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이 15일 국회 외교통상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부결됐다. 한나라당 소속 위원장인 유기준 의원이 동의안을 표결에 부치려는 순간 민주당 김동철 의원이 의사봉을 빼앗았고 소위 소속이 아닌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은 유 위원장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이런 가운데 6명 소위 위원 중 한나라당 3명은 찬성, 민주당 2명은 반대 의사를 밝혔고 한나라당 홍정욱 의원은 FTA 동의안 자체에는 찬성하지만 물리적 충돌 속의 강행처리에 반대한다면서 기권 의사를 표시해 과반(過半) 의결 정족수에 미달했다.
상임위 소위에서 소수당의 반대에 부딪혀 안건 진행이 안 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안건이 아예 부결되는 장면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소위 인원은 많아야 5, 6명인 만큼 안건을 통과시키려는 쪽은 다수표가 확보된 경우에만 표결 처리에 나서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나라당은 소속 의원 4명의 표 점검 및 단속도 해놓지 않고 의사봉을 두드리려다 황당한 상황을 맞은 것이다. 여당의 정신 상태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기권표를 던진 홍 의원은 작년 12월 '앞으로 물리력에 의한 의사진행에 동참하지 않겠다. 이 약속을 못 지키면 2012년 총선에 불출마하겠다'고 선언했던 한나라당 의원 21명 중 한 명이다. 홍 의원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려고 국가적 현안이고 당론이 정해진 FTA 동의안에 찬성하면서도 비켜섰다는 것이다.
FTA 동의안이 외통위 소위를 거쳐 전체회의로 넘어갈 경우 의사봉을 잡게 될 남경필 외통위원장도 홍 의원과 마찬가지로 23인 선언자 중 한 명이다. 한·EU FTA와 그보다 더 야당이 결사반대하는 한·미 FTA 역시 민노당 강기갑 의원 한 명이 물리적 저지 제스처만 해도 상임위 처리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23인 서명 의원들은 시류(時流)에 장단을 맞추며 잠시 박수를 받았을지 모르나 민주주의가 딛고 선 다수결(多數決)의 원칙을 함부로 훼손해 놓은 셈이 됐다.
한·EU FTA 비준 동의안은 통상교섭본부가 번역한 한글본에서 207군데 오역(誤譯)이 발견돼 국무회의를 세 번 거치고, 국회에도 세 번째 제출된 것이다. 여당은 그렇게 넘어온 비준안을 한 치 앞도 제대로 안 살피고 밀어붙이려다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빠졌으니 정부와 여당이 정말 난형난제(難兄難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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