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한 北소식으로 세계 이목 끈 '임진강' 대표 탈북詩人 최진이
"목숨 걸고 北소식지 만들어… 형사 2명이 편집실 지켜줘"
두살난 아들 업고 두만강 건너며 다시는 돌아보지 않겠다고 했던 北
우리가 아니면 그 실상 누가 알리나 싶어 북한사람들이 쓰고 읽는 잡지 만들어
"서라! 야, 서라!" 보초병의 째진 목소리가 들렸다. "뒤에서 암만 소리쳐도 돌아보지 말고 뛰라요!" 심장은 비틀어 짜는 것처럼 아프고 바짝바짝 타들었다. 목에서 쇠 비린내가 확확 풍겼다. 호박밭을 지나 키를 넘는 강냉이밭을 경황 없이 헤쳐나가는 속에 뜻밖에도 헝가리 시인 뻬떼피의 시가 가슴 속에서 용솟음치며 울려 나왔다. '…사랑이여, 너를 위함이라면 목숨을 바쳐 뉘우침 없으리라, 허나 자유여, 너를 위해서라면 내 사랑까지도 바치리라!'('국경을 세 번 건넌 여자' 중에서)북한을 탈출한 지 13년. 시인 최진이(52)는 봄 햇살처럼 웃고 있었다. 두살 난 아들을 등에 업고 두만강을 건넌 뒤 다시 중국과 몽골, 그 수십 겹 철조망을 헤쳐온 여자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따뜻하고 푸근했다. 그녀는 글을 쓰고 있었다. "마감이 코앞"이라고 했다. 시를 쓰는 건 아니다. 최진이는 요즘 잡지 만드는 일에 빠져 있다. '북녘 내부인들이 만드는 잡지'라는 표제를 단 '임진강'. 2007년 11월에 창간, 10호까지 발간된 이 잡지의 발행인이자 편집인이다. 비밀 점조직으로 이뤄진 북한 주민들과 탈북자들이 현지 상황을 전한다. 기사의 초고가 북한과 중국의 접경지대에서 쓰이고, 발행 부수 500부 중 150부가 제3국을 통해 북한으로 들어간다. 잡지가 겨냥하는 궁극의 독자가 북한 주민들이란 얘기다.
이 때문에 최진이는 북한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 실제로 '임진강' 편집실에는 양천경찰서에서 파견한 형사가 상주하고 있었다. 최진이를 포함한 편집진의 신변보호를 위해서다. 그녀는 왜 이토록 위험한 잡지를 만드는 걸까. "돌아보지 않으리라, 눈에 흙에 들어가기 전엔 저 땅을 다시 밟지 않으리라, 하고 탈출한 북한이었다. 그런데 우리 아니면 북(北)주민을 누가 위해주나, 우리 아니면 세계의 흥밋거리로 전락한 북의 실상을 누가 제대로 알려주겠나 싶었다."
- ▲ 탈북시인 최진이가 마감으로 분주한‘임진강’편집실에서 활짝 웃었다.“ 멤버 중 저만 노출될 수 있지요. 다른 분들은 안돼요.”그녀는“월북작가들에 대한 연구만 이뤄지고 있는 한국에 북한문학의 진수를 소개하는 것도 자신의 일”이라고 말했다.‘ 한국 문인 중엔 누굴 좋아하 느냐’는 질문에는“소설가 박경리, 시인 최승자”라고 답했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3월 초까지 통 연락이 안 되더라.
"11호 제작 때문에 밖에 나가 있었다."
―'밖'이라면 중국? 중국 어디인가?
"북과 중국의 접경지역이라고만 해두자."
―'림진강'이란 제호로 나온 창간호는 이시마루 지로라는 일본인이 주도했다.
"'림진강'은 북사람들이 쓰고 북사람들이 읽는 잡지다. 관영매체밖에 없는 북 사회에 북주민들의 목소리를 내어보려고 창간했다. 돈이 없으니 어느 교회가 우리 원고를 프린트해줘서 창간준비호를 3호까지 만들었는데, 반향이 크자 이시마루가 뛰어들었다. 일본 다큐제작사인 아시아프레스 대표인데, 이게 수익이 되겠다 싶으니까 인수한 거지. 실제로 일본에서 1부에 3000엔이었던 창간호가 3000부나 팔려나갔다. 일본판도 만들고 영문판도 만들더라. 회의가 일었다. 북사람들이 읽어야 하는 잡지인데 일본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 재간 없이 독립했다. 우리 힘으로 만들기 시작한 5호부터 제호를 '임진강'으로 바꿨다."
―북한 주민들이 어떤 방식으로 잡지 제작에 관여한단 말인가.
"'기자'들은 크게 두 부류다. 불법 도강(渡江)한 북주민들과 여권을 가지고 중국으로 나온 일시 방문자들. 두 나라 접경지역에서 만나 그들이 전하는 현지 소식을 녹취한 뒤 브레인스토밍 한다. 공무원, 교사, 무역상 등 다양하다. 글쓰기 훈련이 안 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일단 말로서 풀게 한 다음 녹음한 내용을 다시 타이핑하며 주제를 잡아가는 식이다. 편집진 중 한 사람은 북주민들과의 접촉, 기자훈련을 위해 1년에 절반 이상 접경지역에 머문다."
―현지 주민들로서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물론이다. 언론의 자유가 없는 북 사회에서 원고와 비디오테이프를 외부세계에 전하는 행위는 반국가적 범죄, 간첩행위다. 그럼에도 위험을 무릅쓰는 이유는 북 사회를 변화시켜 한국이나 중국처럼 만들겠다는 사명 때문이다."
―중국 공안들의 감시가 심할 텐데.
"현지 선교단체, NGO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접경지역에 사는 한족, 조선족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농사일 돕고 봉사하면서 신뢰를 얻는 대신 그들의 보호를 받는다."
―북한 주민들은 어떻게 '임진강'을 받아보나.
"우리가 겨냥하는 독자는 일반 민중이 아니라 지식인층, 공무원들이다. 북한에는 '사회학'이라는 게 없다. 지식인들조차도 자신들이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지, 뭐가 문제여서 지금의 이 고통을 당하는지 명쾌하게 분석하지 못한다. 차우셰스쿠(루마니아) 독재의 몰락을 알지만 그것이 북한 사회에 어떤 교훈을 주는지 알지 못한다. 나 또한 한국에 와서 사회학을 공부한 뒤에야 북한이 보이더라. 책을 통한 '지식의 전파'는 그래서 중요하다. 삐라, 라디오, TV드라마를 통한 단순 정보 가지고는 곤란하다. 맥락과 분석이 있어야 하고 대안이 제시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락에 불과하다."
―배달경로가 궁금하다.
"일단 외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관들에 발송한다. 북한 내부로는 제3국을 통해 들어간다. 우리가 북에 살았으니 평양시내에 있는 주요 기관들의 위치와 주소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우편물의 적법성을 판단하려면 보위부, 행정 담당자들이 책을 반드시 읽게 돼 있다. 그들의 지식 갈망, 정보욕을 채워주면서 인식 전환을 유도한다."
―잡지 제작에 드는 비용은 어떻게 충당하나.
"그동안은 미국 기금단체들의 도움을 받았다. 일본 잡지로 알려져 한국의 지원은 받지 못했다. 그래서 최근 탈북단체로 NGO 신청을 했다. 사단법인이 되면 통일부 프로젝트에 참여,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피뜩전기세'를 아십니까?
―'임진강' 얘기를 해보자. 올봄에 발간되는 11호엔 어떤 내용이 실리나.
"중동, 북아프리카로 번지고 있는 '재스민 혁명'을 특집으로 다룬다. 북한 식량의 만성적 부족을 야기하는 시대착오적 동원경제방식에 대해서도 집중분석한다."
―창간호에는 2006년 북한의 미사일·핵실험 관련 기사가 실렸었다.
"물고기 한 마리 죽이지 못한 핵실험에 대한 북주민들의 조소를 담았다. 실험 참가자들이 방수복도 안 입고 작업에 들어갔으니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개인적으로는 북한 주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기사들이 재미있더라. '중국 맛내기(조미료)를 치면 왜 음식에 벌레가 들끓을까' 같은 얘기들.
"북주민들 일상에 불고 있는 변화 바람을 감지하는 것도 잡지의 중요한 목적이다. 요즘 북에는 '사진업'이 성업 중이다. 유명 배우나 멋진 풍경 사진으로 달력을 제작해주는 건데, 자기 아이의 얼굴을 찍어 꾸미는 게 제일 비싸다. 북 사회에 새롭게 열리는 개인기록의 시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9호에서 다룬 '자전거' 이야기는 북 사회에서 개인 소유의 수위가 어디까지 올라왔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도시인의 80%가 현재 자전거를 소유한다. 한 대에 100달러이니 1년 봉급을 꼬박 모아도 살둥말둥인데, 생업에 절실한 수단이니 기를 쓰고 구입한다. 한국의 '마이 카(my car)' 개념이랄까. 당국에선 면허제를 실시하고 등록번호를 준다. 주차비도 내야 한다."
―시장화, 개방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뜻일까.
"개인 소유, 내 것에 대한 욕심이 생겨나는 거지. 한번은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인 오극렬의 딸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로 죽어서 여성들의 자전거 운전을 금지한 적이 있다. 자전거 타고 시장 다녀오던 여자를 급찰대가 오솔길까지 쫓아가 단속했는데 자전거를 압수하겠다고 하자 강물로 뛰어들어 죽었다. 북주민들 사유재산개념은 이렇게 높아가는데 권력자들은 막으려고만 하니 북한 시장이 비정상으로 왜곡된다. 북에서는 비법해야 산다는 말이 있을 만큼 마피아, 지하경제의 나라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민화'라는 타이틀의 짧은 콩트들도 인상적이다. '피뜩 전기세' 같은.
"민중들 사이 떠도는 얘기들이다. 전력공급이 달리니 종일 전기를 내보내지 않고 '명절에 30분' 하는 식으로 피뜩피뜩 넣어주는데, 못된 관리들이 전기세만큼은 악착같이 받아내려 하니 배짱 좋은 한 사람이 호주머니에서 돈을 피뜩 보여주고 다시 쏙 집어넣으면서 '이게 피뜩 전기세요' 하더란 얘기다. 얼마나 위트가 있나. 풍자적이고. 평양 출생 봉이 김선달의 핏줄이 흐르는구나 싶었다. 북사회가 아직 살아 있구나 싶었다. 잡지를 처음 만들 땐 북 문제는 북사람들이 해결 못하니 외부에서 도와줘야 한다 생각했는데, 10호까지 만들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북주민들이 스스로 변화를 주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요즘 하고 있다."
■"담 있던 여자애" 임수경을 만나다
최진이는 1959년 평양시 만경대구역 봉수동에서 태어났다. 조소친선문화협회 부위원장이던 아버지와 일본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4남매 중 맏딸이다. 김형직평양사범대학을 졸업한 뒤 월간 '조선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7세 연상의 남자와 결혼한 지 3년 만에 평양추방령을 받는다. 전처의 아들이 말썽을 피우자 '부모로서 자식을 교양하지 못한 죄'였다. 갓난아기는 시댁에 맡긴 뒤 생업을 찾아 떠돌던 최진이는 '고난의 행군'(1990년대 중반 이후)으로 일컬어지는 끔찍한 기아, 시 한 줄 쓸 수 없는 북한의 현실에 절망해 1998년 두만강을 건넌다. 하지만 북에 두고 온 두 살배기 아들 생각에 목숨을 건 도강을 다시 시도한다. 두만강을 세 번 건넌 셈이다.
―시는 언제부터 쓰게 됐나.
"아버지를 비롯해 문학하는 집안이었다. 벽에 문학서적이 가득 차 있었고, 늘 책을 읽었다. 어머니가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 뒤, 자전거 공장 노동자로 살아가던 20대에도 내 삶의 희망은 책읽기와 글쓰기뿐이었다."
―당신의 탈북기인 '국경을 세 번 건넌 여자'(북하우스)에 보면, 어머니가 자살을 하셨다.
"영어, 일어에 능했던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아버지의 협박성 청혼, 외할아버지의 묵인으로 유학시절 사귄 의대생 연인과 헤어지고 결혼했는데,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는 상습적으로 구타했다. 어머니는 늘 아팠고, 나는 여덟 살 때부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 어머니에 대한 무한한 그리움이 느껴지더라.
"신발 바로 놓는 습관부터,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글을 잘 쓰는 법까지 모두 어머니에게 배웠다. 인민학교 2학년 때 아버지와 왜 이혼하지 않느냐고 어머니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사람은 장점을 보고 살아야지 결함을 보고 사는 게 아니다' 하시더라. 오로지 인격 하나로만 아버지와의 삶을 견뎌오시던 어머니가 헛간 대들보에 끈을 늘여 목을 매고 돌아가신 뒤 나는 사교성이라고는 없는 무뚝뚝한 아이가 됐다."
―1988년 북한 최고의 작가양성 기지인 김형직평양사범대학 작가양성반에 들어갔다.
"내 인생의 전성기였지.(웃음) 글 쓴다는 사람들마다 문턱을 베고 죽으면 원이 없겠다는 '조선작가동맹' 시인이 되었을 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더라.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김정일의 정책을 안받침하는 찬양문학을 써야 했으니까. 모친을 일찍 잃고 권력 싸움에 점철된 고독한 삶을 살아야 했던 김정일의 고민을 이해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려보기도 했지만, 내가 써내는 시는 정치의 살이 전혀 오르지 않은 앙상한 문학시일 뿐이었다."
―임수경이 평양에 간 때가 1989년, 당신이 평양사범대학에 다닐 때다.
"굉장했지. 평양시가 수경이와 40여일간 열애를 했다. 마침 내가 다니던 대학을 수경이가 방문했는데, 2층 학장실에 올라간 수경이를 보기 위해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그러자 수경이 돌발적으로 발코니로 나와 '여러분, 사랑합니다!' 하며 손을 흔들더라. 참, 담 있는 아이구나, 생각했다. 문제는 수경이 남한으로 돌아간 뒤였다. 북의 권력자들은 암살자가 나타나 수경이를 총살하거나, 적어도 남한이 그 애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야 북한주민들에게 정치선전을 할 수 있지 않나. 그런데 수경이 판문점을 지나 남으로 넘어가니 평양시민들만 충격을 받았다. 공화국의 장벽, 철조망이 저렇게 허물어질 수 있구나 하는 놀라움에."
■'밥'을 위해 '性'을 팔다
―나이 서른다섯에 열일곱 살이나 많은 남자와 결혼했다.
"첫사랑이던 남자의 부친이 정치범으로 몰려 추방되는 바람에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 맘먹었는데, 어느 중견시인이 문학이 깊어지려면 결혼해 아이를 낳아봐야 한다더라. 마침 김책공대 출신의 원자력 건설 전문가로 상처한 남자를 소개받았다. 너무 늙고 집안도 교양 없어 보였지만, 내 문학공부에 경제적 뒷받침이 될 수 있다는 기대로 결혼을 결심했다."
―혹독한 시집살이, 평양추방령, 절망적 식량난을 겪으며 탈북을 결심한다.
"평양에서 추방된 뒤 사나흘씩 꼬박 굶곤 하는 나날이 계속됐다. 이러다 파리 새끼처럼 죽겠구나 하는 공포감이 엄습하더라. 그때 중국을 오가던 사촌 동생을 만났다. 조선땅은 어디나 전망이 없으니 중국으로 빼주겠다고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도 탈북을 결심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처음엔 아들 없이 혼자 아니었나.
"운명에 맡기자, 모자의 인연이면 다시 만나겠지, 했다. 한데 두 돌이 지나도록 생일상 한번 못 차려준 아들이 눈에 어른거려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시누이 집에서 온갖 천대 받으며 살고 있을 아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래서 다시 건넜다. 넘어가는 사람 열의 아홉이 잡힌다는 삼엄한 경계망을 다시 뚫기 위해 아들을 구하러 갈 코스를 머리로 수백번씩 외고 연습했다."
―처음 두만강을 건널 때 당신을 도와준 여인의 이야기는 끔찍하더라. 밥을 먹여줄 수 있는 남자에게 시집가려고 전 남편과의 사이에 난 아들을 목 졸라 죽이는….
"'거짓말이지?' 하며 따질 기력도 없더라. 그만큼 북 사회는 극도의 굶주림에 시달렸다. 자기 딸이 염소인 줄 알고 잡아먹은 남자 이야기도 떠돌았다. 한국 와 이화여대에서 여성학을 공부할 때 '성매매'를 주제로 토론한 적이 있다. 내가 '북의 여자들이 비록 성매매를 거치더라도 중국이나 한국으로 탈출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자, 여성학자들이 '말도 안 된다'며 아우성치더라. 그래서 내가 물었다. '야, 너희들이 기아가 뭔지 아나, 배고픔이 뭔지 아나?' 굶주린 사람에겐 정의도, 신념도, 종교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그토록 끔찍한 기아에 시달리는데 북한 사람들은 왜 권력에 저항하지 않나.
"한국 와서 그런 질문 수없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독재체제 속에 너무 오래 살아서, 자기 소유가 없고 늘 국가가 주는 집, 나눠주는 식량에 길들여진 탓이라고 대답했지. 지금 생각하면 그 또한 핑계에 불과하다. 빵과 서커스에 영혼을 팔아버린 고대 로마사람들처럼 적당히 먹을거리, 살 곳만 배급받으면 거기에 안주해 우둔하게 살아가는 북주민들 또한 독재사회 구축에 일조한 셈이다."
■대한민국의 성공 콤플렉스
―아들과 함께 서울에 정착한 지 12년이 지났다.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고 들었다.
"사투에 가까웠던 탈북의 기억으로 아이는 최근까지도 힘들어했다. 밖에 누가 서 있다며 잠들지 못했다. 10개월에 걸친 중국에서의 은둔 기간에 한족 남자들에게 겪었던 폭행의 악몽이 지독하게 아이를 괴롭혔다. 정신과 치료를 받은 후에야 조금씩 나아졌다. 다행히 같은 탈북자 아버지를 얻게 된 뒤(2006년 재혼)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안정을 찾고 있다. 내가 아이에게 하루 7시간씩 공부를 시켰던 것도 스트레스였던 것 같다."
―한국 사회의 치열한 교육경쟁에서 당신 또한 자유롭지 않았나 보다.
"아들의 중학교 졸업식에 갔더니 교장선생님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이야기를 하시더라. 씁쓸했다. 누구나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나 김연아가 될 수 없다. 다양한 재능과 꿈을 가진 아이들에게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성공 콤플렉스를 심어준다. 목사님 설교도, 스님들 법문도 몽땅 다 저 하늘에 가 있다."
―탈북자들의 한국 사회 부적응이 문제가 되고 있다.
"'자기 존엄'이 없고, 권력의 횡포 속에 오로지 악으로만 버티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철저히 조직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온 탓에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데도 익숙지 않다. 감시와 통제사회에서 살아온 그들의 트라우마, 탈북과정에서 겪은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게 우선이란 생각이다."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은 동독 출신 여성이다. 당신을 비롯한 탈북자들 또한 한국 사회의 주류로 진입할 수 있다고 믿는가.
"글쎄, 탈북자가 국회의원이 되는 날도 언젠가는 오겠지만 지금으로선 요원하다."
―고학력 엘리트, 인재들이 많지 않나.
"그건 엘리트와 상관없는 일이다.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한국을 여전히 자기 사회로 여기지 않는다. 이 땅에서 꿈꾸고 나래를 펼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시간이 필요하다."
―'임진강'이 수익사업도 아닌데, 생계는 어떻게 유지하나.
"임대아파트에서 최소의 경비로 산다. 그래서 감사해야 할 분들이 많다. 매달 생계비를 지원해주시는 성문교회, 이화여대 북한학과 김석향 교수님. 그리고 우리를 지켜주시는 두 형사님 덕분에 한국 물정에 밝아졌다.(웃음)"
―죽기 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문학작품을 남기고 싶다고 책에 썼더라. 시는 계속 쓰고 있는가.
"'임진강'이 내게는 시다. 하나의 기사를 완성하는 데 6개월, 1년이 걸리기도 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제작하는 이 한 권 한 권이 우리의 희망을 노래하는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