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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단식하고 현장을 뛰어라"

화이트보스 2012. 5. 5. 18:35

디지털 단식하고 현장을 뛰어라"

  • 이신영 기자
  • 입력 : 2012.05.04 15:32

    '디지털 단식' 외치는 엔도 이사오 와세다대 MBA교수
    "일본기업 실패는 모니터만 들여다보다가 현장감각 잃은 탓"

    “페이스북(facebook)을 금지하면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그 회사 안 갑니다.”
    지난해 11월 네트워크 장비업체 시스코(Cisco)가 전 세계 대학생 2800명에게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 사용을 금지하는 회사에 취업제의가 들어오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어봤더니, 대학생 10명 중 5명은 이렇게 대답했다. 10명 중 7명은 면접 때 ‘미리 SNS를 쓸 수 있는지 묻겠다’고도 했다. 세계적 취업난에도 연봉보다 SNS가 더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준 결과였다.

    폭발적인 디지털 기술과 정보 이용 욕구의 흐름을 반영해 코카콜라, 네슬레(Nestle) 같은 상당수 글로벌 기업들은 ‘직장인들이 업무에 디지털 기기와 콘텐츠를 사용하는 건 바람직하다’는 IT 규정을 마련해 운영 중이다. 미국 휴스턴대 MBA는 아예 신입생들이 입학하기 전에 구매할 노트북 사항으로 ‘4기가바이트(GB) 이상 메모리’ ‘무선랜·화상회의용 카메라 필수’ 등을 콕 집어 제시할 정도다.

    그러나 이런 세계적 흐름에 역행(逆行)하는 인물이 있다. 그는 수년 전부터 자신이 가르치는 MBA 수업을 듣는 학생의 노트북 지참을 금지한다. 회장을 맡은 컨설팅 회사에선 부하 컨설턴트들에게 ‘디지털 기기를 내려놓고 현장에서 생생한 정보를 입수하라’는 업무강령을 내걸었다. 하지만 컨설턴트 5명이던 그 회사는 지금 100명이 넘는 회사로 컸다.

    주인공은 엔도 이사오(遠藤功) 와세다대 MBA 교수 겸 컨설팅회사인 롤랜드 버거(Roland Berger)의 일본 법인 회장이다. 그는 도요타·소니 등 일본 대기업 수십 곳을 컨설팅하면서 ‘현장·현물·현실’을 강조하는 삼현주의(三現主義)를 외쳐온 ‘현장 경영의 대가(大家)’이다.

    “지금은 ‘디지털 단식(斷食)’이 절실합니다. 노트북, 스마트폰 같은 IT기기는 그냥 도구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인 양 깊이 매몰돼 기업이 정체성을 잃고 있습니다. 기업 경영을 가르치는 MBA는 인터넷에서 활력 떨어지는 정보를 짜깁기해 공부하는 MBA(Managed by analysis· 분석에 의존한 경영)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IT기술=업무효율’이란 환상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현장을 뛰어야 합니다.”

    그는 직장인들이 정보의 홍수에 파묻혀 바보(Babo·그리스 신화에서 우스꽝스러움을 상징하는 인물)의 롱테일(longtail)을 겪고 있다고 경고했다. 본래 롱테일의 법칙은 다수의 80%의 합(合)이 소수 20%의 그것보다 뛰어난 가치를 지닌다는 뜻이다. 예컨대 판매량이 적은 제품도 모두 합치면 매출에 크게 기여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엄청나게 쏟아지는 디지털 정보의 경우, 이를 다 합쳐도 쓸 만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Weekly BIZ는 엔도 이사오 교수를 지난달 서울에서 만났다. 최근 직장인의 디지털 중독현상과 이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 ‘디지털 단식(斷食)’이란 책을 낸 그는 “직장인에게 ‘일’이란 현장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엔도 이사오(遠藤功) 와세다대 MBA 교수 겸 롤랜드 버거 일본 법인 회장은“일본 기업의 전성기는 현장·현물·현실에 몸으로 부딪치던 시대에 있었다”며“지금은 불필요한 디지털 장비에 얽매여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현장을 뛰세요. 지금 사무실에서 일하는데 성과가 나오지 않은 직원들이 있으면 어떻게 일하는지 관찰하세요. 컴퓨터가 아니라 발로 뛰며 땀을 흘려 얻는 정보로 승부해야 합니다."

    지난달 17일 오전 9시 서울 하얏트호텔의 한 회의장. 시세이도(資生堂), 미쓰비시(三菱) 등 일본 대기업의 한국 법인 대표 30명은 엔도 이사오 와세다대 교수(롤랜드 버거 일본 법인 회장)가 주최한 간담회에 참석해 그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있었다. 엔도 교수는 "기업의 존립 목적은 소비자들의 요구를 모니터가 아닌 얼굴을 직접 보고 깨닫는 것"이라고 했다. 24년째 기업 컨설팅을 해온 그는 "디지털 콘텐츠와 기술로 인해 기업 현장에서 아주 역겨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수년 전, 자신의 컨설팅 고객인 한 중견 제조업체 CEO의 말이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CEO와 그 회사의 협력업체가 발표하는 프레젠테이션 자리에 참석해 있던 중이었어요. 협력업체 직원이 파워포인트 프로그램을 이용해 발표하던 중간에, 그 CEO가 발표를 중단시켰습니다. '모양새는 아름다운데 콘텐츠가 꽝이다'는 이유에서였죠. 화를 내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CEO는 '정보를 백날 인터넷에서 복사해서 와봐야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1~2장으로 만들어도 콘텐츠가 좋으면 된다'고 하더군요."

    그는 "감정을 좀처럼 표현하지 않았던 일본 기업가의 이 한 마디가 지금의 기업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했다.

    "컴퓨터 앞을 떠나 현장을 뛰어라"

    ―왜 기업이 디지털 단식(斷食)을 해야 하는가.

    "IT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단점이 장점보다 커졌다. 어느 순간 과식(過食)을 하게 된 것이다. 얼마 전 도쿄의 한 기업을 방문했는데, 어느 부서의 직원이 바로 옆자리에 앉은 상사에게 이메일로 말을 걸더라. 말을 하면 될 수준의 얘기를 이메일로 보낸 것이다. IT는 원자력과 비슷하다. 건실하게 쓰지 않으면 폭탄이 된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가치가 떨어진다는 바보의 롱테일을 주장했는데.

    "일본 총무성이 2008년 12월부터 2010년 6월까지 매달 시행한 조사를 보면, 주요 통신사 15곳의 직원들이 수신한 이메일의 64~72%가 스팸 메일로 판명 났다. 얼마 전 캐논의 CEO는 "IT 때문에 정작 해야 할 일의 60%밖에 못 한다"고 말하더라. 정보의 양은 엄청나게 많은데 정보의 쓰임새는 더욱 적어진 것이다. 인터넷으로 얻은 100가지 문서보다 현장에서 듣는 한 마디가 더 값어치 있다."

    ―디지털 콘텐츠를 이용하면서 직원의 업무 효율성이 낮아졌다는 얘기인가.

    "물론 디지털 콘텐츠를 쓰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기존에 디지털 콘텐츠가 없을 때 업무 효율을 100% 발휘할 수 있었다면, 지금 그 수준이 20~30%대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직장인들은 '오늘 제대로 뭔가 하나 했다!'는 환상에 빠졌다. 한 일이라고는 도착한 이메일에 답신해서 자기 일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 것뿐인데도 말이다. 그런 것은 '일'이 아니다."

    ―정보를 잘 가공만 해도 창조물로 대접해주는 시대 아닌가.

    "MBA를 보라. 요즘 학생들은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는 일엔 도가 텄다. 그런데 내가 최초로 접한 정보가 아니면 새로운 창조물이 아니다. '이게 진짜 새로운 정보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 문화 때문이다. 그래서 MBA(Master of Business Administration)가 아니라 MBA(Management By Analysis)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이다. 직장인이 현장에 나가는 것을 '시간이 아까우니 컴퓨터 동영상으로 현장을 관찰한다'고 자위(自慰)하는데 그건 건설사의 '부실공사'나 다름없다. 해야 할 수고를 생략(手拔き)하는 꼴이다."

    ―하지만 디지털 단식은 기업의 문화를 바꾸는 것인데, 기업 입장에서 리스크가 클 것 같다.

    "하루에 1시간이라도 실험을 해봐야 한다. 이메일·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를 끊고 사람과 대화해야 한다. 현장 소통이 중요한 점을 깨닫고 나서 IT를 올바르게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SNS는 직장인이 스트레스를 푸는 방식으로 직장에서 주목받고 있지만, 그것과 업무 창의성은 별개다."

    '컴퓨터 노예'된 중간관리직 중독 심각

    ―디지털 중독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기업 계층이 있나?

    "IT 버블이 시작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 입사한 '중간관리층'이 가장 심각하다. 이들은 과거 기업의 활기 넘치던 시절을 경험하지 못한 채 급성장하는 컴퓨터의 노예가 됐기 때문이다. 기업의 경비 절감·사업통합·효율화 문화에 길든 중간관리직은 현장에 나기지 않고 부하들이 해오는 일만 컴퓨터로 결재한다. 배운 지식이나 기술을 행동으로 적극 실천하지 않는다. 성실하지만 '처리하고 일을 배분하는' 일만 잘한다."

    ―당신이 만나본 중간관리층의 모습은 어떠한가.

    "얼마 전 한 기업의 영업 부서 과장을 만나 '하루에 고객을 더 기쁘게 하기 위해 시간을 얼마나 투자하냐'고 묻자, 그는 '10분도 안 된다'고 하더라. 그러다가 '결재도 해야 하고 상관도 챙겨야 하고 바쁘다'며 말을 얼버무리더라. 중간관리층은 피해자이자, 가해자다. 이들을 구해낼 사람은 CEO나 임원급 간부밖에 없다."

    ―디지털 중독의 문제를 가장 절실하게 깨닫고 있는 업계는 어디인가?

    "IT업계다. 대형 IT 회사인 마이크로소프트(MS)·구글·IBM 등은 디지털 중독을 굉장히 두려워한다. 그래서 이들은 직원들에게 때론 IT를 잊고 밖으로 나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라고 얘기한다. 카페테리아 같은 데 모여 모바일이나 PC 없이 그냥 대화하는 그런 문화를 만들기도 하지 않나. 이건 그들이 문제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IT 회사들은 모두 지금 어떤 선을 넘고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한국에서는 최근 여러 기업이 적극적으로 CIO(최고정보책임자)를 뽑고 있는데.

    "CIO는 미국의 IT기술을 받아들이며 그 업무방식을 채택하면서 '당연히 뽑아야 하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 MS, 인텔 등이 과거 '1인 1컴퓨터' 캠페인을 펼치면서 아시아권에도 이런 경향이 확산했다. IT정책을 좌지우지하므로 신중하게 뽑아야 한다. '변화하고 진보하는 것'과, '탁월한 결과를 내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인데 이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현장감각을 잃은 일본 기업 실패에서 배워라"

    엔도 이사오 교수는 일본 기업을 강하게 질타했다. 그는 "일본 기업은 30~40년 전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는 비결이 현장경영을 강조하는 삼현주의(三現主義)였는데, 지난 10년간 이것을 아예 잊고 살았다"며 "다른 외국 기업들은 일본 사례를 철저하게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일본 기업들이 최근 성적이 부진하다. 소니부터 실적이 하향곡선을 타고 있는데.

    "소니의 가장 큰 문제점은 소통 부재다. 현장 감각이 사라졌다. 일본의 경우 기업 조직력은 높은 성과층(20%), 중간층(60%), 낮은 성과층(20%)으로 구분된다. 기업 동력은 중간층에서 나와야 바람직한데, 지금은 중간층·낮은 성과층의 80%가 현장을 등한시하면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결국 언제나 잘하는 높은 성과층 20%에 기업의 성장이 좌우되는 것이다."

    ―당신이 가르치는 MBA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나.

    "내 MBA수업엔 IBM·구글·소니에 다니는 학생들이 있다. 그런데 내가 노트북 지참을 금지했더니 유독 소니 직원만 말을 안 듣더라. 어떤 학생은 수업 중에 공개적으로 '인터넷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교수님이 설명한 기업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냐'고 언성을 높여서 '우선 내 관점에 집중하는 것이 수업의 목표'라고 따끔하게 혼냈다. 물론 닛산이나 도요타처럼 현장을 지켜가며 성공 가도를 달리는 기업도 있지만 일본 기업에선 규율(discipline)이 부재(不在)한 상태다."

    ―일본의 어떤 기업이 특히 문제가 심각한가.

    "에너지 기업들이다. 이들 회사는 정말 관료주의적이며 컴퓨터 중독자들이 많아서 전혀 업무가 효율적이지 않다. 최근 친분이 있는 한 대형 에너지 기업이 나한테 디지털 단식을 하겠다고 말하더라. 장기적으로 컴퓨터를 없애겠다고 했다. 그런 점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직원들에게 반드시 IT의 폐해에 대해 체계적으로 교육해야 한다."

    ―한국 기업은 어떻다고 보는가.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 박용만 두산 회장 등은 트위터를 훌륭한 소통 무기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일본에서 손정의 소프트뱅크 CEO도 트위터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은 아직은 기업에서 IT 이용 수준이 건전한 것 같다. 그럴 때일수록 더 철저하게 '우리 회사에서 IT가 어떤 의미인가'라고 자문(自問)해야 한다. IT는 사람보다 똑똑하지만, 사람은 IT를 극복할 만큼 똑똑하지 않기 때문이다."

    _엔도 이사오(遠藤功) 와세다대 MBA 교수는

    출생:1956년 일본 도쿄

    학력:와세다대 졸업, 미국 보스턴대 MBA

    경력:1979년 미쓰비시전기 입사, 1988년 BCG 입사, 1992년 엑센추어(컨설팅 회사) 입사·파트너로 승진, 1997년 부즈 앨런 & 해밀턴(〃) 이사, 2000년 롤랜드 버거 일본 법인 사장, 2006년 회장(現)

    저서:‘끈질긴 경영’, ‘크리에이티브 비즈니스 싱킹’, ‘미에루카 경영전략’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