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글

'대한민국史' 혼란의 죄인들

화이트보스 2011. 11. 15. 19:34

'대한민국史' 혼란의 죄인들

  • 김태익 논설위원

  • 입력 : 2011.11.14 23:29

    김태익 논설위원

    박원순 서울시장이 당선 확정된 후 맨 먼저 한 일은 새벽 노량진 수산시장을 거쳐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은 것이었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와 무명용사 묘를 참배하고 방명록에 '함께 가는 길'이라고 썼다. 현충원에는 서울을 수도로 하는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묘소와 세계를 놀라게 한 '서울의 기적'을 이끈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도 있다. 그러나 박 시장은 지척에 있는 이들 묘소에는 가지 않았다.

    얼마 전 중국 신화통신은 중국 사회과학원이 36권에 달하는 '중화민국사'를 40년 작업 끝에 마무리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오랜 편찬 과정이 우선 인상적이다. 다음에 눈에 띄는 것은 중국 공산당 입장에선 '철천지원수'라고 할 장제스(蔣介石)를 껴안았다는 점이다. 장제스는 다섯 차례나 공산당 토벌 작전을 벌이며 공산당 씨를 말리려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중화민국사'는 그에 대해 "북양군벌(軍閥)을 타도한 북벌(北伐)과 항일 전쟁에서 선도적·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썼다. 중국 사회과학원은 "실사구시 원칙에 따라 사실에 입각해 장제스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다각도로 평가했다"고 밝혔다.

    박원순 시장이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도 갔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념과 정치적 입장에 따라 한국현대사에 얼마나 깊은 골이 파여 있는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주문이 무리란 것도 알 것이다. 사실보다는 믿음이 우선이고, 내가 떠받드는 인물이 아니면 모두 반(反)역사적인 것으로 깎아내리는 풍토에서는 다양한 인물과 가치가 공존하는 윈·윈(win·win)의 역사 서술을 기대하기 어렵다. 일본이 부국(富國)과 근대화의 계기가 된 메이지유신 역사를 쓰며 막부(幕府)를 타도한 인물이든 막부를 지키려 했던 인물이든 장점(長點)과 업적을 함께 기리는 것과도 비교된다.

    한국현대사가 겪고 있는 균열과 혼란의 밑바닥에는 역사교과서와 그걸 편찬하는 교육부의 책임 문제가 있다. 특정 세력이 정치적 목적을 갖고 현대사를 통해 국민을 편가르기 하려 하면 엄정한 역사해석으로 중심을 잡는 것이 교과서의 역할이다. 그러나 우리 교육부는 이렇게 믿음을 줄 만한 현대사 교과서를 만들지 못했다. 1980년대 중반 소장 학자들 중심으로 현대사를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뒤엎으려는 정치 운동의 도구로 삼으려는 경향이 나타나자 당시 문교부 국사편찬위원회는 이를 바로잡겠다며 건국 후 최초의 '대한민국사'를 편찬했다. 그 책 편찬에 걸린 기간이 불과 1년 3개월이었다. 같은 5·16에 대해 어떤 필자는 혁명, 어떤 필자는 쿠데타라고 했다. 지금 국편이 낸 '대한민국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주변에 없다.

    지난주 교육부가 논란 끝에 중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확정 발표하자 일부 학자와 운동권 단체들은 이 집필기준이 정권 입맛대로 만들어졌다고 비판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번 개정은 역사교과서를 대한민국이 걸어온 길에 가깝게 되돌리려는 원상회복 시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국민적 동의에 바탕을 두고 하는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개정이 '정치적'이라는 평가를 듣는다면 이는 그렇게 비치도록 절차를 진행한 교육부의 잘못이다.

    시민운동 세력의 정치권 진입이 가져올 결과에 따라 역사교과서 문제는 또 한차례 엄청난 폭풍을 몰고 올 수 있다. 교육부가 지금처럼 역사교과서에 대한 소신도 성의도 책임감도 없는 상태라면 현대사 교육은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