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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시간 들여야 달인 된다? 천만에~ 스마트폰이면 당신도 바로 달인손민선

화이트보스 2011. 4. 17. 09:08

1만시간 들여야 달인 된다? 천만에~ 스마트폰이면 당신도 바로 달인

  • 손민선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

입력 : 2011.04.16 03:01

초점·노출 일일이 맞추던 카메라… 이젠 자동에 손떨림까지 보정
휴대폰으로 영화까지 찍는 세상… 요즘 기술은 창조·예술성 북돋워

손민선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
말콤 글래드웰의 책 '아웃라이어'에는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이 나온다. 성공한 사람의 비결은 집요한 연습과 반복 학습에 있다는 것인데, 그에 걸린 시간이 대략 1만 시간이라는 것이다. 하루에 3시간씩, 10년을 투자해야 비로소 아웃라이어, 즉 달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20세기 사진의 거장(巨匠)으로 추앙받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그가 남긴 '결정적 순간'이라는 말처럼 브레송은 인물의 움직임이나 위치가 배경과 함께 절묘한 구도를 이루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가 작품 활동을 하던 시기의 카메라 기술은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에는 좀 부족했다. 그가 사용한 라이카 M3는 출시된 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가를 유지하는 명기(名器)지만 만만하게 쓸 수 있는 카메라는 아니다. 필름을 쓰는 불편함과 비용은 물론이고, 사진을 찍을 때마다 초점거리와 노출을 일일이 설정해야 하는 수동식이다. 셔터 스피드가 느려 사진이 흔들리기도 일쑤다.

이런 카메라로 브레송은 어떻게 결정적 순간을 포착했을까? 그는 촬영 조건에 따라 최적의 노출값과 초점 거리를 본능적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카메라 설정을 맞추는 연습을 항상 했다. 느린 셔터 스피드에서도 흔들림 없는 사진을 찍기 위해 술과 담배를 멀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그의 재능이 빛을 발한 것이다.

일러스트=김현국 기자 kal9080@chosun.com
그러나 이제 사진은 브레송과 같은 프로페셔널의 전유물이 아니다. 촬영모드에 맞춰 셔터만 누르면 가장 좋은 결과물을 알아서 만들어주는 것이 요즘 카메라다. 인물이나 야광 촬영 시 달라져야 할 노출이나 조리개값은 카메라가 알아서 정해준다. 필름 대신 CCD나 CMOS와 같은 이미지 센서를 쓰기 때문에 즉시 사진을 확인할 수 있고,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올 때까지 여러 번 찍어도 된다. 카메라에 장착된 진동센서가 카메라가 흔들리는 방향을 감지하고 그 반대방향으로 렌즈를 움직여서 손떨림을 보완해주기도 한다.

요즘 나오는 카메라에는 이미지 보정 기능도 있다. 필름을 인화할 때나 컴퓨터로 하던 후보정 작업을 카메라에서 바로 해버리는 것이다. 고성능의 이미지 프로세서 덕분이다. 디지털 카메라에서 눈이 이미지 센서라면, 머리가 이미지 프로세서다. 이미지 센서가 렌즈를 통해 들어온 빛을 전기 신호로 기록하면, 이미지 프로세서는 그 신호를 분석하여 실물에 가까운 색을 입힌다. 고성능의 이미지 센서는 이미지 파일의 색상 정보를 해석하여 무엇이 인물이고, 무엇이 배경인지도 판단한다. 하늘은 더 파랗게, 얼굴빛은 생기 있게, 배경과 인물의 명암과 색조 차이를 높이면 흔히 말하는 '쨍한 느낌'의 사진이 나온다. 과거 사진작가와 사진현상 전문가들만이 가졌던 노하우가 오늘날에는 카메라에 담기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1만 시간의 연습이 없어도 우리 주변의 결정적 순간을 포착할 수 있게 됐다. 사진은 친근한 취미가 되었다. 블로그나 포털에는 일반인의 솜씨지만 전문가의 그것 못지않은 훌륭한 사진이 수두룩하다. 카메라 기술이 아웃라이어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에게 결정적 순간을 포착할 기회를 쥐여준 것이다.

요즘 기술의 화두는 바로 이것이다. 생활의 편리함이나 일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을 넘어, 사람의 창조성과 예술성을 북돋워주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아이패드의 앱스토어에는 유난히 악기나 그림과 관련된 앱들이 인기가 많다. 아이패드 사용자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고 싶어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에 화답하듯 애플은 '개러지 밴드(Garage Band)'라는 음악제작 프로그램을 아이패드 2 발표장에서 선보였다.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도 자기만의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이다. 악기 메뉴에서 건반·드럼·기타 등을 선택하고 연주한 후에 각각의 소리를 합하면 된다. 기타나 드럼 연주법을 몰라도 된다. 기타코드·주법·드럼의 각종 비트가 프로그램에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화면에 나타난 도구들을 이리저리 만지다 보면 본인도 놀랄 만큼 근사한 소리가 나온다.

스마트폰으로 영화도 찍는 세상이다. 값비싼 촬영 장비는 없어도 된다. 휴대전화의 비디오 카메라 해상도나 이미지 처리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고 동영상을 편집하는 소프트웨어도 다루기 쉬워진다.

'의식(衣食)이 족(足)하면 예(禮)를 차린다'는 옛말처럼 사람의 니즈는 점점 고차원적으로 진화한다. 이제 소비자들은 편리함과 재미를 넘어 자신의 재능을 표출하길 원한다. 다만 이들이 생활인이기에 재능을 키우는 데 필요한 1만 시간의 여유가 없다는 점이 문제이리라.

하지만 1만 시간의 법칙은 이제 수정되어야 한다. 관심과 재능이 있다면 1만 시간의 연습을 기술이 대신해 줄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연습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대신해줄 수 있느냐가 향후 IT 제품의 승패를 가를 것이고, 우리는 곧 평범한 사람들 속에 숨겨졌던 예술적 재능이 만발하는 시대를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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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바쳐 학문을 좋아하고 목숨을 걸고 실천을 중시한다. 망하려는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는다. 천하가 잘 다스려질 때는 나아가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무시당한다. 정의가 행해지지 않는 나라에 살면서 가난하고 지위가 없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불의가 통하는 나라에서 부자라든지 지위가 높다든지 하는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 ([논어], ‘태백’(泰伯)편 중에서)

 

 

짧은 정치적 영광과 긴 방랑, 그리고 애제자의 죽음

공자는 기원전 551년 오늘날 중국의 산둥성 취푸(曲阜) 동남쪽에서 하급 귀족 무사인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顔)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구(丘)이고 자(字)는 중니(仲尼)이다. 공자를 일컫는 영어 콘휴셔스(Confucius)는 존칭인 공부자(孔夫子)의 라틴어식 표기이다. 공자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정상적인 혼인 관계로 맺어진 사이가 아니었다. 공자는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7살 때 어머니를 여의였으며, 19살 때 송나라 출신 여인과 혼인했다. 20살 때부터 계(季)씨 가문 창고지기로 일했고 가축 사육일도 맡았지만 주나라 관제와 예법을 꾸준히 공부하면서 (禮) 전문가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35살 때 노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 소공이 제나라로 망명하자 공자도 제나라로 떠났다가 2년 뒤 귀국했다.

 

공자가 48살 때 계손씨의 가신 양호가 정권을 잡자 공자는 정치에서 물러나 본격적으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3년 뒤 양호가 망명하면서 공자는 중도(中都)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고 다시 사공(司空) 벼슬과 대사구(大司寇) 벼슬을 지냈다.


 

기원전 500년 노나라 정공과 제나라 경공이 회담할 때 공자가 의례를 맡아 노나라가 빼앗긴 땅을 돌려받음으로서 공자의 명성이 드높아졌다. 이 시기가 공자의 정치 생활에서 최전성기였다. 그러나 공자는 계씨를 비롯한 삼환 씨 세력을 타도하려다가 실패하고 한 무리의 제자들과 함께 고국을 떠났다.(기원전 497년) 이후 공자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14년만인 기원전 484년 노나라로 돌아왔다. 이 때 공자의 나이 68살이었다.

 

이후 공자는 노나라의 (樂)을 정비하고 제자를 가르치며 문헌을 정리하는 데 전념했다. 그러나 가장 아끼는 제자 안연이 세상을 떠나자 깊은 실의에 빠졌다. 온몸으로 흐느껴 우는 공자를 제자들이 말리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을 위해서는 울고 싶은 만큼 울게 내버려두어라.’ 애제자를 떠나보낸 슬픔 가운데에서도 공자는 기원전 481년 [춘추(春秋)]를 완성했다. 72살 때는 역시 아끼던 제자 자로위나라에서 일어난 정변에 휘말려 피살되었다. 이번에도 공자는 제자를 위해 곡했다. 그리고 기원전 479년 73살 때 공자는 세상을 떠나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泗水) 언덕에 묻혔다.

 

 

극기복례(克己復禮)와 정명(正名)에 나타난 보수주의자로서의 공자


공자라고 하면 (仁)부터 떠올리지만 공자에서 인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禮)이다. [논어] 첫 부분에 나오는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에서 말하는 배움은 무엇을 배운다는 것인가? 그것은 예다. 공자가 말하는 예는 주나라의 전통적인 제도, 문화, 문물, 사상, 예법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 이러한 예는 문(文)이기도 하다. 악명 높은 양호로 오인되어 광(匡) 지방 주민들에게 붙잡혔을 때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이 문(文)을 말살시킬 작정이라면 살아날 수 없겠지만, 하늘이 문을 없애려는 게 아니라면 그들이 나를 어찌할 수 있겠느냐?’ 주나라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려는 공자의 자의식을 엿보기 충분한 발언이다. 공자가 말한 ‘이 문’(斯文)에서 ‘문’은 주나라 문화의 총체이자 곧 예이다.

 

공자가 말한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시대상을 배경으로 되새겨보면, 당시 사회는 하극상(下剋上)의 상황, 즉 대부가 제후를, 제후가 제왕을 이기려하고 그 지위를 넘보는 상황, 사실상 주나라 봉건 질서가 무너져가는 현실이었다. ‘자기를 극복해 예로 돌아간다’고 할 때 극복해야 할 것은 하극상의 주체 또는 그러한 욕망이다. 돌아가야 할 예는 주나라의 전통적인 질서와 문화다. 극기복례는 결국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전통적인 주나라 정치·사회·문화 질서가 흔들리면서 많은 이들이 본래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합당하지 않은 욕망을 추구하고 있다. 주나라 정치·사회·문화 질서를 회복시켜야 한다.’ 극기복례에 관한 한 공자는 다분히 보수적인 모습을 지닌다. 공자의 정명(正名), 즉 이름의 뜻과 실제가 같도록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그렇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는 것은 이미 정해진 각자의 신분과 지위를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된다.

 

 

유교무류(有敎無類)에 나타난 혁신가로서의 공자


공자는 출신 성분, 사회적 지위를 상관하지 않고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이는 유교무류(有敎無類), 즉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 ‘배우고자 하는 이에게는 누구에게나 배움의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오늘날에는 당연해 보이는 이 생각은 그러나 공자 당시에는 매우 혁신적이었다. 공자의 교육 목표는 군자(君子), 즉 정치를 맡아 다스리는 사람을 육성하는 것이었는데, 정치를 맡아 다스리는 일은 전통적인 신분 질서에 따라 귀족들이 세습했다. 그러나 공자는 타고난 신분이 아니라 갈고 닦은 능력과 덕성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며, 여기에서 혁신가로서의 공자의 면모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을 전적으로 공자가 창안해 낸 생각이라 하기는 힘들다. 이미 공자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전통적인 주나라 신분 질서와 사회 계급 구조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출신 성분과 상관없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출세를 도모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유교무류로 대표되는 공자의 교육 철학과 인간관은 충분히 혁신적인 것이었다. 극기복례에서 볼 수 있는 보수성과 유교무류에서 볼 수 있는 혁신성. 변화와 혼란의 시대를 산 공자의 얼굴은 한 가지가 결코 아니다.

 

 

유교적 합리주의, 인문주의의 길을 놓은 공자

공자는 제자 자로가 조상의 영혼과 귀신을 섬기는 법을 묻자 ‘아직 능히 사람도 섬기지 못하는 데 어찌 귀신을 섬기겠느냐’라 답했고, 죽음에 대해 묻자 ‘아직 삶을 알지 못하는 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라 답했다. 공자는 사후의 삶 같이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접어두고 현재의 삶의 경험에 충실하면서 그 의의를 밝히고자 했다. 또한 제사를 올려야 마땅한 조상 이외의 다른 신에 제사 지내는 것을 꾸짖었으며, ‘귀신을 공경은 하되 가까이 하지는 말라’ 말했고 괴력난신(怪力亂神), 즉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존재나 현상에 대해서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공자는 가장 아끼던 제자 안연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실의에 빠져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탄식했지만, 인격성을 갖춘 초월적 존재로서의 하늘을 긍정했다기보다는 애제자를 잃은 비탄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에 그쳤다고 볼 수 있다. 공자의 관심은 주나라의 문물, 사상, 제도, 전통을 통틀어 일컫는 의미의 ‘문’(文)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 있었으며, 인간의 역사와 문화와 삶 바깥의 신적(神的), 초자연적, 초월적, 신비적 영역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다. 유교를 현세적 합리주의, 유교적 합리주의, 유교적 인문주의 등으로 형용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공자의 이런 태도에 있다. 공자 사상의 막대한 영향력 속에 동아시아 유교 문명권은 적어도 그 주류 사상에서는 현세주의와 인문주의의 길을 걸었다.


공자의 모습을 담은 판화. <출처: wikipedia>

 

 

이상을 추구했던 공자. ‘아니 될 줄 알면서도 애써 행하려는 자’


공자는 실패했는가? 적어도 그의 생애만 살펴본다면 성공을 거두었다 말하기는 힘들다. 그는 자신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정치를 실천에 옮길 기회를 갖지 못했다. 주나라 문화를 부흥시키려는 뜻도 여의치 못했다. 자신의 가르침을 가장 잘 계승할 제자로 기대했던 안연도 요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공자는 한나라 이후 비록 여러 차례 부침(浮沈)은 겪었지만 2천 년 가까운 세월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사상계의 패자(覇者)로 자리 잡았다. 왜 그토록 공자의 생명력이 길었을까? 공자와 유교가 지닌 보수성 또는 체제 안정을 추구하는 성격이 통치자의 지배 이념으로 적합했으며, 이에 따라 동아시아 역대 왕조들이 공자와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채택했기 때문이라는 일리 있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일까? 공자의 생명력의 비밀은 어쩌면 그의 지독한 이상주의(理想主義)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공자는 자기 당대에 ‘그 아니 될 줄 알면서도 애써 행하려는 이’(知其不可而爲之者)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하극상의 혼란이 팽배한 현실에서 주나라 문화와 질서를 이상으로 삼아 추구했던 그로서는 당연히 들을 만한 얘기였을 법하다. 바로 그 지점에 공자의 생명력이 있다. 전통 동아시아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공자는 ‘그 실현하기 힘들 줄 알면서도 애써 실현키 위해 노력할 만한 이상적 정치와 문화와 사회관계’를 제시하고 추구했던 이상주의자였던 것이다. 현실에서 쉽게 이룰 수 있는 이상에 매료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루기 쉽다면 그것이 과연 이상일까? 이상은 이루기 힘들 때 이상으로서의 매력과 힘을 발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