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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관한 작은 생각들

화이트보스 2011. 11. 11. 15:19

한국전쟁에 관한 작은 생각들 

 

 

 

최근 경인일보의 요청으로 '세계의 전장 인천, 평화를 말하다'라는 기사와 관련한 서면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매체와 몇 차례 인터뷰하면서 얻은 경험인데, 막상 활자화 된 기사를 보면 august가 말하려던 의도와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면의 제약 등으로 전후좌우를 생략하여 싣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 생각하는데 종종 내용이 왜곡되어 전달될 가능성도 크다고 느낍니다.  관련하여 당시 질문과 답변 내용을 그대로 포스팅하여 자료로 남기고자 합니다.

 

 

1.한국전쟁의 기원 내지는 배경

 

―북한의 남침이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발발 원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학계에서는 내적·외적기원론 등 한국전쟁 발발 배경에 대해 여러가지 학설을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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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를 부추긴다는 이른바 깨진 창문 이론도 있지만 절도의 직접적인 원인을 도둑에게서 찾아야지 피해자가 베란다 문을 열어놓아 범죄를 유발했다는 식의 분석들이 과연 전쟁의 원인을 올바르게 밝혀낼 수 있을까? 유사 이래 모든 전쟁은 전쟁을 일으키기로 마음먹은 자의 확고한 의지에 따라 일어났고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 또한 마찬가지였다. 명백한 사실을 두고 굳이 다른 이유를 찾으려 하는 것은 일종의 치기라 생각한다.

 

―특히 북한의 배후에 있던 소련은 미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직접적으로 참전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련은 유엔 안보리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 소련이 안보리 회의에 불참해 한국전쟁에 미국을 의도적으로 끌어들였다는 얘기도 있다. 이에 대한 견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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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다. 소련도 제2차 대전의 승전국이었지만 본토에 폭탄 한방 제대로 맞지 않은 미국과 달리 무려 2,000만 명이 희생되었고 전쟁 전 소련 국부의 70퍼센트를 담당하던 유럽러시아, 우크라이나, 카프카스 일대가 초토화되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이런 피해를 완전히 회복한 상태가 아니어서 미국과 직접 교전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최근 연구결과 스탈린이 소련의 안보리 불참을 직접 지시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로 유럽에서 미국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충분히 가능한 주장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스탈린 독단으로 일을 처리하였을 것 같지는 않다. 스탈린은 대숙청이 펼쳐진 1937년에 권력의 최정점에 있었고 전쟁 중이던 1942년을 기점으로 점차 힘이 약화되어갔다. 따라서 정권말기인 1950년에 이르러서 스탈린이 중요한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기는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2.맥아더에 대한 평가

 

―그동안 맥아더는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우상화돼 왔다. 개인적으로 맥아더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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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초반기에 많은 역할을 하였고 그 때문에 영웅시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상화되었다는 질문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의 전기를 강제로 읽게 하고 어록을 암기시키기라도 했단 말인가? 대다수의 군사전문가들도 동의하는 것처럼 지휘관으로써 맥아더는 1950년 9월 15일까지만 지휘를 잘했던 인물로 보고 싶다. 사실 이후부터는 군사적으로 실책의 연속이었다.

 

―오늘날 맥아더 동상은 보혁갈등의 상징이 됐다.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문화재청이 이 동상을 문화재로 지정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이에 대한 의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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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동상은 시민들의 성금 등을 모아 2개가 만들어졌다. 하나는 자유공원에, 하나는 현 세종로 KT사옥에 있던 반공회관 앞에 세워졌는데 4.19의거 때 자유당의 전위대 거점역할을 하던 반공회관이 시위대의 습격으로 불탔다. 그런데 이러한 와중에도 동상이 훼손 될까봐 앞장서서 보호하였던 이들이 바로 시위대였다. (1960년 4월 30일 경향신문 1면 참조)

 

이처럼 당시에 동상은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우리에게 도움을 준 국제사회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고 그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따라서 당시 관점에서 생각하고 지나간 역사의 흔적으로 인식하여야지 단지 시절이 바뀌었다고 갈등의 장으로 만들려 하는 것 자체가 문제 아닌가? 그런 자의적 기준으로 그때마다 유리한대로 해석한다면 역사적 흔적 중 남아있어야 될 것이 몇 개나 있는가? 하지만 문화재로 지정하기에는 역사가 너무 일천하므로 반대한다.

 

―일각에서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임진강 등 국경선까지 올라가지 않았다면 중공군 개입으로 인한 확전을 막았고, 피해도 줄었을 것이란 주장이 있다. 또 유엔군이 평양에서 멈췄다면 남한이 더 넓은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란 추측도 있다. 맥아더는 북진을 주장하면서 미 행정부와 마찰을 빚다가 해임되기도 했는데, 이런 내용에 대한 견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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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론이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끝내고 건국 된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중국이 그 정도로 대규모로 개입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당시 시점으로 볼 때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서울을 수복한 후 38선에서 반격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너무 당연하였다고 생각된다. 이후 유엔도 북진을 승인한 것처럼 그것은 자연스런 흐름이었다.


다만 군사적으로 너무 성급하고 잘못된 북진방법을 선택한 것이 결정적인 잘못이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확전이 된 것은 맞지만 흔히 인해전술 운운하는 것과 달리 참전 직후부터 1951년 3차공세 이전까지만 해도 아군과 공산군의 병력 규모는 거의 대등하였고 오히려 제공권, 제해권, 화력은 아군의 우세였다. 그런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밀렸다는 것은 중공군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북진방법을 선택한 아군의 잘못이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사실 맥아더의 해임에는 이러한 문책도 함께 담겨있었는데 그동안 이런 사실은 많이 간과되어왔다.

 

 

3.정전협정의 문제점


―정전협정은 한국전쟁이 낳은 산물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협정을 끝까지 반대했고, 유엔과 중국, 북한이 체결한 정전협정은 현재 유명무실한 상태다. 따라서 군사 분계선 등에서 남북 간 무력 충돌이 계속 이어져 왔다. 정전협정은 무엇이 문제였나.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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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가 반대한 이유는 북진통일을 이루겠다는 표면적인 이유와 달리 휴전이후의 안전보장에 대한 장치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 결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었다. 정전협정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이를 지키려 하지 않는 세력이 있는 한 문서상으로 아무리 협정을 맺고 개정을 하고 대체 해결책을 아무리 내어 놓아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특히 NLL(북방한계선)을 놓고 유효하다, 아니다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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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L은 국제법상의 국경선이 아니라는 점을 유의하여야 한다. 따라서 NLL은 국경에 적용하는 일반적인 관행이 적용될 수 없다. 군사분계선은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곳을 기준으로 하므로 휴전 당시에 아군이 장악하고 있던 도서를 연결하여 바다위에 분계선을 긋는 것은 너무 당연하였다. 휴전직후 유엔군사령부는 별도의 논의가 없었던 해상분계선과 관련하여 NLL을 선포하고 즉시 북한에 통보하였는데, 북한이 이곳 아래로 내려오지 말라는 경고의 뜻보다 우리가 이곳을 넘어 북쪽으로 가지 않겠다는 내용이었고 오히려 초도, 석도, 양도 같은 경우는 우리가 스스로 포기했다.

 

이처럼 전쟁 내내 유엔군 해군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북한이 얻는 이익이 오히려 컸다. 바로 그런 점에서 NLL을 다행스럽게 생각한 북한은 휴전 직후에 어떠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충실히 지켜왔으며, 지난 2009년 북한이 일방으로 파기하겠다고 선언하였지만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도 이를 확인하였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이를 문제 삼는 것은 NLL일대를 분쟁지역으로 공식화하려는 노림수 때문이라 할 수 있다. [ august 의 軍史世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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