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2.09 23:18 | 수정 : 2012.02.10 06:26
- 김홍수 경제부 차장
말 많고 탈 많았던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가 한국을 떠났다. 2003년에 외환은행을 인수한 론스타는 외환은행 투자로 4조6000억원대의 수익을 얻었다. 수익률은 216%에 이른다. 수익률만 보면 2007년 투자원금의 6배 수익을 올린 일본계 은행 인수 때보다는 못하지만, 수익규모는 외환은행 쪽이 훨씬 더 크다. '투기꾼'이란 오명을 썼지만, 펀드투자자로선 쾌재를 부를 만한 '대박'이다.
그렇다면 우리 쪽 손익계산서는 어떨까? 곰곰이 따져봐도 비싼 수업료에 비해 얻은 건 별로 없는 것 같다. 야당과 노동계는 MB정부가 론스타의 '먹튀'를 도왔다면서, 총선·대선 이슈로 부각시키겠다고 벼르고 있다. 론스타는 9년 내내 우리 사회를 갈가리 찢어놓고, 관료들이 뒷일을 걱정하며 정책 결정을 꺼리는 현상인 '변양호 신드롬'을 낳은 것도 모자라서, 한국을 떠나면서도 골칫거리를 안긴 꼴이다.
하지만 론스타가 남긴 더 큰 폐해는 '염치 부재(不在)' 신드롬을 확산시킨 점이다. 관료들은 은행 주인이 될 자격이 없는 론스타에 대형 은행을 팔아서 두고두고 화근이 될 실수를 저질러 놓고도 잘못을 시인하거나 사과한 적이 없다. 외환은행 매각 승인 당시 경제부총리로 결재라인에 있었던 김진표 민주통합당 원내대표는 마치 남의 일이라는 듯 '론스타 성토'에 앞장서고 있다. 관료들의 이런 행태는 미국 언론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달 31일 사설에서 "2003년엔 두 팔 벌려 환영해 놓고는 여론에 떠밀려 인수자격을 문제 삼으며 발목을 잡았다"고 비꼬았다.
하지만 미국 언론의 이런 시각도 균형감각을 상실한 것이다. 염치가 없기는 론스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론스타는 외환카드 합병 비용을 줄이려고 주가를 조작하는 범죄행위를 저질렀다. 한국법인 대표는 검찰의 소환에 불응한 채 수배범이 돼 도망 다니며 한국의 법질서를 무시했다. 또 수백명의 외환카드 직원을 해고하면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통지해 대한민국 월급쟁이들의 공분을 샀다. 이런 행태 탓에 론스타는 우리 국민들 사이에 반(反)외자 정서가 확산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외국계 사모펀드가 은행을 인수했을 땐 선진 경영기법을 도입해 국내 은행의 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란 기대도 있었지만, 론스타는 시종일관 단물만 빨아먹는 투기자본 행태를 보였다. 외환은행의 강점 중 하나인 해외 지점망을 30개에서 27개로 축소하고, 장기 경영전략을 구상하는 기획부서도 없애버렸다. 같은 기간 다른 국내 은행들은 해외지점 수를 107개에서 134개로 25% 가량 늘렸다. 이익이 쌓이면 투자재원으로 삼지 않고 배당을 통해 모두 빼갔다. 그 결과 외환은행은 론스타의 인수 후 국내 시장 점유율이 7.0%(예금 기준)에서 5.8%로 크게 떨어졌다. 한때 국내 카드시장을 선도하며 브랜드 파워가 막강했던 외환카드는 요즘 존재감을 찾기 힘들 정도로 위상이 쪼그라들었다. 론스타의 대박 배경에는 속으로 골병든 외환은행과 임직원 수천명의 좌절과 한숨이 깔려 있다.
이런 론스타 사례가 우리 사회에 "낯이 두꺼워야 돈을 벌고 출세한다"는 생각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