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 얼마나 아름다운가 /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송복(75) 연세대 명예교수. 왜 그간 뵙기가 어려웠느냐고 묻자 송 교수는 ‘낙화’(이형기의 시)를 읊었다. 그는 신문이나 방송에 ‘세론’을 쓰거나 ‘세설’을 설파한 지 7년은 됐을 거라고 했다. 물러날 때 물러나지 않으면 ‘노추(老醜)’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몇 차례 간곡한 설득을 거쳐 어렵게 인터뷰 약속을 받았다. 함박눈인가 싶더니 이내 진눈깨비로 변한 눈이 펑펑 쏟아진 지난 1월31일 오후, 서울 중구 충정로1가 문화일보 사옥에서 만난 송 교수로부터 받은 것은 그러나 ‘추함’이 아니라 ‘지혜’였다.
한국의 대표 보수 하면 떠오르는 인물 중 한 명이 송 교수다. 반대 진영으로부터 욕도 많이 먹었다. 그러나 보수라는 자신의 이념적 스탠스에도 불구, 어느 정권이든 잘잘못을 추상같이 꾸짖고 비판의 글발을 세워 온 그였다. 보수 대표 학자인 그가 생각하는 진보와 보수는 무엇일까.
“우선 진보와 좌파를 구분합시다. 지금 진보라 하면 좌파고 좌파라 하면 진보, 우파라 하면 보수고 보수라 하면 우파라 생각합니다. 이 4개의 언어는 구분돼야 합니다. 보수와 진보는 같은 흐름 위에 있습니다. 역사사회적 흐름과 맥락 위에서 진보가 얼마든지 보수가 되고, 보수가 언제든지 진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송 교수의 강의가 계속됐다. “산업혁명 시기에 나온 자유민주주의 이념은 진보였습니다. 개인의 가치, 인권과 이를 실현하려는 법치 중시, 이런 게 진보 이념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140~150년 지나는 동안 자유민주주의에서 부작용이 생기자 그 반발로 사회주의가 나왔어요. 그러면서 자유주의는 보수가 됐지. 국가 권력이 시장에 개입해 개인의 자유를 어느 정도 억압하고 시장도 통제하겠다 이게 사회주의인데 그게 진보가 됐어요. 사회주의보다 더 진보적으로 나아간 게 공산주의죠. 근데 지금은 어때요. 공산주의는 보수가 됐죠. 중국에서도 사회주의는 보수가 됐습니다.”
송 교수는 좌파와 진보는 구분돼야 한다고 말했다. “원래 진보는 높은 지식에 기반을 두고 있어 설득을 해도 상당히 합리적으로 설득합니다. 좌파는 감정에 기반해 선동하고 투쟁적인 용어를 쓰죠. 진보는 언어 자체가 상당히 정제돼 있지만 좌파는 파괴적인 언어를 씁니다. 지금 야당이 쓰는 건 좌파의 언어입니다. ‘점령한다’ ‘복수한다’ ‘타도한다’ 같은 날카로운 말을 쓰잖아요. 그건 북쪽 사람들이나 쓰는 말이지.”
보수와 진보의 특질은 어떻게 다른가. 이 둘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인가. 송 교수는 이에 대한 답도 내놨다. “보수는 ‘경험적인 사실’로부터 얻은 지혜를 중요시합니다. 보수가 전통을 중하게 여기는 건 이 때문이에요. 엄청난 풍화 작용에서도 마모돼 없어지지 않고 살아남은 보배로운 진짜 전통이 대단한 거죠. 대신 진보는 ‘선험적 지식’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송 교수는 대화 중간 중간에 시를 인용했다. 이 대목에서는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가 등장했다. ‘전통이 있기에… 썩어 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 오히려 황송하다 /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 이 썩어 빠진 대한민국도 화려하다….’
그는 “경험을 중요시하면서 사실에 입각한 게 바로 경륜이고 여기서 지혜가 나오며 이게 보수”라고 재차 설명했다. “스무 살 먹은 사람이 마흔 살 먹은 사람의 지식을 가질 수는 있으나 지혜는 가질 수 없어요. 지혜는 경험을 해 봐야 아는 거거든. 따라서 보수와 진보는 서로 등을 돌려 싸울 것이 아니라 상생하고 보완적인 관계를 맺어야 해요. 상반되는 게 아닙니다. 젊은 세대가 추구할 수밖에 없는 선험적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진보성, 중·장년의 경험과 경륜과 지혜를 바탕으로 한 보수성, 이 둘이 만나서 보완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송 교수는 보수적인 자신의 분명한 입장에도 불구, 현역 시절 보수를 지향하는 제자와 진보를 지향하는 제자 모두를 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유능한 제자를 사랑했고, 이념적으로 어느 한쪽만 편애하지 않았던 스승으로 평가된다. 옛날 생각이 떠오른다. 1980년대 말 한 잡지에서 ‘한국의 보수주의’ 특집을 하면서 기자에게 ‘보수 이데올로그 비판’ 원고를 부탁한 일이 있다. 원고를 출고한 직후 잡지 편집을 책임졌던 조희연 교수가 각별한 부탁을 해 왔다. 이데올로그 중에서 송복 교수 관련 대목을 빼 주면 안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송 교수가 대한민국의 대표 보수라는 건 분명하지만 당시 연세대에서 진보 쪽 제자들을 챙겨 준 유일한 선생이며, 진보 진영으로 분류되는 자신도 석·박사를 모두 송 교수에게 받았다는 설명이었다. 송 교수도 옛 기억을 더듬으며 껄껄 웃었다.
―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위기는 어떤 것입니까.
“우리 사회는 지금 새로운 위기 국면에 들어서 있습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입니다.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심각한 위기 국면입니다. 두 가지의 ‘지체(遲滯)’ 현상이 빚은 위기입니다. ‘문화 적응의 지체’로 인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같은 최고의 소통 도구를 갖고도 최고의 불통(不通) 현상을 빚는 위기가 하나, 정치인들이 ‘구조 변동의 지체’로 인해 최고 학력자들을 최대 실업자군으로 만든 위기가 또 하나입니다.”
― 문화 적응의 지체란 무엇입니까.
“문화의 소통 도구는 굉장히 발달했는데 그 도구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도구 안에 들어갈 콘텐츠가 전혀 개발이 안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소통이란 말을 잘 쓰죠. 다들 소통이 잘 안 된다고 합니다. 대통령도 소통 안 하고, 정치권도 국회에서 싸움박질만 하지 국민들과는 소통을 안 한다는 겁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 간 소통이 안 되고, 기업체에서도 위아래가 소통이 잘 안 됩니다. 그 말은 불통이 되고 있다는 뜻이거든. 왜 불통이냐. SNS, 트위터, 인터넷이라는건 무엇이든 빛의 속도로 실어 나를 수 있는 도구인데 그것을 이용하는 우리의 마음이 열려 있지 않고 내용을 개발하지 못하는 거죠. 그 사이에 ‘갭’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지체인 겁니다. 갭을 못 채우니까 사람들이 편 가르기를 해요. 내 편 네 편 꼭 가르고 싸우는 거죠. 마음 맞는 사람하고만 소통하고 안 맞으면 비방하고. 믿을 것만 믿고 믿고 싶지 않으면 거짓이라고 생각해 버리고. 옛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공고한 편향 현상에 들어갈 수밖예요. 편견과 편향이 심해지면 정신적 황폐 상태에 들어가요. 결과적으로 쓰는 말이 전부 다 ‘비어(蜚語)’가 돼요. 요즘 ‘꼼수’니 ‘닥치고 정치’니 그런 게 다 비어 아닙니까. 언어폭력을 하다 보니 폭력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고, 엄청난 폭력주의가 지배하는 이런 사회가 됐어요.”
송 교수는 야권에서 하는 말들도 폭력화돼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복수니 타도니 점령이니 이런 건 좋은 말이 아닙니다. 정권이라는 건 교체되는 것이지 타도나 점령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정권에 복수하겠다고 하지 말고 차별화한 정책을 내세워야 하는 것이죠. 국민이 정치인들 복수하라고 정권을 내줬습니까.”
그는 문화 적응의 지체만큼 심각하고 중요한 게 구조 변동의 지체라고 말했다. 이는 정치인들이 해야 할 몫인데도 이에 무감각하거나 무능하다는 통렬한 비판도 함께.
“4·19혁명이 왜 일어났습니까. 자유당의 부정부패? 그것도 있지만 실제로는 정치권이 사회 구조 변동에 적응을 못한 게 문제였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근대화 교육을 시켰는데 그 내용이 ‘산업화’였습니다. 그런데 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와 보니 현실은 농업 사회인 겁니다.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었죠. 1960년대 전후 대학 졸업생을 수용할 수 있는 제조업 비율이 전체 산업의 8%밖에 안 됐어요. 농업이 75%였죠. 산업 사회를 공부하고 농업 구조에 적응이 안 되니 지체 현상이 나타나죠.”
송 교수에 따르면 이를 해결한 게 5·16쿠데타였고 이후 산업화가 본격화하면서 중산층이 두꺼워졌으며 그렇게 구조 변동의 지체가 메워지기 기작했다. 이게 ‘박정희 성공 모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하지만 성공 모델은 길어야 한 세대입니다. 1960년대부터 시작해 전두환·노태우 정권에 이르는 1990년대 초까지 한 세대 동안 자기 수명을 다한 겁니다. 1993년 이후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등 민주화 대통령이 나오면서 새 구조 변동을 했어야 하는데 못했어요. 그저 박정희 모델만 계속됐습니다. 3차 산업화 중에서도 고부가가치를 내는 지식기반 서비스업으로의 구조 변동을 했어야 하죠. 왜냐, 우리나라 대학 진학률은 대략 80% 선인데 이들의 교육은 대부분 지식기반 서비스업에 집중돼 있어요. 그런데 현실은 산업 사회의 제조업기반 구조인 겁니다. 역대 민주화 정권이 이것을 해야 했어요. 지금 100만 청년 실업 시대가 이렇게 만들어진 겁니다.”
― 지식기반 사회 구조로 가려면 무엇을 키워야 합니까.
“흔히들 7가지로 말합니다. 교육, 의료, 관광, 금융, 법률, 문화 저널리즘, 패션 디자인이에요. 근데 이것들은 다 기득권자의 공고한 아성에 들어가 있습니다. 규제에 들어가 있어요. 이미 기득권자에게 유리하도록 법이 만들어져 있는 건데 이것을 풀어야 합니다. 그 의무가 대통령과 국회 등 정치권에 있습니다.” 송 교수는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 165명 그 많은 국회의원이 왜 아무것도 못한 식물 국회가 돼 버렸는지 통탄한다”고 장탄식을 했다.
그는 다시 박정희 에피소드를 끄집어냈다. “박정희는 죽기 직전까지 두 가지를 했어요. 매달 ‘민간경제동향보고’를 주재하고, ‘수출진흥확대회의’를 했어요. 경제동향보고는 1965년부터 1979년까지 정치인, 장차관, 기업인 등이 참여하면서 14년간 146차례 회의를 해요. 수출진흥확대회의는 1966년부터 1979년까지 147차례 진행됐습니다. 민간 기업인들을 통해 풍부한 시장 정보를 들었어요. 일부 경제학자들이 반대하고 야당이 매판자본이라고 반대한 수출입국을 그렇게 추진했습니다. 그렇게 장사를 해 가면서 무역 1조달러 시대를 맞은 거라고요. 그런데 소위 민주화 이후 대통령들 뭐했습니까. 1년에 한두 번 대기업 총수들 불러 폼 잡고 밥 먹는 정도지, 무슨 정보를 들은 게 없어요. 구조 변동이 뭔지,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 모를 수밖에….”
대화는 자연스럽게 정치로 옮아왔다.
― 여야가 확정한 정강·정책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현재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정강·정책은 구조 변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기껏 하는 얘기가 다 같이 ‘대기업 잡자’ ‘대기업 때리자’는 거 아닙니까. 우리나라 대기업 매출의 90%는 내수가 아니라 나라 밖에서 벌어 오는 겁니다. 첨단 외국 기업과 아주 치열한 국제 경쟁을 벌여서 말이죠. 근데 대기업을 잡자는 얘기나 하고, 재벌세 걷자고 하니 참….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가 내놓은 3가지가 뭡니까. 복지 확대, 고용 창출, 공정한 시장 경쟁… 이거 안 하려는 나라가 있어요? 그게 무슨 비전입니까. 어떻게 해야 한다는 방법론이 없는데.”
― 안철수 신드롬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이 역시 구조 변동의 지체에 의해 발생한 현상입니다. 지식기반으로부터 소외된 2030들이 안철수를 봤을 때 어떤 정치인보다도 희망을 갖게 해 주는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안철수는 교수, 문화인, 기업인은 되지만 정치판에서는 안 돼요. 뛰어드는 순간 생물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죽어요. 절대적으로 ‘금기’입니다. 정치판은 안철수가 놀 수 있는 판이 아니에요. 정치판의 본질은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음모’와 ‘사기’죠. 정치인은 본능적으로 자기에게 사기당할 사람을 알아낸다는 얘기도 있어요. 안철수는 그런 판에서 놀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놀아 본 일도 없고요. 이 말은 정치적으로 검증이 안 됐다는 겁니다.”
송 교수는 “요즘 안철수가 자기 의중을 자제하지 않고 이러저러하게 나타내는 건 철부지라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지난번 서울시장 때처럼 누구 밀어주고 야권 통합한다면서 돌아다니고 그러면 좀 위험하다는 말도 했다. 안철수 신드롬의 미래에 대해서는 비관적이다. “수그러들 수밖에 없지요. 경험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에서 바람이란 게 1년 가기 힘들어요. 안철수도 아마…. 하지만 야권에서는 앞으로도 안철수를 이용하겠죠. 몇 퍼센트라도 갖고 오면 그 효과는 엄청 클 테니까.”
정치권에 대한 충고를 해 달라는 주문에 그는 지난해 12월 별세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을 거론했다. 그의 부음을 전해 들었을 때 송 교수는 많이 울었다. 포철의 성공 신화를 가리켜 ‘태준이즘’이란 말을 만들어 낼 정도로 열렬한 지지자였다.
“박태준 같은 정치인들이 나와야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공기업을 세계적 기업으로 만든 전례가 없습니다. 그는 3가지는 없다는 철학을 갖고 있죠. 절대적 절망은 없다, 불가능은 없다, 사익(私益)은 없다…. 이것이 태준이즘입니다. 우리 정치인들이 자기를 초월한 공동체에 헌신하는 게 필요하다고 봐요. ‘난 국회의원 떨어져도 좋다, 내 정파에서 쫓겨나도 좋다, 이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면 난 그렇게 하겠다’ 그런 애국심, 공동체 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모두 사익만 가득 찼어요. 젊은이들도 그렇고 정치인들도 그렇고 기업인들도 그렇고 애국심과 공동체 의식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그 점에서 우리가 밑바닥이죠. 영국이 어떻게 해서 영국입니까. 어떻게 해서 300년간 전쟁에서 단 한 번도 진 일이 없습니까. 맨 위에 있는 사람들이 전쟁 나면 가장 먼저 나가 싸우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죠. 영국 이튼 스쿨은 이런 분들의 공동묘지입니다. 옥스퍼드에 있는 크라이스트처치칼리지는 세계대전 때 죽은 사람들 무덤으로 가득 찼어요.”
송 교수는 “우리 지도층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다”면서 입맛을 다셨다.
인터뷰 = 허민 사회부장 minsk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