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단은 타타르를 뜻했지만 조선 순조 때의 연행(燕行)기록인 『계산기정(薊山紀程)』 ‘호번(胡藩)’조에서 “명나라 때 몽골을 달단(韃靼)이라 일컬었다”고 전하는 대로 이 무렵에는 몽골족을 뜻했다. 홍원현 남쪽에 몽골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는 뜻이다. 『동각잡기(東閣雜記)』 ‘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은 고려 원종 15년(1274)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가 경흥부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뒤에 함흥부(咸興府)의 의흥부(義興部) 달단동(韃靼洞)에 이장했다고 전한다. 함흥에도 몽골족이 모여 사는 달단동이 있었다. 『계산기정』은 또 “(달단) 풍속은 온돌을 잘 만든다(俗善治突)”고 우리와 주거풍습이 같다고 전한다.
조선 개국공신 이지란(李之蘭)은 본명이 쿠룬투란티무르(古論豆蘭帖木兒)인 만주(여진)족이었다. 공민왕 20년(1371) 그 부친 아라부카(阿羅不花)가 귀화하면서 이씨 성과 청해(靑海)를 본관으로 하사받아 북청에서 거주했다. 『국조보감(國朝寶鑑)』 ‘태조’조는 “(이성계는) 즉위 후 이두란(李豆蘭:이지란)에게 여진족을 모아 안정시키게 했다”면서 “조선사람(國人)과 서로 혼인하고, 병역과 세금도 똑같이 내고 호에 편입시켰다(服役納賦同於編戶)”고 전하고 있다. 조선 초에는 몽골족과 여진족이 조선 사람과 섞여 살면서 서로 혼인하고 병역의무와 세금도 똑같이 냈다는 뜻이다.
고대 중국의 한족(漢族)들은 우리 민족을 동이(東夷) 또는 동호(東胡)로 분류했다. 여기에는 우리뿐만 아니라 말갈(여진)·몽골·숙신·선비족 등이 모두 속해 있었다. 조선 후기 극단적인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만주·몽골·숙신 등의 여러 동이족을 오랑캐로 내몰면서 우리를 한족(漢族)과 같다고 주장한 것이 소중화(小中華) 사상이다. 여기에서 허구적인 단일민족론이 나왔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 다민족 사회였고, 동이족 사이에는 언어도 서로 소통되었다. 사대주의에서 나온 소중화 단일민족론을 극복하고 선조들의 다민족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21세기의 과제다. 그래야 여러 이국인들과 평화롭게 뒤섞여 살 수 있고, 노르웨이 브레이빅 같은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들도 준동하지 못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