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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평양행 기차였어 ?

화이트보스 2012. 5. 15. 17:05

그거 평양행 기차였어 ?[중앙일보] 입력 2012.05.15 00:00 / 수정 2012.05.15 00:00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총선이 끝난 마당에 표를 되돌릴 수도 없다. 분노와 희망을 실어 힘껏 던진 종이돌이 투표함에 봉해져 선관위 창고에 입고됐기 때문이다. 불량상품이라면 반품이나 환불을 요구할 수 있겠으나 꺼내 볼 수도, 다시 하자고 할 수도 없다. 그게 평양행 기차였다니, 내가 산 기차표가 울산행도 창원행도 아니고 평양행 기차였단 말이야? 통합진보당 경선 비리사태가 불거진 요즘, 진보당을 꾹 눌러 찍은 유권자들은 울화증에 시달린다. 진보당 지지자 230만 명 중 적어도 절반은 그렇다. 당내 주사파의 조직적 개입에 의해 기차 행선지가 바뀌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자 자신이 던진 종이돌을 회수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방법이 없다.

 일반 시민들도 경악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제3당으로 떠오른 통합진보당의 지배세력이 그런 전력과 정치 행보를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내내 불안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다른 당을 선택한 유권자들도 비례대표의 면면을 일일이 점검하고 투표한 것은 아니므로 뭐라 탓할 입장은 아니다. 그런데 조준호 진상조사위원장이 밝힌 것처럼 노회한 작전세력이 맹활약했다는 점도 놀랍거니와 관행적 부정을 통해 골수 주사파 운동가들이 국회에 대거 입성했다는 것이 당혹스러워 쩔쩔매고 있는 게 저간의 사정이다.

 사태의 본질은 경선 비리가 아니다. ‘우발적 사건’이라 우기는 이정희 대표와 당권파, ‘총체적 부정’을 주장하는 심상정·유시민 중앙위원과 비당권파 간 격돌이 통합진보당의 향방을 결정짓겠지만, 더 중대한 문제는 주사파를 중앙정치 무대에 공인세력으로 인정할 것인지 여부다. 경선 비리는 명백히 현행 선거법 위반이므로 법의 심판을 받으면 해소된다. 그런데 과거 경력으로 미뤄 진보당에 ‘평양행’ 간판을 걸 것이 예상되는 주사파 세력을 결국 수용할 것인지의 문제가 향후 10년간 한국 정치의 최대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통합진보당 주력인 민노당계 인사들은 주사파가 대세다. 베일에 싸인 인물인 이석기는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이 결성한 민혁당의 경기남부위원장을 맡았다가 3년 도피 끝에 1년 남짓 복역했다. 서울 관악을 당선인 이상규는 민혁당 수도 지역을 맡았고, 선거캠프에 가세한 이승헌은 경기동부의 주력이었다. 김미희 당선인의 남편이자 민노당 사무부총장인 백승우, 김재연 당선인의 남편, 김제남 비례대표 모두 골수 주사파다. 당직자들도 마찬가지다. 이정희 대표는 물론 당직그룹인 장원섭·이의엽·우위영이 주사파다. 전남대 학생회장 출신 오병윤 당선인은 반미·평화·노동운동의 투사고, 국회 최루탄 사건의 주역인 김선동 의원 역시 반미전선에서 혁혁한 전과(戰果)를 자랑한다. 이정희 대표를 정점으로 반미·친북의 끈끈한 연대로 묶여 있다. 경선 비리는 세력 독점을 위한 통일전선이었다.

 통합진보당의 도약은 한국 정치가 그만큼 성숙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노동계급을 대변하는 노동당, 통일을 최대 강령으로 내건 민족당도 다 필요하다. 그런데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공당의 주역들이라면, 적어도 이런 질문에 진정으로 답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인정하는가? 혹시 마음속에 인공기를 걸어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연평도 포격사태 같은 게 재발한다면 다시 한국 정부를 탓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 말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색깔 논쟁이 아니다. 책임 논쟁 내지 정체성 논쟁이다. ‘이거 평양행 기차가 아닙니다’고 직설화법으로 못 박아 주면 좋으련만, 그때마다 한국의 ‘종미 성향’으로 되받아치고 간접화법과 상징적 언술로 즉답을 회피하는 주사파의 행동거지가 영 미심쩍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의 최대 주주인 민주노총도 몸이 달았다. 긴급회의를 소집해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낼 정도이니 말이다. 민주노총은 진보당에 돈(46%)과 사람(32%)을 댄 최대 조직이다. 노동계급을 위한 민주노총의 투자가 결국 북한 감싸기로 귀착되는 것을 더 용인할 수 없다는 울분인데, 민주노총 내부도 주사파(NL계열)와 평등파(PD계열)로 갈려진 지 오래이니 더 세게 밀어붙일 형편도 아니다. 잘못하다간 민노당을 박차고 나간 심상정·노회찬파에 주도권을 양도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주사파는 버틸 것이다. 청년 시절 이후 겪었던 ‘고난의 행군’에 비하면 이 정도는 별것 아니라고 확신할 것이다. 어엿한 민주국가에서 어떤 이념 논쟁도 탄압을 받아서는 안 되지만 국가 정체성을 훼손하는 데까지 권리를 확장할 수는 없다. 내부 분열과 얼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지금 한국에 대한 의무와 유권자에 대한 예의, 더 중요하게는 진보의 싹을 지키고자 한다면 진보당이 밝혀 줘야 할 게 있다. 서울과 평양 중 그대들의 ‘마음의 고향’은 어디인가? 그거 ‘평양행 기차’인가, 아니면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당당한 함대인가? 결국 터질 게 터졌다. 시민들이 그 답을 기다리고 있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