 6년간 하지 못했습니다. 全斗煥 대통령 측이 못 하게 막았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신군부는 朴正熙 대통령과 관련한 모든 자료마저 없애 버렸습니다. 제가 한국경제사를 쓰려고 朴대통령 시절 관련 자료를 찾았더니 중앙 부처는 물론 지방까지 각종 대통령 보고자료가 사라졌더군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아예 하나도 없었습니다. 신군부의 지시로 없애 버린 것 같아요. 추도식을 국립묘지에서 못 하니 朴槿惠씨의 집에서 친지들만 몇 명 모여 조촐하게 제사를 올렸어요』
 
  한 전직 大使(대사)의 회고다.
 
  『추도식을 갖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신군부 측이) 부정적이었어요. 사실 朴대통령은 아들처럼 全斗煥을 키웠잖습니까. 陸英修 여사 서거하고 그를 경호실 작전차장으로, 보안사령관으로 키웠습니다. 대통령이 되니 전임자의 위상이 워낙 크니까 흔적을 없애려 했을 겁니다. 朴대표는 숨 쉬고 사는 것조차 힘들었을 겁니다』
 
  사촌 오빠 朴在鴻(박재홍) 前 의원의 말이다.
 
  『사실 국립묘지에서 추도식을 주최할 사람이 없는 상태였어요. 「5·16 장학회」(정수장학회의 前身)가 있었지만 (신군부 쪽에서) 달갑게 여기지 않아 공개 추도식을 갖자고 팔을 걷어붙이지 못했어요. 「굳이 국립묘지에서 해야 되느냐. 집에서 제사 지내면 되지」라는 식으로, 말하자면 간접 압력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29세에 영남大 이사장… 7개월 만에 사퇴
 
  조용히, 조그마하게 살겠다는 朴槿惠의 생각은 애초에 틀어지게 됐다. 선친이 남긴 흔적은 크고 방대했다. 당장 쓸 수는 없다 해도 「돈」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니 세상을 등져 은둔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미혼에 대한 구구한 억측도 사라지지 않았다.
 
  서울 신당동 사저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980년 3월, 그녀는 영남大(영남학원) 이사로 취임한다. 당시 朴槿惠는 29세였다. 영남학원 정관 제1조에는 아직도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온다.
 
  <제1조(목적): 이 법인은 대한민국의 교육이념과 교주 박정희 선생의 창학정신에 입각하여 교육을 실시함을 목적으로 한다>
 
  朴槿惠는 이사 취임 후 불과 1개월 만에 이사장이 됐다. 그러나 비통함을 접고 의욕을 낼 기분은 아니었다. 억눌렸던 「反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1980년 대학가에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학생시위가 거세졌다. 영남大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녀는 취임 7개월 만에 이사장에서 쫓겨나게 된다.
 
 
  『저와 학교가 무슨 인연이 있겠습니까?』
 
朴槿惠 前 대표가 쓴 수필집.

  朴槿惠를 잘 아는 3共 시절 관료의 설명이다.
 
  『정수장학회가 100% 지분을 갖고 있던 MBC 지분 70%를 빼앗아 방송문화진흥원에 강제 헌납했잖아요. 경향신문은 아예 뺏기고 영남大도 마찬가지입니다. 영남大는 학생들의 소요사태가 많았어요. 사실 철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