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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 못 받는 '디지털 유산'… 사이버 공간 떠도는 死者의 기록

화이트보스 2011. 4. 16. 20:41

상속 못 받는 '디지털 유산'… 사이버 공간 떠도는 死者의 기록

입력 : 2011.04.16 03:04 / 수정 : 2011.04.16 20:26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com

비공개 게시물 유족에게도 공개 안돼
친족이 요청시 폐쇄할 수는 있어 "내 비밀번호는…" 유언 남겨야 할 판

회사원 김남명(가명)씨는 올해 초 한 인터넷 카페에서 묘한 경험을 했다. 해외 위성방송 수신환경에 대한 불만 글을 많이 올려놓은 A라고 하는 회원의 게시물에 댓글을 달고 궁금한 내용을 문의하곤 했는데, 어느 날 다른 회원한테서 '그가 작년 11월 사망한 사람'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김씨는 "순간, 그동안 마치 유령과 이야기해왔던 것처럼 느껴졌다"며 "지금도 많은 신입회원들이 A씨의 글에서 정보를 얻고 댓글도 남기고 있다"고 말했다. A씨는 온라인에서 계속 살아 있는 것으로 봐야 할까 죽었다고 봐야 할까.

싸이월드 미니홈피 2500만개, 네이버 블로그 2600만개 등 현재 한국 인터넷 공간에는 수천만 개의 개인 블로그와 홈피가 존재한다. 여기에 인터넷 이용자 3명 중 2명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를 이용하고 있다. 누군가 갑자기 죽음을 맞는다면, 사후에도 트위터와 페이스북, 블로그는 그대로 남게 된다. 거대한 디지털 공간 어딘가에 이미 육신이 사라진 사람의 글과 사진이 남아 떠돌고 있는 것이다.

유명인들의 경우,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가 사후에 '추모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영화배우 최진실씨의 미니홈페이지는 지난 2008년 9월 30일 새벽 1시 49분 본인의 이름으로 올린 사진이 마지막 게시물로 남아 있다. 그는 더 이상 이곳을 찾지 않는다. 하지만 살아생전 그를 좋아했던 팬들이 여전히 그의 사이트를 방문하고 있다. 13일에도 1000명 가까이 다녀갔다.

지난달 1주기를 맞았던 천안함 장병들의 홈페이지에도 많은 이들이 찾아와 추모의 글을 남기고 있다. 고(故) 정범구 상병 미니홈피에는 지난 9일 어머니가 아들의 이름으로 "범구야, 엄마가 보고 싶지 않니"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디지털 유산'으로도 불리는 사자(死者)들의 기록물은 재산이 아니기 때문에 유족들이 상속할 수 없다. 부모라도 자신들보다 먼저 세상을 뜬 자식의 이메일이나 개인적으로 간직해온 사진들을 열어볼 수 없다. 네이버 등의 IT서비스 업체는 가족에게도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고 있다. 네이버 관계자는 "죽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비공개'로 저장한 정보는 공개되는 것이 사자의 의지에 반하거나, 명예를 훼손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만 친족이 요청할 경우 이들 블로그나 홈페이지를 폐쇄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 경우 그곳에 담긴 사진과 기록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 그 때문에 많은 유가족들이 자녀나 가족이 남겨놓은 디지털 유산을 보지도, 버리지도 못한 채 인터넷 공간에 살려두고 있다. 실제 얼마나 많은 사자들의 블로그가 디지털 공간에 남아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SK커뮤니케이션즈(싸이월드)에 따르면, 올해 들어 1~3월 석 달간 사망자의 아이디 및 비밀번호 확인요청이 50건, 탈퇴 요청이 41건, 미니홈피 명의 변경 요청 2건 등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싸이월드 한 곳에서만 최소 1년에 400건 가까운 요청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매년 사망하는 싸이월드 이용자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 이들 '망자(亡者)의 홈페이지'는 대부분이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가족이 아닌 제삼자가 죽은 사람의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손을 대는 경우도 있다. 실제 한 천안함 희생 장병의 경우 블로그가 폐쇄됐고, 싸이월드의 자료들도 모두 삭제된 것으로 나타났다. 본지가 업체측에 확인한 결과 가족들의 요청은 없었다고 한다. 네이버와 싸이월드 관계자는 "연인이나 친구 중 누군가가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면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망자의 홈페이지의 경우, 무분별한 광고글로만 도배되는 경우도 많다. 인터넷 서비스 업체들로선 더이상 활용되지 않는 사이트의 데이터베이스가 쌓일 경우 서버에 부하가 걸릴 수도 있다.

미국 미시간주에서는 지난 2005년 이라크전에서 사망한 한 병사의 아버지가 야후를 상대로 아들의 이메일 계정을 볼 수 있도록 해달라는 소송에서 이겨, 이후 미국에서는 친족에 대해선 열람 권한을 인정해주는 판례가 자리 잡았다고 한다. 이미 미국에선 IT서비스를 가입할 때 유언처럼 '사후에 자신의 아이디와 비밀번호 정보를 어떻게 처리할지' 지정해두거나, 사이버 세계에서 '영생'을 원하는 이용자들을 위해 죽은 후에도 사이트와 정보를 관리해주는 서비스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뉴욕타임스 매거진이 지난 1월 '당신이 죽었을 때 사이버 공간에서 해야 할 일들'이라는 기사를 게재하는 등 '디지털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는 죽은 이의 영혼이 사이버 공간에 저장된다는 상상에 기반한 '굿바이, 욘더'(2010 대한민국 뉴웨이브문학상 수상작)라는 소설이 발표되기도 했다.

지난해 국회에서는 이용자가 사망했을 때 '배우자와 2촌 이내의 친족이나 망자가 지정한 개인'에게 인터넷 관리 권한이 상속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정보통신망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이 한나라당 박대해 의원 주도로 발의됐지만, 더 이상의 논의는 중단된 상태다. 박대해 의원은 "법안 발의 이후 이 법의 의의와 중요성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아직 상임위에도 올라가지 못했다"며 "조만간 공청회와 전문가 간담회 등을 통해 법안을 심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임주환 디지털케이블연구원장(전 ETRI원장)은 "해외에선 전 세계 5억명이 가입한 페이스북 이용자의 사후 관리 문제나 IT서비스 업체 서버의 과도한 부하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며 "우리도 이제 법적·제도적인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야 하는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