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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의 뒷면은 부패다

화이트보스 2012. 5. 1. 10:43

규제의 뒷면은 부패다

기사입력 2012-05-01 03:00:00 기사수정 2012-05-01 03:00:00

세계 최대 가구업체 이케아(IKEA)의 가구는 중국 폴란드 등지의 해외 생산거점에서 만든다. 스웨덴의 이케아 본사는 개발 디자인 물류관리가 주업이다. 제조업보다 ‘소프트 인프라’ 서비스업에 가깝다.

노키아는 휴대전화 생산량의 약 40%를 마산자유무역지역에 있는 한국 공장에서, 나머지 대부분은 중국과 인도에서 만든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쿠퍼티노의 애플 본사는 거대한 디자인센터다. 생산은 17개국 협력업체가 맡는다. 아이폰 뒷면엔 ‘Made in USA’가 아니라 ‘Designed in California’라고 쓰여 있다.

이런 회사를 ‘플랫폼 기업’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연구개발과 디자인 등 제품의 핵심 토대(플랫폼) 설계와 판매에 집중하고 생산은 전 세계 공장에 맡겨 비용은 최소화, 수익은 극대화한다. ‘자본주의 4.0’의 저자 아나톨 칼레츠키에 따르면 미국이 1000달러짜리 중국산 컴퓨터를 수입할 경우 미국의 무역수지는 1000달러 적자로 기록되지만 그 가치의 대부분은 애플 인텔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플랫폼 기업의 이윤과 로열티 수입으로 미국에 돌아온다.


재주는 제조업이 넘고, 돈은 제조업 기반의 서비스업이 챙기는 현실은 대세(大勢)다. 서비스업은 고용 안정성에서도 제조업을 능가한다. 자동화와 해외 아웃소싱으로 줄어든 제조업 일자리는 경기가 살아나도 다시 늘기 어렵다.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이다. 창의와 상상력을 먹고사는 서비스업이 고용 성장 복지의 종합 해결사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앞으로는 세계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 아니라 ‘상상력 고취 국가’와 ‘상상력 저하 국가’로 나누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민의 상상력 발휘, 새로운 아이디어와 산업 창출, 특기 계발을 장려하고 기회를 제공하는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로 양분된다는 것이다. 한국은 어느 쪽일까.

최근에 만난 한 대기업 경영인은 “갖가지 규제들이 서비스업 사회로의 이행을 가로막고 있다”며 10년 가까이 계속된 영리병원 도입 논란을 예로 들었다. “영리병원이 국민건강보험체계를 흔들 거라고 우려하는데, 부유층이 건강보험은 의무 가입하고 민간보험을 따로 들어 더 나은 의료서비스를 받게 하면 되는 것 아니냐”며 답답해했다. 이미 웬만한 가정에선 건강보험 외에 암보험 치과보험 등의 민간보험을 들고 있다.

‘투자개방형 의료법인’ 대신 ‘영리병원’이란 약칭을 쓴 데서 오해가 비롯된 측면이 있다. 의료행위의 대가로 이윤을 취하는 게 영리병원이라면 지금도 국군병원 보훈병원 같은 공공병원 말고는 다 영리병원이다. 고액 환자 진료기록과 그들에게서 받은 현금을 집 안 곳곳과 비밀창고에 숨겨 놓고 탈세하다 적발된 병원들도 비(非)영리병원일 수 없다.

규제는 부패를 낳는다. 권력형 비리로 드러난 서울 양재동 복합유통센터 파이시티는 시설변경 신청에서 건축 허가까지 5년 2개월이 걸렸다. 빚내서 사업하는 시행사는 금융압박 때문에라도 급행료 뇌물을 ‘지르게’ 돼 있다. 시간이 워낙 오래 걸린 탓에 알선수재 시점이 공소시효를 넘기기도 했다. 단계마다 법정처리 지연제한 기간을 두고 이를 지키면 인허가 비리는 확 줄어들 수 있다.

‘상상력 고취국’이냐, ‘상상력 저하국’이냐는 예컨대 대도시 버스터미널 용지에 2조 원대의 복합유통센터를 짓고 그 안에 영리병원을 입주시키는 것을 결정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로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이형삼 논설위원 han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