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회문화/사회 , 경제

노무현이 그리울 때

화이트보스 2011. 8. 17. 10:59

노무현이 그리울 때

입력 : 2011.08.16 22:38

홍준호 논설위원

'제주기지는 안보 위한 필수' 노 前대통령 語錄 생생한데 노무현 정신 계승한다는 민주당, 민노당과 어울려 기지반대 운동… 내로라하던 야당 정치인들 골수좌파 뒤꽁무니만 좇아

노무현 정부를 계승한다는 이들이 노무현 정책을 깔아뭉개서 노무현 어록(語錄)을 뒤적이게 되는 일이 한·미 FTA 말고 하나 더 생겼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말이다. 이 해군기지 계획은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 5월 공포됐다. 그 후 해군기지 반대파들이 제주지사 주민소환 투표, 기지 계획 취소 행정소송에서 모조리 져 작년 11월 공사가 시작됐으나 몇달 전부터 전국의 시위꾼들이 몰려가 드러눕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03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우리 안보를 언제까지나 주한미군에 의존하려는 생각은 옳지 않다"면서 "이제 스스로의 책임으로 나라를 지킬 때가 됐다"고 말했다. 그 말은 곧바로 자주국방(自主國防) 정책으로 이어졌다. 그때 그가 자주국방만 말하고 한미연합사 해체와 전시작전권 단독행사를 서두르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김정일 추종자들을 뺀 모든 국민으로부터 박수를 받았을 것이다. 당시 참모들은 "박정희도 자주국방을 했다"는 말을 되뇌곤 했다. 그러나 미군이 한미동맹을 배반하고 떠날 경우를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자주국방과 이젠 나가달라고 우리가 먼저 미국 등을 떼미는 듯한 자주국방은 말만 같을 뿐 근본 발상과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 근본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 힘으로 내 나라를 지키자"는 말만큼은 누구도 시비 걸 수 없는 강렬한 메시지로 다가왔다. 우리 사회가 너무 오랜 세월 이 땅의 안보를 미군에 맡겨둔 채 일부 젊은이들은 군대 안 가려고 밥 굶고 멀쩡한 이 뽑고 손가락 자르고 다리 분지르고 일부 유한마담들은 아들 군대 안 보내겠다고 병역법과 두툼한 의료 서적에 대학입시 공부하듯 매달리는 걸 무용담이라도 되는 양 여겨온 탓이다.

그때 덕을 본 건 군(軍)이었다. 당장 예산이 늘었다. 오랜 세월 주한미군에 의존해온 탓에 전력(戰力)이 형편없어졌다는 평을 권력으로부터 받은 해군과 공군이 특히 날개를 달았다. '대양해군' '우주공군'이란 말도 생겨났다. 바로 이런 배경 아래 추진된 게 제주 해군기지다.

재임 중 "제주 해군기지는 국가안보를 위한 필수요소"라고 말한 노 전 대통령은 제주도가 비무장 평화의 섬이 돼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에 대해 "무장과 평화가 같이 있는 게 잘못은 아니다"고 했다. 평화를 위해서도 무장이 필요하다는 논지를 폈다. 그의 '정치적 경호실장'으로 불린 유시민 전 의원은 당시 "제주는 전략적 요충지이고 추진 중인 해군기지 규모는 너무 작다"고까지 말했다.

그랬던 유 전 의원이 대표로 있는 참여당과 노무현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민주당은 어찌 된 영문인지 요즘 제주에서 민노당과 어깨동무하고 해군기지 공사 중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노 정부 시절 여당 대표에 대선후보까지 지낸 이는 "우리가 정권을 잡고 있을 때 저지른 일이기 때문에 참담한 심정으로 여러분께 사과드린다. 속죄하는 의미에서…"라며 고개를 숙였다. 노 정부가 저지른 죄과(罪過)를 대신 짊어지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 참회의 장면에서 정말 참담해질 사람은 그가 아니라 지하의 노 전 대통령일 것이다.

제주 해군기지의 필요성은 과거보다 커졌으면 더 커졌지 결코 줄지 않았다.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우기는 일본 정치인들이 울릉도를 방문하겠다며 소동을 피우고 제주도 남쪽 이어도를 집적거리는 중국은 첫 항공모함을 시험운항했다. 독도의 동해와 이어도의 남해는 우리 해군이 지키고 있다. 제주 밑 남방 해상수송로를 지키는 일도, 우리 민간 상선을 노리는 또 다른 소말리아 해적을 제압할 제2, 제3의 아덴만 작전도 우리 해군의 몫이다. 이런 마당에 제주에 해군기지를 만들어 놓으면 미군이 넘본다는 둥, 중국을 자극한다는 둥 엉터리 말들을 철부지도 아닌 정치인들이 지어내 퍼뜨리고 있다.

한·미 FTA는 강정마을 신세가 된 지 이미 오래다. 노 전 대통령은 한·미 FTA에 저항이 따를 때면 개혁·개방을 거부하다 일본에 먹힌 구한말을 상기하며 "개방한다고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개방하지 않으면 선진국으로 갈 수 없다"는 말로 내각을 독려하곤 했다. 그런데 그 정부 시절 여당 원내대표와 장관을 지낸 이가 한·미 FTA는 두 나라 모두에게 손해이니 미 의회에서 통과시키지 말아 달라는 취지의 글을 미 의회 전문지에 올리고 돌아다니는 게 요즘의 야당이다.

노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반미(反美)면 어때"라면서 한미동맹파(派)에 마구 화살을 쏘아대는 동시에 자주국방과 한·미 FTA도 밀고 나갔다. 이런 그를 두고 골수좌파들은 "엉터리 진보"라고 비웃었으나 노 전 대통령은 '현실을 모른 채 공론(空論)만 일삼는 운동권 원리주의자들'에 격한 감정을 쏟아내면서 때때로 이들과 맞서 싸우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요즘 야당가엔 한때 내로라하던 정치인들이 골수좌파들의 뒤꽁무니를 좇는 풍경만 보일 뿐 이들의 무지와 허위의식에 맞서는 모습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